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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평점 :
초등학교 때 살았던 시골집이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는 우리 가정은 힘든 시기였다. 아버지는 하시던 사업이 힘들어지셔서 집을 비울 때가 많았고, 어머니 역시 계속 일을 다니셔서 집에 없으실 때가 많았다. 집에 혼자 남겨져 있을 때면 주로 집의 뒷마당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햇볕이 들지 않았던 그곳은 어둡고 습했지만 또한 아늑했다. 그곳에는 주로 장독대나 못쓰는 가구들이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인가 그곳에 있던 가구 중 하나의 바닥을 들춰 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 끔찍한 것들을 마주했다. 지렁이. 지네. 바퀴벌레. 당시에는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온갖 벌레들이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인지 그 후에는 그곳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가끔 그때의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어쩌면 그때 내 마음이 마치 그 집의 뒷마당 같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본다. 온갖 징그러운 벌레들이 꿈틀 거리만큼. 그때는 내 마음이 그렇게 어둡고 습했다.
아일린이라는 여성을 만나면서 그녀 안에서도 이런 어마음을 보았다. 소설 속의 아일린은 X 빌이라는 마을에서 사는 젊은 여성이다. X빌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나도 모른다. 소설의 배경상 그녀가 동경하는 보스턴과 가까운 미국 뉴잉글랜드의 어느 작은 동네 정도로 생각된다. 그곳은 춥고 습했으며 눈이 많이 내렸다. 1963년 24살의 아일린은 X빌에서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산다. 그녀와 아버지가 살고 있는 집은 어머니가 죽은 후 거의 청소를 하지 않았기에 항상 먼지와 쓰레기가 쌓여 있고, 주방엔 음식들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그녀가 일하는 무어헤드라는 소년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려서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잡혀 온 곳에서는 온갖 학대와 폭력이 난무한다. 그럼에도 아일린은 그런 것이 자신과 상관없다는 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런 외적인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일린 안에는 자기혐오와 긴장감과 분노, 조급함과 같은 온갖 어두운 것들이 가득차 있었다. 그럼에도 아일린은 철저히 자신의 어두운 마음을 감추며 살아간다.
"나는 마음이 불안할 때 외모를 다듬으면 조금이나마 편해졌다. 실은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강박적으로 신경을 썼다. 내 눈은 초록색에 조그마한데, 당신이 날 보았다면 그다지 친절해 보이는 눈이라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특히 더 그랬을 테고.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그렇게 전략적이지 못하다. 머리에 핀을 꽂고 칙칙한 쥐색 코트를 입은 모습을 그때 보았다면, 당신은 나를 이 무용담에서 단역에 불과한 인물로 예상했을 것이다. 성실하고 침착하고 따분하고 무관한. 멀리서 보면 나는 수줍고 온화한 사람처럼 보였고, 때로는 스스로 그런 사람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는 욕을 했고 얼굴을 붉혔고 꽤 자주 진땀을 흘렸으며, 그날만 해도 신발이 부서질 뻔했다. 나는 정말이지 지루하고 생기 없고 무엇에든 면역된 가식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은 항상 격분했고 부글부글 끓었으며 내달리는 생각과 살인자 같은 정신으로 살았다. 심드렁하게 서성이며 칙칙한 표정 뒤로 숨는 일은 쉬었다." (P 18)
그녀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나름 그녀만의 탈출구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성적인 몽상이 있다. 그녀의 성적인 몽상의 대상은 주로 무허헤드의 소년들이나 직원들이지만, 주된 대상은 랜디이다. 소년원의 교도관인 랜디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멋진 남성이다. 그녀는 시간 날 때마다 랜디의 집 앞에 서성이며 랜디를 관찰한다. 그러다가 가끔 슈퍼마켓이나 옷 가게에서 사소한 물건들을 훔친다. 그녀의 또 하나의 탈출구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가 몰던 낡은 닷지 자동차이다. 이미 고장 날 때로 고장나서 자동차 안으로 매연이 들어오지만, 그녀는 한 겨울에도 문을 열고 그 차로 달린다. 랜디와의 성적인 몽상이 상상 속에서의 도피 공간이었다면, 현실에서 그녀의 유일한 도피 공간은 아버지의 낡은 닷지 자동차이다.
