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1 - 도둑까치 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199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

아주 오래 전 상실의 시대를 읽은 후 부터 나는 그의 펜이 되었다.

사람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의 도시적인 감성.. 세계와 사람에 대한 진지한 성찰, 몽환적인 소설 분위기...

젊은 시절 내가 하루키를 좋아한 이유는...

그 책을 읽고 있으면 내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그 당시에 느끼던 외로움과 절망을 하루키가 글로 표현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엽감는 새는...

군대시절부터 읽기 시작한 책이다.

책은 시리즈별로 시간을 두고 출간되었는데...

제대 한 후 한 참 후에야 마지막 권을 사서 읽을 수가 있었다.

 

 

 

주인공 오카다 도루는 법률회사를 다니다가 실직한 서른 살의 남자이다.

그는 아내가 아끼던 고양이 오타야 노부루(아내의 오빠의 이름)가 사라지자 그 고양이를 찾으려 노력한다.

모든 노력이 실패하자 아내의 소개로 가노 마루타와 가노 구레타라는 자매를 찾아간다.

이들은 영매로써 초현실적인 힘으로 고양이을 찾으려 한다.

 

그 후 아내는 오데코롱이라는 새로운 향수를 뿌리고 출근하던 날 이후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한편으론 아내를 그리워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 아내와 자신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 사이에 그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의 내면은 점점 더 미로처럼 복잡해지고 주인공은 그들의 도움으로 꿈과 현실의 세계, 외면과 내면의 세계를 오가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오타야 노부루와 현실과 환상의 세계에서 대립하게 된다.

결국 그는 꿈에서 오타와 노부루를 죽이게 되고 그 사건으로 갈등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사실 이 소설은 하루키의 대표적인 상실의 시대와는 다른 패턴이다.

상실의 시대가 스토리 중심의 소설이라면...

이 소설은 스토리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소설의 스토리보다는 그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내면(무슨 단어를 써야 할지 고민했다. 심리? 영혼? 마음?)을 중요시 한다.

그리들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깨달은 그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내용이 마미야중위의 이야기이다.

주인공과 우연한 교제를 가지게 되는 마미야 도쿠타로는 일본의 제국시대때 만주국에 주둔했던 장교로 소련 연합군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일단의 무리와 함께 외몽고 지역에 잠입하게 된다.

그는 거기서 소련 장교와 몽고인에게 붙잡혀 동료가 산체로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후 물이 없는 암흑의 우물에 갇힌다.

그리고 그는 그 때의 체험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소. -중략- 태양이 마치 무슨 계시처럼 우물 안을 비추었던 것이오. -중략- 우물은 신선한 빛으로 넘쳤소. 그것은 빛의 홍수와 같았다오. 나는 숨이 막힐 듯한 밝음에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였다오.”(P286)

 

"나는 단지 그 빛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오. -중략-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꾸벅꾸벅 졸았소. 무엇인가의 기척을 느끼면 눈을 떴을때, 빛은 이미 거기 있었소. 나는 내가 다시 그 압도적인 빛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나느 무의식적으로 양손의 손바닥을 크게 벌려 거기에 태양을 받았다오 -중략- 나는 그 빛 속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소. 몸 안의 체액이 눈물이 되어 내 눈에서 떨어져 버리는 것 같았소. 내 몸이 액체가 되어 그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소. 아니 죽고 싶다고까지 생각했소. 그때의 느낌은 지금 무엇인가가 여기에서 멋지게 하나가 되었다는 감각이었소. 압도적이기까지 한 일체감이었다오. 그렇다 인생의 진짜 의의라는 것은 이 몇 십초 동안에 이어지는 빛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대로 죽어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소”(P288)

 

동료의 끔찍한 죽음을 본 후 마미야 중위는 암흑의 우물에서 태양이 우물 꼭대기에서 일직선으로 비치는 10초동안에 내면에서 커다란 심리적 흥분을 경험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으면 칼 융의 심적인플레이션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되었다.

융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에 심적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심적 에너지의 공급과 방출이 적절해야 건강한 심리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심리적 에너지가 폭팔적으로 인간 내면 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방출하면 위대한 예술가나 종교가, 철학자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은 이 에너지를 방출 못하지 못하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 채 정신병자나 자살로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마미야 중위가 주인공이나 마미야 중위가 느낀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현실에 너무나 쉽게 적응하는 사람들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간다.

거기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그리고 저녁에 다시 잠을 자고...

그리고 다음날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남보다 빨리 뛰고, 남보다 더 한 발자국 올라가는 것에 너무 진진해서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내가 왜 이런 삶을 살아야지?

이것이 전부인가?

무언가 다른 것을 생각하고...

다른 고민을 하고...

그리고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 속에서 구원을 찾은 이도 있으나...

대부분은 그렇게 괴로워하며 죽는다.

하루키는 이런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려고 하지 않았을까?

마치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처럼...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고도의 상징수법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모티브는 우물이다.

물이 말라버린 우물, 그 우물 안에 한 인간(주인공과 마미야 주위)이 갇힌다.

그리고 완전한 암흑에 빠진다.

그 안에선 모든 게 정지해 있다.

시간도, 생각도, 주변 사람들도.....

여기서 물이란 인간에게 공급되는 심적 에너지와 같은 것일 것이다.

사랑, 우정, 신뢰, 인정...........

이런 것이 사라진 절대 절명의 고독에서 인간은 자신 안의 심적 에너지의 갈급함을 때 닫는다.

우물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열쇠인 것이다.

 

그 밖에도 고양이, 전화, 향수의 상징물이 등장하면서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을 보는 듯한 묘사가 현실과 꿈으로 계속 된다.

작가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 될 수 없는 초현실의 세계를 소설로 표현하고 있다.

물론 소설은 모호하게 시작해서 끝까지 모호하게 끝난다.

결국 하루키가 이 소설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는 본인밖에는 모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