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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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사로 인해 도시의 학교로 전학을 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학교별 학력에 대한 경쟁이 매우 심했다. 두 달에 한 번씩 모의고사를 보고 모의고사별로 학교별 성적을 발표했다. 당연히 학교별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것은 다시 반별 경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시험기간만 되면 담임선생님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공교롭게도 내가 전학이 온 날이 모의고사 성적이 발표되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성적이 많이 떨어져 반 평균을 갉아먹었다는 학생들의 명단을 불렀다. 몇 명이 불려 나왔다. 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게 했다. 그리고 알몸으로 엎드리게 하고 매를 때렸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수치와 함께 공포를 느꼈다. 나도 저렇게 친구들 앞에서 발가벗겨져서 매를 맞게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으로 인해 중학교 내내 수치와 공포감으로 공부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학교에서나 군대에서나 사회에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면 그때의 수치와 공포가 다시금 되살아난다.

한동안 잊혔다고 생각하던 이 기억이 J.M 쿳시의 [야만을 기다리며]라는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쿳시라는 위대한 소설가를 나는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소년 시절]로 처음 만났다. 이 책에는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아프리카너로 태어난 쿳시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담겨 있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 그리고 그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쿳시를 지배했던 감정이 바로 '수치감'이었다. 그는 학교의 폭력 앞에서도 매를 맞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폭력 앞에 벌벌 떠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 수치스러워 말을 잘 듣는 학생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폭력적인 세상과 부당한 권력에 대한 수치감은 그의 어린 시절 내내 이어진다.

[야만을 기다리며]에서 소설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치안판사'의 의식의 변화를 보면 마치 쿳시의 어린 시절을 옮겨 놓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제국의 변경이다. 그곳은 아프리카가 될 수도 있고, 동남아시아나 남아메리카와 같은 나라가 될 수도 있다. 제국의 주체가 백인이고 제국의 지배를 받는 야만인이 흑인이라는 설정은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남아프리카를 연상시킬 수 있는 몇 가지 배경들이 떠올린다. 소설의 주인공 치안판사는 이곳 제국의 변경의 성에서 30년 가까이 지배자의 역할을 해 왔다. 지배자라고 해서 특별히 야만인들을 억압하거나 학대하지는 않고 그저 질서를 유지할 정도로 통치를 할 뿐이다. 그의 낡은 직무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면 몸을 파는 그 지역의 여성들이나 야만인 여성에게 성적 향락을 제공받고, 가끔 고대의 유물을 발굴하며 일몰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누리는 통치권력의 전부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일생이 조용히 마감되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일에 얽혀들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한가로운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감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나는 교구세와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기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여기에 있는 유일한 관리인 하급 관리들을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 업무를 주재한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 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을 바란 적이 없다." (P 18)

주인공의 이런 안락한 삶은 '졸 대령'이라고 부르는 비상 지휘권을 가진 인물이 오면서 깨어진다. 졸은 제국 변경에서 야만인들이 서로 연합해서 대규모 반란을 획책한다는 첩보로 인해 제국이 파견한 군인이다. 그는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며 야만인의 대규모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다. 이 망상은 주인공이 보기에는 망상이지만, 모든 제국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이다. 그는 이런 생각에 담겨 있는 제국의 사람들의 교묘한 심리를 어렴풋이 느낀다.

"나는 경험을 통해, 한 세대에 한 번씩 꼭 야만인들에게 대한 히스테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변경에 사는 여자치고 침대 밑에서 야만인의 시커먼 손이 뿔 쑥 나와 발목을 잡는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남자치고 야만인들이 집에 쳐들어와 술에 취해 흥청거리며 법석을 떨고, 접시를 깨뜨리며 커튼에 불을 지르고 자기 딸을 강간하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은 사람이 없다. 이러한 꿈들은 너무 편해서 생겨난다. 내게 야만인들의 군대를 보여준다면야, 나도 믿을 것이다" (P 19)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졸 대령이 하는 행동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졸 대형은 여행을 하다가 약탈범으로 오해되어 온 할아버지와 아이를 고문하고, 할아버지를 죽게 한다. 또 야만인을 원정한다며 군대를 끌고가서 아무것도 모르는 야만인들을 끌고온다. 그리고 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다. 치안판사는 이 모든 일이 불편하지만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야만인들의 비명을 애써 외면한다.