그런데 어느 날 랜디나 닷지 자동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탈출구가 갑자기 그녀 앞에 등장한다. 교도소에 교사로 새로 부임한 리베카라는 여성이다. 타고난 아름다움과 교양, 그리고 세련된 패션 감각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리베카는 부임한 날부터 아일린에게 호감을 보여준다. 그동안 무어헤드에서 아일린에게 호감을 보여 준 여성은 아무도 없었다. 리베카의 관심에 아일린은 마치 새로운 세상을 사는 것 같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날 자신의 집으로 그녀를 초대한다. 그때부터 사건은 겉잡을 수없이 흘러간다. 그것이 바로 소설 초반에서 말하는 그녀가 X빌을 영원히 떠나게 되는 이유이다.
소설은 마치 컬트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소설의 중간까지는 온통 흑백뿐인 영화가 이어진다. 눈 내리는 습하고 쇠락한 시골 마을인 X빌.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먼지 쌓인 어둡고 더러운 집. 소년들을 학대하는 소년 교도소인 무허헤드. 그리고 닷지 자동차를 타고 이 배경 사이를 이동하는 아일린. 온통 단조로운 흑백의 화면들이 느리고 지루하게 이어져 간다. 그러다가 소설 중반에 리베카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만이 다채로운 칼라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아일린을 비롯해 온통 모든 사람들이 리베카에게 집중한다. 리베카는 알듯 모를 듯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말들을 남기며 접근한다. 그리고 리베카는 아일린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화려하고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리베카의 집은 의외로 어둡고 더럽다. 그곳에서 이제 흑백영화는 온통 빨간색의 피로 뒤 덥히는 공포 영화로 변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가 왜 이런 구성을 택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소설은 거의 말미에 이를 때까지, 즉 리베카가 나타나고 아일린이 리베타의 집에 초대되기까지 특별한 사건이 없이 진행되다가, 폭발이 일어나듯이 갑자가 사건이 분출이 된다. 그러기에 이 부분까지 읽을 때 조금의 지루함을 느낄 수가 있다. 초반부터 조금 더 속도감 있는 소설을 섰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고 나서 깨달은 것은 작가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쓰기 위해서 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의 말미에 일어나는 리베카를 통한 반전은 이 소설을 읽어준 독자에 대한 서비스 정도이다. 작가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어 한 것은 아일린이 어떤 사건으로 X빌이란 마을을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이 읽혀지기 위해 작가가 어쩔 수 없이 독자와 타협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오테사 모시페그라는 작가가 진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일린 안에 있던 그 어둡고 습한 마음이다.
작가는 계속해서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누구 한 명에게도 사랑받지 못한채 철저히 지저분하거 어두운 공간에 버려진 한 여성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녀의 자기혐오와 성적인 몽상,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분노 등을 들여다 보는 것은 마치 시골집 뒷편의 버려진 가구의 바닥을 들춰보는 것 같은 끔찍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집요하게 아일린이라는 여성의 어둡고 습한 마음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그것을 들춰보라고 요구한다. 소설의 스토리는 계속해서 그것을 들춰보는 독자들을 위한 미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아일린의 어두운 마음을 들춰보라고 말하는 것일까.
소설은 이제는 74세의 할머니가 된 아일린의 시점에서 24살의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을 회상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나이가 든 아일린은 이제 자신은 그 전의 아일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때의 자기혐오와 조급함, 분노에 사딜리던 아일린이 아니라, 이제는 한결 여유로워졌고 평안해졌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진행해 가는 74살의 아일린은 24살의 아일린을 혐오하거가 끔직해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나를 비롯한 독자들처럼 그 어둡고 습한 마음을 들춰보기를 주저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따스하고 친근한 마음으로 그때의 아일린의 마음을 들춰본다. 그때의 자기혐오, 조급함, 분노,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는다. 심지어 그녀의 말투에서는 이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성탄절날 영원히 떠나 온 X빌 마을, 정리도 하지 못하고 떠난 무어해드의 자신의 책상. 심지어 성탄절날 아침 술 취한 채로 그 더럽고 먼지나는 집에 두고 온 아버지까지. 나이 든 아일린은 젊었을 때의 아일린처럼 덤덤히 말하지만, 그 안에는 24살의 아일린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겉으로 그리워하지조차 못한다. 그랬다면 그녀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시의 자신을 회상하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둠을 들춰본다. 후회나 원망, 미움과 분노가 아닌 그리움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것을 권하고 있지 않을까.
"본 리뷰는 출판사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