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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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며칠 복잡한 일들로 인해 약간의 두통이 찾아왔다.

어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두통만 심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이 책을 집어 들고 어느 부분을 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에 빠져들었다.

소설이 아닌 여행기에 푹 빠져서 읽어보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마치 내 눈 앞에 황량한 알타이의 벌판과 그 곳의 냄새, 그리고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읽는 순간만은 그 두통도 사라졌다.


개인적으로 청년시절에 우연히 몽고를 알게 된 후 그 곳을 방문하려고 몇 번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무슨 일인지 그 계획이 무산되었다.

결국 지금까지 나는 몽고를 가 본 적이 없다.

다만 남양주 수동에 있는 몽골문화촌만 몇 번 방문했다.

그 곳에 가면 항상 몽고문화공연을 보게 된다.

여러 가지 기예 공연도 있지만, 가장 내 마음에 드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며 몽골의 노래를 하는 공연이다.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광활한 몽고 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혹시나 내 조상이 몽고 사람이여서 내 속에 그런 DNA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마치 광활한 몽고 벌판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책은 다른 여행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의 책이었다.

보통 여행기는 그 나라의 유명 건축물이나 유적지 등을 방문하고,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 배수아가 몽골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알타이 지방에서 갈잔 치낙이라는 투바 유목민과 함께 생활한 한 달 간의 기록이다.

몽골의 서쪽인 알타이 지방에서는 특별한 유적물도 없을 뿐더러 인간이 만든 문명화된 편의 시설도 없다.

단지 유르테라고 부르는 이동식 천막만이 있었고, 작가는 유럽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갈잔의 유르테에 머물렀다.

그러기에 이 여행기에는 특별한 건축물에 대한 감상이나, 커다란 사건에 대한 기록 등이 없다.

그냥 작가가 알타이 벌판에서 생활하고 만난 사람들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 뿐이다.

그런데 그 소소한 이야기가 마치 읽는 사람을 그 알타이 벌판으로 끌고 가는 듯한 힘이 있다.


 그 곳에 서면 삶은 전설이었다. 나침반도 망원경도 없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 것일까. 어느 방향이러시아이며 어느 방향이 중국인지, 어느 방향이 울란바토르이며 어느 방향이 카라코롬인지.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아는 것일까, 영혼들이 떠나간 길을. 내 말은 발걸음이 느렸다. 일행이 타고 있는 말 중에서 가장 느렸다. 승마에 겁을 먹은 내가 갈타이에게 가장 느린 말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사방을 돌아보니 어느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비안개의 물방울 속에서 나는 홀로 터벅터벅 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 말과 함께 지상에서 홀로 살아 있는 존재, 홀로 꿈틀거리며 하늘을 향해 움직이는 존재였다. 향나무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은 하늘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으며 그곳의 산맥은 하늘이 내려앉은 길고 높은 등뼈였다. 길이 오르막으로 변할 때마다 늙고 지친 말은 비틀거렸고, 허덕거렸고, 강풍에 맞서기 위해서 안간힘을 썻으며, 문득문득 몸을 떨면서 비명 같은 외마디 울음을 내질렀다. 왜 말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그런 소리를 지르는 것일까. 마치 그들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영혼들을 마주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그 유령들에게 비명의 인사를 건네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휘몰아치는 회색빛 바람 속에서 홀로 무서워하며 생각했다. (P143-4)

알타이의 풍경 묘사와 함께 그 곳에서 작가가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이야기가 매우 정겹다.

특히 그 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마리아'라고 부르는 오스트리아 여성 마리아와의 우정이 매우 재미있다.

마리아는 오페라를 좋아하고 여러 언어에 능통한 여성이지만, 알타이에서 뿌리를 내리고 싶어하는 여성이다.

실제로 갈잔의 소개로 유목인 총각과 선?을 보기도 한다.

그녀는 마테차를 즐겨 마시는데 작가와 함께 마테자를 마시며 우정을 키운다.

그녀와의 일화 중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작가와 함께 투바족의 미인대회에 참가하려다가 무산된 일이다.

갈잔의 농담으로 축제 때 미인대회에 나가라는 말을 사실로 알아듣고, 마리아와 작가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대회를 준비한다.

두 여성 모두 페미니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회를 기대했던 것은 알타이에 대한 구애였을 것이다.

나중에 그것이 갈잔의 농담이었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던 것은 아마 짝사랑의 대상에게 거절 당한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여행기는 매우 진솔하다.

작가의 무용담이나 무언가를 향한 거창한 묘사가 없다.

매 순간 진솔하고, 진지하게 그 시간을 음미하게 한다.

책 속에 알타이의 황량한 벌판이 펼쳐지는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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