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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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억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내가 처음 보고 느낀 것은 언덕 위에 있는 우리 집이었다. 마을 끝에 있어서 산과 마을 사이의 경계가 되는 마지막 집이었다. 집을 오르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돌계단을 올라야 했고, 그렇게 집 마당에 올라서면 마을의 집들이 대부분 보였다. 집 뒤에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었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연례행사저철 도시락을 준비해 나와 형제들을 데리고 소풍을 갔다.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때 찍은 빛바랜 사진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때 찍은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지만, 그때의 이미지들은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삶의 어느 순간에 불쑥 불쑥 튀어나온다. 어떤 때는 그때의 따스한 기억들이 불쑥 튀어나와서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어떤 때는 그때의 아픈 감정, 수치스러운 감정,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감정들이 튀어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런 기억들과 감정들이 뒤엉켜있다. 그것은 내 몸에서 수술이나 약물로 분리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내 안에 뒤엉켜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이 바로 ‘나’이고, 그 감정들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간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들을 읽으면 한 여성 안에 존재하는 이런 기억과 감정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사진과 같은 여러 장의 이미지들을 만나게 된다. 전쟁 전후의 빈곤한 캐나다 시골 마을, 친근할 것 같지만 날카로운 마을 사람들의 시선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보수적 종교의 무거운 공기, 부유한 윗마을과 가난한 시골마을, 나무 건물의 낡은 학교, 그리고 그 학교의 폭력적인 선생님과 거친 학생들, 이런 이미지들이 엘리스 먼로의 뛰어난 묘사와 함께 마지 사진처럼 보여진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에 나와 있는 가정과 집에 대한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낡은 농장과 기찻길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때로는 폭력적이지만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그리고 파키슨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어머니, 이런 것들이 엘리스 먼로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가정의 이미지이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녀 속에 있던 삶의 경험들이 주는 이미지들이 그녀의 소설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이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받지 못한 한 소녀의 슬픈 이미지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면 마치 눈보라치는 캐나다의 벌판 속에 혼자 발거벗겨져 버려진 것 같은 외롭고 쓸쓸한 소녀의 모습이 보인다.

 

[거지 소녀]란 소설에서는 이런 이미지가 한층 더 강하다. 소설을 통해 로즈라는 여성의 성장과정을 따라가면서 순간 순간 페이지를 멈추어야 했다. 어느 순간에는 너무나 아파서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그녀가 경험해야 했던 차가웠던 세상과 삶의 경험들이 페이지의 손끝에서 전달되어 마음 속까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은 로즈와 그녀의 새어머니인 플로의 애증관계로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죽고 가구를 수리하는 거친 일을 하는 아버지와 결혼한 여자가 플로였다. 후에 플로는 작은 가계를 운영하며 로즈와 이복 남동생 브라이언을 돌본다. 사춘기의 예민한 소녀인 로즈와 입과 행동이 거친 플로는 거의 매일같이 싸운다. 그러다가 플로가 ‘장엄한 매질’이라고 하는 혹독한 매를 로즈가 아버지에 맞는다. 플로는 그렇게 처참하게 매를 맞는 로즈를 고소해 하기보다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런 플로에게 로즈는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사실 어린 소녀가 폭력적이지만 유일한 혈육인 아버지와 미운 새어머니이지만 자신을 돌봐주는 유일한 사람인 폴로에게 가지는 감정이란 매우 복잡하다. 놀라운 건 엘리스 먼로가 그 모든 감정을 짧고 덤덤한 묘사로 표현해 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제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홀로 있는 폴로를 기억해 내는 나이 든 로즈의 시선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부엌 창가에서 차가운 호수를 내다보며 로즈는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들으면 좋아할 만한 사람은 플로였다. 최악의 의심이 멋들어지게 확인되었다는 뜻으로 그녀가 세상에! 하고 말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플로는 해트 네틀턴이 죽은 바로 그곳에 있고, 로즈는 어떻게 해서도 플로에게 가닿을 수 없었다. –중략- 이삼 년 전 로즈가 양로원에 입원시킨 이후 플로는 말문을 닫았다. 플로는 스스로를 완전히 거두어들였고, 하루 종일 교활하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칸막이를 두른 침대 한구석에 앉아서 누가 뭐라 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끔씩 간호사를 깨물어 감정을 드러내는 때를 제외하고는.” (P 47-8)

