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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개인적으로 한국문학의 단편소설들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다.
단편소설들을 읽다보면 마치 영화의 슬로우모션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장편소설들은 긴 호흡을 가지고 스토리를 이어가는 반면에,
단편소설들은 한 순간의 사건들과 장면들을 묘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사건들과 장면들의 세밀한 묘사 속에 시간, 소리, 감정 등이 느리게 움직인다.
나는 그것들을 느끼는 게 좋다.
그런데 김중혁작가의 단편소설은 이런 모든 것들을 깨뜨린다.
마치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다가 갑자기 처음 보는 드라마를 시청하는 느낌이다.
앞의 내용을 모르기에 당황스러운데...
드라마가 갑자기 끝나버려서 더 황당스럽다.
바로 이 소설들의 느낌이 그렇다.
첫 작품 [상황과 비율]은 어느 포르노영화사의 상황감독이야기이다.
한국에서 포르노영화사들이 존재하는 것도 가상이지만, 상황감독이라는 것도 가상일 것이다.
영화 속의 장면의 비율을 중요시 하는 차양준은 영화촬영을 얼마 남겨 두고 잠적한 '송미'라는 여배우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송미를 영화에 복귀하게 설득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송미는 다시금 영화를 찍고, 촬영장에서 남자 배우와의 관계 중에서 차양준과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끝이다.
두 번째 [피포켓]이라는 작품에서는 주인공 이호준이 갑자기 기차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호준은 친구 장우영과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기민지'를 찾으러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기민지는 얼마 전 실종되었고, 그들은 예전에 기민지가 부산 바닷가에서 쉬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것을 기억하고 무작정 부산으로 기민지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기민지가 돌아왔다는 뉴스가 방송된다.
그리고 끝이다.
세 번째 [가짜팔로 하는 포옹]도 마찬가지이다.
알콜 중독자인 주인공이 헤어진 여자친구를 만나 자신의 경험담을 술주정 비슷하게 이야기 한다.
여자친구는 술주정을 듣다가 그를 한 번 안아주고 떠난다.
그리고 끝이다.
김중혁 작가의 소설들이 대부분 이렇다.
그런데 앞의 작품들과는 분위기가 다른 [보트가 가는 곳]이란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특히하게 종말적인 분위기가 나는 아포칼립스적인 소설이다.
어느 날 지구에 탁구공 모양만한 셀수 없는 우주선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이 땅에 지금 1미터 정도의 구멍을 수없이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그 구멍 속에 빠져서 죽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들이 몰아붙이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우주선들이 사람들의 뒤와 양옆에 구멍을 뚫어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 이렇게 남쪽으로 걸어가는 길에서 '정화'라는 여성을 만난다.
둘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하게 된다.
그렇게 남쪽 끝에 이르자 일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바다를 헤엄쳐 간다.
이런 혼란 속에 정화는 구멍 속으로 빠지게 된다.
주인공은 그녀의 손을 잡지만 끝내 구하지 못한다.
그리고 주인공만 홀로 남는다.
이 소설도 여기서 끝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김중혁 작가의 다른 소설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황당하기만 한 소설의 상황들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인생의 모습이 아닐까?
뒤돌아가 갈 수도 없고, 옆으로 갈 수도 없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들...
밀고 밀치는 경쟁 속에서 주변 사람들은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만, 그들을 구해 줄 여력같은 것은 애당초 없다.
이런 치열한 상황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을 한다.
상황이 힘들기에 더욱 더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앞 날을 약속할 수도 없고, 미래를 꿈꿀 수 없다.
그들의 사랑은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끝나는 드라마처럼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
드라마는 다음편을 기대할 수 있지만...
우리 인생에서 다음편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다음 만남은 없다.
김중혁 작가의 단편도 다음편은 없다.
그냥 끝난다.
이런 작가의 분위기가 가장 잘 나타난 작품이 [힘과 가속도의 법칙]이라는 소설이다.
주인공 현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보험사기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주로 외제차와 부딪쳐 합의금을 받아내는 생활을 한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헤어졌다.
그리고 뒤로 돌아갈 수 없고, 앞에도 아무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기에 그는 무작정 자동차에 달려든다.
이 소설도 이렇게 이야기가 끝난다.
현수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
작가도 이야기 해 주지 않고, 물론 다음편도 없다.
요즘 신문기사에서 점점 암담한 현실들이 기사화된다.
결혼이나 자녀, 꿈을 꿀 수 없는 포기의 시대를 이야기 한다.
앞에 희망이 없어서 앞으로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그 인생길에서 남녀는 만나 사랑을 한다.
희망이 없는 사랑이기에, 앞 날을 약속하지 못하는 사랑이기에 더 안타깝고, 더 가슴이 아프다.
작가는 그 아픈 사랑을 그냥 덤덤하게 일상처럼 이야기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