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고고학 - 미셸 푸코 문학 강의
미셸 푸코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가끔 인터넷 등을 통해 심해(深海)의 사진 등을 접할 때가 있다.

파란 바다 한 가운데에 유독 시퍼런 색깔은 원이 그려져 있는 사진이다.

나는 짙은 색은 파란 색깔은 보면서 알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깊은 바닷 속을 상상하고 내가 그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이다.


푸코의 책을 읽다보니 이런 느낌을 받았다.

젊은 날에 읽은 몇 권의 책을 통해 나는 푸코를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었다.

이성으로 역사와 세계를 보는 주류적인 시각에 반해 비이성과 광기를 주장하는 그의 사상을 어느 정도 요약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사상을 해변가에서 떨어진 조금 깊은 바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푸코의 사상이 내가 측정할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의 심해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심해를 들여다 보면서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낀다.

마치 이 책이 나를 그 심해 속으로 빨아 들이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주로 역사에 대해 비이성적인 시각으로 보는 푸코의 철학보다는 푸코의 문학에 대한 강의를 다루고 있다.

푸코는 주로 1960년대에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주로 그 시기에 문학에 대한 글을 쓰거나 강의를 했었다. (이 시기를 푸코의 철학에 있어서 '문학의 시기'라고 부르기도 함)

이 책은 그 동안 알려지지 않은 푸코의 문학에 대한 강의를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광기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문학에서 인간의 광기가 차지하는 부분을 다루고 있다.

2부는 '광기 안의 언어'라는 제목으로 문학에 대한 푸코의 정의와 시각을 다루고 있다.

3부는 '사드에 대한 강의'라는 제목으로 사드에 대한 문학을 다루고 있다.


책은 프랑스어를 번역했기에 문장이 길고 복잡하며, 문장 중간에 철학과 문학적인 단어들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또한 프랑스 문학, 특히 사드에 대한 문학이 많이 제시되기 때문에 사드에 문학을 접해 보지 않은 나로서는 더욱 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힌 것은 번역자의 배려이다.

이 책의 번역자 역시 독자가 이런 어려움을 겪을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 초반에 사드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그가 이야기 하는 몇 가지의 개념들을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물론 번역자의 글도 일반인이 읽기에는 조금 난해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 책은 푸코의 문학에 대한 여러 가지 강의를 편집했기에 한 가지 주제를 제시하거나, 일관적인 내용을 요약할 수는 없다.

그러나 푸코의 여러 가지 강의를 관통하고 있는 한 가지 개념은 '광기'이다.

이 광기는 이성이 붙여 준 모욕적인 언어일지도 모른다.

마친 일본인이 한국을 식민지한 후 한국인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듯이...

이성이 인간의 무의식의 부분을 점령한 후 이성의 영역 밖에 있는 모든 것을 '광기'라고 부르고, 그것을 억압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광기는 이성에서 배제되고, 금기시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광기는 우리 인간 안에 있고,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고 있으며, 문학에서 광기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푸코가 말하는 광기의 언어와 문학을 대표하는 사람은 '마르키드 사드'이다.


푸코는 사드의 문학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테두리를 벗어나 광기와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푸코는 이것을 '리베트랭적 담론'이라고 말하고, 이런 문학에 나오는 인간을 '리베트탱'이라고 부른다.

사드의 소설 속에 나오는 '쥘리에트'나 '쥐스틴'같은 인물들이다.

리베르탱적 담론은 네 가지 기본 원칙을 따른다.

신은 없고, 영혼도 없으며, 따라서 비도덕적이거나 범죄가 없으며, 자연(생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리베르탱적 담론의 반대는 근대까지 유지되었던 '종교적담론' 또는 '철학적인 담론'이다.

푸코는 이것을 '거세적 담론'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신에 의해 선택된 완전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거세적 담론'에 의하면 나의 욕망과 시간과 신체를 포기해야만 올바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리베르탱적 담론은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로워진다는 말보다 한계를 뛰어넘어 무한대의 공간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푸코는 리베르탱적 담론을 '탈거세적 담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드는 그의 소설을 통해 이런 탈거세적담론을 가진 인물들을 창조해 냈다.

그들은 마음 껏 욕망을 발산하고,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먹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규범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성행위를 한다.

여기까지가 푸코의 문학과 광기와 샤드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다음은....

인간의 이성에서 광기를 풀어서 무한의 영역으로 나간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치 영화 [그래비티]의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과의 끈이 끊겨 무한의 우주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그런 것일까?

그리고 그 우주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과연 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 일까?


푸코는 이성이 광기를 누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성으로부터의 자유로운 광기를 말한다.

물론 그것이 사드의 문학에만 국환되는 것인지, 푸코의 사상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푸코의 말처럼 우리가 이성의 끈을 끊어버리고 광기의 무한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런 끈없이 심연의 바다 속으로 들어 간 후 그 바다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설사 무엇을 본다고 해도 그 무엇을 보는 나조차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악마가 있어서 내 앞에 모든 허상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데카르트는 미지의 영역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 생각하는 인간, 코키도 에르고 숨(라틴어: Cogito, ergo sum , 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라는 끈을 잡았다.


나는 철학자도 아니고, 문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며, 그냥 책을 읽는 독자일 뿐이만 푸코나 니체, 사드의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가 광기의 영역을 탐험할 때는 끊어지지 않는 분명한 끈을 가지고 그 세계로 들어가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세계 속에서 영원히 헤매게 될 것이니까....

그 '끊어지지 않는 끈'이 무엇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