 

이후 로즈는 플로의 품을 떠나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진학하고 그곳에서 패트릭이라는 남성을 만난다. 순수한 학자를 추구하는 학생으로 알았지만, 나중에는 그가 백화점 체인의 상속자인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로즈가 패트릭과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은 그녀가 재벌이여서가 아니다.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패트릭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패트릭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진 돈의 양이 아니라 그가 주는 사랑의 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에게 안쓰러움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고 믿었다. 마치 그가 군중 속에서 커다랗고 단순하고 빛나는 물체 – 가령 순은으로 된 거대한 달걀 같은, 용도는 미심쩍지만 살인적으로 무거운 물체 –를 들고 다가와 자신에게 바치는 듯, 아니 실은 마구 떠안기며 무게를 조금이라도 나누자고 애원하는 듯했다. 그걸 그에게 도로 떠안긴다면 그는 어떻게 견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설명에는 뭔가 빠진 것이었다. 그것은 로즈 자신의 욕구, 재산이 아니라 흠모를 바라는 욕구였다. 그가 사랑이라고 말하는(그리고 그녀 역시 의심하지 않는) 그것의 크기, 무게, 광채는 그녀를 감명시켜야만 했다. 비록 그녀가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선물이 또다시 그녀에게 올 것 같지도 않았다. 패트릭 자신도 로즈를 흠모하면서도 은근히 에둘러 그녀의 행운을 지적했다.” (P 147)

 

너무나 사랑에 굶주려 있기에 그녀는 패트릭이 가진 고리타분함과 그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할 수가 없다. 로즈와 패트릭의 사랑은 그녀의 삶처럼 위태위태하다.

 

그녀는 패트릭과 결혼하지만 패트릭과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위선에 못 견뎌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일탈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패트릭과 이혼을 하게 된다. 소설의 말미에는 중년의 로즈는 치매가 걸린 플로를 돌보기 위해 다시 고향인 핸래티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했던 핸래티 마을과 플로를 이제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비록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이 삶을 어느 정도 스스로 극복했고, 극복해 가고 있음을 암시하며 소설을 끝맺는다.

 

로즈가 패트릭과의 결혼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계속해서 성적 일탈로 자신을 망가뜨려 가는 부분에서 그녀에 대한 연민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만 해!'라고 소리를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덮고 나서 한참 후에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살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의 그녀의 기억과 감정들이 수풀처럼 그녀의 삶의 얽어매고 있었고, 그녀는 그 수풀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주변 사람들과 플로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한층 부드러워진 그녀의 시선을 느낀다. 로즈 안에 있던 어린 시절의 로즈가 성장했음을 보여주며 소설을 마친다.

 

엘리스 먼로의 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떠오르는 같은 한국 여성 작가가 있다.  은희경 작가이다. 처음 그녀의 단편소설인 [아내의 상자]를 읽었을 때의 당혹함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는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일탈로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워낙 젊은 시기에 읽어서인지, 읽으면서도 그녀가 왜 스스로를 그렇게 무너뜨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다. 도덕적인 잣대로 그녀를 판단하고 비판했었다. 그 후 그녀의 작품들인 [새의 선물]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작품들을 읽었다. 그곳에서는 마치 로즈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스스로를 위선 속에 가두어야 했던 한 여성의 삶이 나온다. 오랜 시기가 지난 후 다시 [아내의 상자]를 읽으며 갈기 갈기 자신을 찢어가면서도 살고자 몸부림쳤던 한 여성을 대면할 수 있었다.

 

엘리스 먼로의 작품들이 은희경 작가의 소설들과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엘리스 먼로의 작품에서는 따스한 소망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은희경 작가의 소설에서처럼 처절한 삶 속에서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여성이 등장하지만, 끝에는 항상 자신과 타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특히 [거지소녀]라는 작품에서 이런 이미지가 강하다. 결국 그 시선이 바로 엘리스 먼로 자신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한때는 떠나고 외면하고 싶었지만, 그 삶들이 자신의 일부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엘리스 먼로가 그녀의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주는 위로와 치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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