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1Q84 1~3 세트 - 전3권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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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하루키를 접한 것은 우리나라에 아직 하루키의 열풍이 불기 전이었다.

처음 그의 작품 [상실의 시대]를 접하고 많은 위로를 받았다.

내가 하루키의 작품으로 위로를 받았다는 것은 하루키의 작품의 주제나 그 속의 메세지에 감명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사실 하루키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 수록 도대체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더욱 더 모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비오는 날 쓸쓸한 마음으로 집 밖에 나와서 도시의 뒷골목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말없이 내 옆에 와서 함께 걸어주는 기분이었다.

비오는 날 도시의 뒷 골목은 비릿내도 나고, 여러가지 네온들로 인해 분위기도 심란하지만 그래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함이 있다.

하루키의 소설의 분위기가 그랬다.

때로는 마음이 쓸쓸하거나 심란할 때 읽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안함을 주는 소설이었다.


그러다가 군대에 있을 때 정도에 하루키의 인기가 쏟으며 [태엽갑는 새]가 발표 되었다.

나는 지금도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하루키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인생관이 여기에 다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루키의 소설을 몇 권을 더 읽은 후 그의 소설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하루키의 작품도 드물게 발표되었지만, 그 소설을 읽을만한 여유도 없었다.

당연히 몇 년 전 오랫만에 하루키의 장편소설인 [1Q84]가 출간하고 떠들석 했을 때도 이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거이 10년만에 다시 하루키의 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예전에 하루키에게 느꼈던 그만큼의 감성은 느끼지 못했다.

구성은 더 치밀해졌고, 묘사는 더 사실적이 되었다.

마치 이 소설에서 고마쓰가 덴코가 고쳐 쓴 [공기 번데기]를 향하여 한 조언을 하루키가 들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독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을 소설 속에 끌어들일 때는 되도록 상세하고 정확한 묘사가 필요해. 생략해도 괜찮은 것, 혹은 반드시 생략해야 하는 것은 대부분의 독자가 이미 목격한 적이 잇는 것에 대한 묘사야" (1권 P370)


이 소설은 [태엽갑는 새]를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으로 묘사해 놓은 소설 같았다.

그럼에도 예전의 하루키의 그 쓸쓸하고도 공허한 표현이 조금은 퇴색한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의 여전히 모호한 세계관과 그 세계 속에서의 걸음은 계속되지만...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세계와 상실의 의미가 조금은 더 손에 잡힐 듯 하다.





이 소설은 아오마메라는 여성과 덴코라는 남성의 시각에서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3권에서는 우시카와라는 인물이 끼어들기는 하지만 주된 흐름은 아오마메와 덴코가 이끌어간다.


아오마메는 한 때 소프트볼 팀에 속해 있었던 스포츠 클럽 강사이다.

그녀는 마르지만 근육이 있는 체형에 간결하고 깔끔하 성격의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겉으로는 스포츠 클럽 강사지만 여성을 학대하는 남성들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한다.

개인적으로 개발한 아이스픽이라는 작은 침으로 자연사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아오마메가 한 남성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러 가기 전에 교통체증으로 인해 고가도로 위의 택시 안에 갇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차에서는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운전사는 급한 일이면 고가도로와 일반도로를 연결하는 비상 사다리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다리로 다른 세상으로 내려간다.


그녀가 다른 세상에 도착해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경찰관 제복이 바뀌어 있고, 무기도 자동소총으로 바뀌어져 있다.

무엇보다는 저녁마다 달이 두 개씩 뜬다.

그녀는 자신이 속해있던 1984년과 지금의 세상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지금의 세상을 1Q84라고 부른다.



덴코는 학원에서 수학을 가리키는 임시 강사이면서, 소설을 쓴다.

물론 그의 소설은 한 번도 당첨된 적이 없다.

단지 고마쓰라는 편집자가 부탁하는 잡일을 하면서 그의 지도를 받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고마쓰는 후카에라라는 소녀가 쓴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을 덴코에게 개작할 것을 제안한다.

이 작품은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지만 문장은 형편이 없기 때문이다.

덴코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부하지만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후카에라를 만나고 공기번데기를 개작하게 된다.


아오마메와 덴코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두 남녀의 이야기처럼 흐른다.

그러다가 덴코의 어린시절 회상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주던 증인회 소속의 여자 아이를 떠올린다.

그리고 1권 말미에서 그 여자 아이가 아오마메임을 암시한다.



둘은 점점 선구라는 종교단체에 다가가면서 일치점을 찾아간다.

아오마메가 최종적으로 다른 세상으로 보내려는 남자는 선구의 지도자이다.

덴코 역시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을 통해 선구라는 종교단체에 접근해 간다.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은 실상 후카에라가 선구라는 종교단체 속에서 경험한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리틀피플을 [공기번데기]라는 작품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리틀피플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선구의 지도자나 후카에라, 덴코와 연결되어 있는지는 무척 모호한 단어들로 설명을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오마메는 덴코를 만나 함께 1Q84의 세계를 빠져 나오게 된다.





하루키의 다른 소설처럼 이 소설에서 상징적인 단어들, 모호한 설명, 그리고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보통 하루키 소설에서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관문이 등장한다.

우물 속에 빠지는 것과 같은 순간적인 경험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무언가를 상실하게 된다.

아니면 상실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든지...


하루키가 말하는 '상실'이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아마 안다고 해도 그것은 글로 표현하기 모호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고 하면 아마 하루키가 이야기하려는 '상실'과는 다른 것일 테니까...


이 소설에서도 아오마메는 고가도로를 내려가는 경험을 통해...

(고가도로이지만 무언가 아래로 내려간다는 부분에서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는 무언가가 상실된 세계이다.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의 상실은 단순히 어떤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 묘사 되지는 않는다.

어떤 기묘한 만남을 통해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그 만남을 리틀피플과의 만남으로 묘사한다.

리틀피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 소설은 계속해서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이 소설을 읽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도대체 리틀피플이 뭐냐?"고 묻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리틀피플이 뭐냐?'가 아니라 '리틀피플과의 만남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리틀피플과의 만남으로 세계는 무엇을 상실했고, 나는 무엇을 상실했냐는 것이다.

하루키는 이 세계가,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들이 이런 상실 속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상실 속에 묻혀서 살아간다고 본다.


그럼에도 아오마메와 덴코는 그 상실된 세계에서 앞으로 나가려 한다.

올바른 길도 모른다.

해결책도 없다.

하루키는 아예 처음부터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정할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의 소설은 모호한다.


사람들은 자신만이 아는, 아니 안다고 생각하는 길이나 해결책이 있기에 글과 소설을 쓰려고 한다.

글을 통해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길과 해결책을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그런 것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상실의 세계 속에서 길을 찾아 나선다.

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나름대로 최고의 몸부림을 친다.

그것이 그의 소설이고, 그 주인공이 아오마메와 덴코이다.

아아마메와 덴코, 그리고 하루키는 상실의 세계 속에 살고 있고, 그 속에서 앞으로 걷고 있다.

태엽에 감기어 계속해서 걸어가는 새처럼....


아오마메와 덴코가 그 상실의 세계에서 빠져나왔는지는 소설 끝에서도 여전히 모호하다.

어쩌면 다른 상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상실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상실의 세계 속에 있고, 그 세계에서 걸어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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