"나는 민간인 치안판사가 보통 쓰게 되어 있는, 창문에 제라늄이 피어 있는 멋진 주택을 마다하고 수년 동안 이곳에서 찾아온 적 없는 군사 지휘관을 위해 마련해둔 창고와 부엌 바로 위에 위치한 어수선한 거처에 살고 있다. 여기서 살면서 불편한 점을 이제 깨닫기 시작한다. 아래 뜰에서 들려오는 소리로부터 귀를 막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뜰은 이제 영구적으로 감옥이 된 듯 보인다. 내가 늙어버린 것 같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만 싶다. 나는 요즘 틈만 있으면 잠을 잔다. 그리고 일어날 때는 마지못해 일어난다. 잠은 더 이상 고단함을 풀어주는 목욕이거나 원기회복이 아니라 망각이며, 밤마다 소멸 상태와 맞닥뜨리는 일이다." (P 38)

다행히 졸 대령은 곧 본국의 소환을 받아 떠나고 치안판사는 다시 평안한 일상을 회복한다. 그러나 우연히 길거리에서 졸 대령에게 끌려와 아버지를 고문당해 잃고 고아가 된 여성을 발견한다.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눈이 멀고, 다리를 절며, 구걸을 한다. 그는 졸 대령이 그녀에게 표시를 남겼다고 생각한다. 그 표시가 계속해서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결국 그는 먼 거리를 여행에 그녀를 고향에 데려다 준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다시 돌아온 졸 대령에게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쓴다.

이제 주인공에게 평온한 나날은 없다. 그는 야만인처럼 감옥에 갇히고 고문을 당한다. 졸 대령의 야만인이 일으킬 전쟁에 대한 광기는 더 강해져서 더 많은 야만인들을 잡아 오고, 더 많은 야만인들을 고문하고, 그들을 살해한다. 치안판사를 이 일을 말리다가 결국 야만인과 같은 수치와 고문을 당한다. 그는 발거벗겨지고, 사람들이 침을 뱉고, 그를 때리고 놀린다. 그리고 지배자에서 거렁뱅이 노인이 된다.

소설의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의 흐름은 제국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야만인을 대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치안판사의 목소리를 통해 제국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유지되며, 어떤 비열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예리하게 들춰낸다. 제국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야만인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야만인이 있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야만인에 대한 공포가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공포에 맞설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제국의 존재의 이유이다. 그러기에 제국은 끊임없이 야만인에 대한 공포를 만들어 내고, 그 공포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에게 전염된다. 그 공포를 만들어내고 조작하는 사람이 바로 졸 대령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면 치안판사는 졸 대령의 맞은편에서 선 정의로운 사람일까? 저자는 친안 판사 역시 졸 대령과 같은 선상에 서 있다고 말한다. 그 역시 같은 제국이 만들어낸 공포와 광기 전염된 사람이다. 단지 그는 그 광기의 한복판에 들어가지 않고 변두리에 머물기를 원한다. 그곳이 바로 제국의 변경이다. 그는 그 변경에서 적당히 제국에 복종하고, 적당히 야만인들을 통치하며, 적당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즐기기를 원한다.

그런데 상황이 그를 그냥 두지 않는다. 계속 사람을 발거벗기고 수치를 주는 제국의 공포를 견딜 수가 없다. 그는 그 수치와 공포를 외면하려 하지만, 그 수치와 공포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자신의 집무실에서도, 자신의 침실에서도, 심지어는 도시와 떨어진 폐허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 수치와 공포에 맞서게 된다.

 

이런 경우 다른 소설에서는 불의를 보지 못하는 주인공의 정의감을 내세우겠지만, 쿳시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도 할 수만 있다면 제국의 수치와 공포에 눈을 막고 귀를 막아서 그냥 따라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그의 양심이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했다. 그건 그가 정의로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남들보다 양심적이어서 그런 것이다. 두 감정의 차이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후자를 예민함이라고 바꾸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민함이라는 감정이 바로 쿳시의 소설을 지배하는 감정이다. 남들은 그냥 수치심과 공포심에 외면하는 것들을 예민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예민함의 감정은 쿳시의 자전적 소설에서도 계속 등장하는 감정이었이다. 아마 쿳시도 자신의 예민함을 싫어했을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예민한 사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괴롭다. 그리고 그 예민함은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뀐다. 왜 저러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려면 안되는 거 아니야? 사람이 사람에게 저렇게 하면 안 되는 아니야? 이런 감정들이 분노처럼 일어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중학교 때의 경험으로 돌아갔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정확히 수치와 공포의 감정이 아니었다. 분노의 감정이었다. 왜 사람을 발가벗길까?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왜 아무도 말하지 못할까? 나는 왜 소리치지 못했을까? 이런 감정은 살면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군대에서 상관이 부당하게 부하들을 대할 때,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조직이 운영될 때, 세상이 비열한 방식으로 소수자들을 발가벗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나도 저들처럼 발가벗겨질 수 있다는 수치감이나 공포감 보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분노감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치안판사가 자신이 발가벗겨지고 놀림을 당할 때 그제서야 분노한다. 자신과 함께 벌거벗겨지고 놀림을 당하는 야만인들을 보고 그들을 학대하는 제국의 사람들에게 소리를 친다. "이 사람들을 보라!" "사람들이다!" 사람이 사람을 발가 벗길 수 없음을 소리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소설을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읽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제국주의보다 한 인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제국주의라는 자신의 삶의 테두리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인간의 내면이 치안판사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치안판사가 쿳시이며, 많은 백인이며, 우리의 모습이다. 또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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