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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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소설을 읽으면 글에서 작가의 생(生)이 녹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암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토지]라는 대작을 섰다는 박경리 작가나 사형 직전까지 같던 죽음의 공포와 가난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던 도스토옙스키, 온갖 전쟁터와 오지를 다니며 자신의 경험을 녹여 글을 쓴 헤밍웨이같이 위대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면 그들의 생의 일부분을 녹여서 부어 만든 작품을 보는 듯한 경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김탁환 작가의 소설에서는 이런 소설에 대한 열정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의 단편소설 중에서 '치숙'으로 불리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 있다. 치숙은 평생 크게 이름을 알리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생을 부어서 치열한 글을 쓰고 생을 마치는 인물이었다. 오래전에 읽었어도 치열하게 자신의 생과 싸우며 글을 쓰는 치숙의 이미지가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런 치숙과 비견되는 인물을 다시 만났다. [대소설의 시대]라는 소설 속의 '장두'라는 여인이다.

 

[대소설의 시대]는 김탁환 작가가 계속해서 쓰고 있는 18세기를 배경으로 한 백탑파 소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이다. 백탑파란 조선 시대 실학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실제로 이 시리즈에서는 실존했던 실학자들이 등장하며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특히 화광이라는 호로 불리는 꽃을 그리는 화풍으로는 당대 최고라고 불리는 '김진'이라는 인물과 표창 던지는 솜씨가 당대 최고인 의금부 도사인 이명방이라는 두 명의 중심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다.

 

[대소설 시대]에서 김진과 이명방은 사라진 소설가인 '임두'를 찾아 나선다. 소설의 배경은 18세기 정조시대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대소설이 유행했다. 대소설이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장편소설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보통 200-300권의 분량의 소설들이 유행을 했다. 백성들로부터 궁궐의 여인들까지 소설을 읽고, 또 스스로 소설을 쓰던 시대였다. 그중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은 [산해인연록]이란 소설이었고, 이 소설을 쓰는 작가는 임두라는 인물로 설암당이라는 대저택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23년간 소설을 이어가고 있다. 이명방은 김진의 부탁으로 임두를 만나러 간다. 그런데 임두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며 노인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몇 가지 더 알게 된다.

 

그녀가 쓰고 있는 [산해인연록]은 사실 자신의 남편 사도세자를 잃고 비탄에 빠진 혜경궁 홍씨가 그 비탄의 세월을 견디기 위해 그녀에게 짓도록 한 것이며, 지금은 정조의 빈이자 세자의 어머니인 의빈이 [산해인연록]의 열렬한 독자이나 후원자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200권을 앞두고 이제 소설을 마무리해야 할 단계에서 그녀가 매병으로 불리는 치매에 걸렸다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도 200권을 이어지는 동안 펼쳐 놓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기억하며 소설을 마무리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녀가 그녀는 오락가락하는 정신으로 자신과 싸우며 소설을 마무리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다.

 

"매병(?病, 치매). 정녕 이야기의 신이 몹쓸 병에 걸렸단 말인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힘들 것이다. 수십만 개의 단어로 수천 개의 사건을 만들며 유유히 23년을 흘러온 소설가가 '휴탑'에 적은 구상도 잊고 또 그 '휴탑'을 둔 곳까지 잊은 것이다. 기억의 제왕에서 망각의 노비로 전락한 꼴이었다. [산해인연록]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바람이 없다면, 진작 불행한 최후를 택했을지도 몰랐다." (P 142)

 

그런데 그런 임두가 어느 날 사라진다. [산해인연록]과 함께 모진 세월을 견뎌 온 혜경궁 홍씨와 의빈은 김진과 이명방에게 어떻게든 그녀를 찾으라는 엄명을 내린다. 처음에는 단지 소설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그녀의 과거와 [산해인연록]에 얽혀있던 비밀이 풀린다.

 

이 과정에서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은 임두로 불리는 한 여인의 소설에 대한 열정이다. 일찍이 결혼을 했지만, 25에 남편을 잃고, 겨우 키운 유복자마저 며느리와 함께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다. 그녀는 오로지 소설을 쓰며 그녀의 일생을 보낸다. 그리고 노년에는 오직 [산해인연록]을 쓰며 자신의 일생의 모든 것을 소설에 바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을 하는 부분은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면서 당대의 인기를 끌었던 수많은 대소설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김진과 이명방의 대화 속에서 매 장마다 당대에 인기를 얻었던 대소설들이 등장하고, 그 대소설들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그 당시 보통 2-300권의 분량을 가지는 이렇게 많은 대소설들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대소설들을 읽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정말 작가가 이 시대의 또 다른 임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장편소설이 유행이었다. 특히 역사소설이 유행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서재에서 월탄 박종화나 나림 이병주 등의 역사소설을 읽으며 자랐다. 조금 커서는 김주영의 [객주]나 박경리의 [토지] 등을 읽었다. 대학시절에는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을 읽었었다. 그런데 [태백산맥] 정도가 끝이었던 것 같다. 점점 장편소설이 인기를 잃어가더니 이제는 3권 이상의 장편 소설의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모두들 짧고 단편적인 소설들만 즐겨 읽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한 편의 소설에 인생을 불어 넣는 작가들도 사라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시대이건 치열하게 소설을 써 온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의 소설이 위대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인생이 녹아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역사 추리 소설의 형식을 가졌지만, 조선 시대의 문화와 소설에 대해서 매우 친밀하게 접할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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