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강원도나 오지를 여행하다 보면 동굴 탐사를 하게 된다. 몇 백만 년 전 용암이 흘러서 만들어낸 길고 깊은 터널을 따라, 혹은 영겁의 세월 동안 계속된 침식작용을 통해 만들어 긴 통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온갖 신비로운 형상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동굴 속에서 광장만 한 넓은 장소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기어서 겨우 몸 하나만 빠져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만나기도 한다. 방문객을 위해 만든 작은 등불들이 없었다면 칠흑 같은 암흑이었을 그곳을 작은 불빛들을 따라 걷다 보면 두려움과 비슷한 경이감들을 느낀다. 그리고 동굴 출구의 빛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창백한 불꽃]을 읽은 경험도 이런 동굴 탐사와 비슷했다. 이 책의 화자인 킨보트 교수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킨보트인지, 카를 왕인지, 아니면 나보코프 자신인지 모를 존재의 내면 깊숙한 동굴을 탐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때로는 화려하고 현란한 문장에 매혹되기도 하고, 때로는 도저히 무슨 뜻인지 모를 난해한 문장과 해석 속에 갇혀 길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럭저럭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치 누군가의 내면 깊숙한 곳을 힘겹게 빠져나온 듯한 안도감마저 들었다.

내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처음 접한 것은 그의 대표작인 [롤리타]를 통해서이다. 대부분 사람이 롤리타를 처음 읽는다면 내가 느꼈던 그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롤리타는 '험버트 험버트'라는 이상한 이름의 중년 남자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그는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죽기 직전에 어린 여성에 대한 자신의 성적 집착에 관한 기록을 남긴다. 소설은 마치 험버트 험버트라는 남자의 실제 기록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그의 어린 여성에 대한 집착을 읽으면서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특히 어린 여성에 대한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어둡고 더러운 도시의 뒷골목에서 여자아이를 돈으로 사는 부분에서는 혐오감까지도 느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보코프가 일부러 이런 혐오감을 유도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험버트 험버트의 스스로를 혐오감 있게 묘사한다.) 그러다가 곧 어린 여성에 대한 마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주인공에 대한 애처로운 고백을 읽으며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험버트 험버트의 시선으로 '롤리타'로 불리는 12살짜리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느낀다. 여기까지 끌고 가는 나보코프의 솜씨가 너무 현란해서 읽는 사람은 무기력하게 나보코프의 가리키는 방향을 볼 수밖에 없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 자신이 나보코프의 놀음에 놀아나 것 같아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이런 소설적 독해의 경험은 [창백한 불꽃]을 읽기 전까지 [롤리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창백한 불꽃]을 읽으면서 [롤리타]는 양호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롤리타]라는 배를 탔을 때 지독한 파도를 만나 배멀미를 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창백한 불꽃]을 만나 폭풍우 속을 헤매고 다니다 보니 그때의 경험은 잔잔한 파도였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창백한 불꽃] 시집과 주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 시의 부분은 고인이 된 셰이드 교수의 시이고, 후반부는 그 시를 해석하는 킨보트 교수의 주석이다. 머리말 부분에서는 킨보트 교수의 이 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는 이 책이 진짜 시집과 해설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책의 머리말에서는 킨보트 교수의 셰이드 교수에 대한 존경심과 그 시의 위대함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금세 자신의 주석이 이 책의 핵심임을 이야기한다.

"관례에 따라 주석은 시 다음에 오지만, 주석을 먼저 훑어보고 그 도움을 받아 시를 읽어보길 독자에게 권하는 바이다 - 중략 - 단언컨대, 내 주석 없이 셰이드의 시만으로는 인간적인 사실성을 갖지 못한다." (P 35)

이쯤 되면 이 책이 정말 시집과 해설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롤리타의 초반의 험버트 험버트의 독백을 기억나면서 벌써부터 내가 멀미 나는 배에 올라탔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네 편으로 된 셰이드의 [창백한 불꽃]이라는 시가 소개된다. 시는 마치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새의 시각에서 셰이드가 살았던 집과 그의 인생을 내려다보는 시각에서 시작된다.

"나는 죽은 여새의 그림자였다

창유리에 비친 거짓 창공에 속은

나는 잿빛 솜털의 얼굴이었다 -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서 날아다녔다, 창유리에 비친 하늘에서.

집안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돌로 만들곤 했다.

나 자신을, 나의 램프를, 접시에 놓인 사과를

밤의 장막을 열어 어두운 유리에 비친

모든 가구가 잔디밭에 위에 떠 있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나 기뻤던가, 눈이 내려

어렴풋이 보이던 잔디밭을 덮더니 쌓이고 쌓여

의자와 침대가 정확히

눈 위의, 저 밖의 크리스털 나라에 세워졌을 때!" (P39)

시는 50 페이지가 넘는 꽤 긴 내용이다. 길고 암시적인 단어들로 나열되어 있기에 의미가 잘 이해가 되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쉽게 읽혔다. 문제는 시 뒤에 이어지는 훨씬 많은 분량의 주석 부분이다. 흔히 시의 주석은 시를 잘 이해하게 위해서 시의 의미를 해석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킨보트가 해석하는 셰이드의 시는 시의 의미보다는 주로 킨보트의 주관적인 이야기뿐이다. 마치 '험버트'가 '로'라는 어린아이에게 집착하듯 킨보트가 당대의 위대한 시인은 셰이드를 존경심이나 열등감과 같은 감정으로 흠모하는 시각이 나와있다. 롤리타에서 변형된 다른 집착인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젬블라'라는 나라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부터 한참을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당황하게 되었다. 킨보트는 시 속의 단어들 속에서 젬블라의 역사, 문화, 자연 풍경 유추하며 이야기하다가, 젬블라의 혁명과 쫓겨난 카를 왕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말이 좋아 유추이지, 그냥 킨보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와 끼워 맞추는 억지식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읽으면서 젬블라의 이미지에서 러시아의 이미지를 카를 왕에게서 로마로프 왕조의 마지막 왕 니콜나이 2세 정도는 떠올릴 수 있지만, 과연 '젬블라'라는 나라 이야기를 왜 이토록 장황하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석의 중간중간에서는 킨보트 자신이 젬블라 태생임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반부터 시의 주석은 내용은 점점 젬블라에서 쫓겨 도망 다니는 카를 왕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무언가 조금씩 이상해진다. 카를 왕의 이야기에서 카를 왕의 은밀한 어린 시절 이야기, 독특한 동성애적 성적 취향, 젬블라 왕궁에서 혁명군에게 감금되어 있던 상황, 왕궁 지하 통로를 통해 혼자 탈출하여 산을 넘어 도망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를 왕 본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그냥 킨보트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편하지만, 심지어는 카를 왕이 자신의 아내였던 '디사'라는 여인에 대한 꿈과 그 꿈에 대한 감정까지 이야기할 때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디사에게 품었던 감정은 어느 정도였을까? 친근한 무관심과 차가운 존중, 신혼 초에도 어떤 감미로움이나 흥분을 느낀 적이 없었다. 연민이라든지 마음의 고통 또한 느낄 리 없었다. 그는 그저 무심하고 매정했으며,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내심 사이가 틀어지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대단한 보상을 해주곤 했다. 그는 표면적인 삶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보증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통렬하게 그녀의 꿈을 꾸었다. 주로 그녀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을 대 꾸었는데, 그녀와 아무 관계없는 근심이 잠재의식의 세계에서 거녀의 이미지를 띠고 나타났다. 전쟁이나 개혁이 동화 속에서 불사조가 되어 등장하듯이,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이 꿈은 그녀에 대한 칙칙한 산문 같은 그의 감정을 강렬하고 특이한 시로 탈바꿈시켰고, 꿈을 깬 후 잦아든 그 시의 파동은 하루 종일 눈이 부시도록 번쩍이며 그를 괴롭혀서 에는 듯한 그 격통과 찬란함을 - 다음엔 격통만을, 그다음엔 그 번뜩이는 반사상만을 - 다시 떠올리게 했지만, 살아 있는 셀제 디사를 대하는 그의 모든 태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P 257-8)

이쯤 되면 내가 셰이드의 시를 읽고 있는 것이지, 시와 상관없는 킨보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잃어버린 왕국과 시간에 대한 애절함을 가지고 있는 카를왕의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러시아를 떠나와 유럽과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산 나보코의 버림받는 어둡고 차가운 내면을 헤매고 있는 것이지 헛갈리는 상황이 된다.

그러다가 다시 후반부네 이르러서는 카를 왕의 이야기와 함께 젬블라에서 온 그라두스라는 암살자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느 정도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라두스의 등장과 그의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또다시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든다.

주석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셰이드의 죽음과 셰이드의 시, 그리고 그 시에 대한 킨보트의 해석의 동기들로 마쳐진다. 그러나 힘겹게 동굴의 출구에 가까워져 출구에서 비치는 빛을 보았다고 안도하는 순간, 다시금 나보코프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그라두스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젬블라'라는 왕국은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인지, 카를 왕이 킨보트 자신인지, 아니면 킨보트의 환상이 만들어 낸 인물인지,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나보코프는 소설을 다 읽은 후까지 쉽게 나를 쉽게 동굴 출구로 내 보내려 하지 않는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소설에 대한 심리적인 해석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롤리타]를 읽고, [창백한 불꽃]을 읽고 난 후 왜 험버트 험버트나 킨보트에서 나보코프가 보이는 것일까. 화려한 러시아의 귀족 가문으로 태어나, 평생을 유럽과 미국에서 유랑하고,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음에도 영원한 이방인의 감정을 떨쳐 버리지 못했던 작가의 어둡고 외로운 내면이 소설에서 계속해서 묻어 나오는 것처럼 느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이끌로 가는 롤리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험버트 험버트나 스스로 몰락한 젬블라 왕국의 왕이라고 믿고 있는 킨보트 교수나, 어쩌면 이들은 나보코프 자신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나보코프의 문학적 자존심의 대단했다고 한다. 자신을 고리키 이후에 이어지는 러시아 문학의 정통 계승자로 여길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어를 버리고 영어로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비애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런 감정들이 킨보트 교수의 주석에서 번번이 비치고 있다. 킨보트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는 끝까지 자신을 카를 왕국의 왕으로 믿고 살아간다. 진짜 그가 왕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과대망상증에 빠진 환자일 수도 있다. 그러면 나보코프는 누구였을까. 아무래도 언제 가는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멀미가 가라앉은 한참 후가 될 테지만. 비록 아직도 혼란스럽지만 나보코프가 만든 차갑고 어두운 동굴을 탐사하는 시간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경험이었음은 분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