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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암살 사건
힐러리 맨틀 지음, 박산호 옮김 / 민음사 / 2018년 10월
평점 :
최근에 고시원에 화재가 나서 7명의 생명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주거 사각지대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누우면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창문도 없는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비닐하우스에서 일가족이 생활하는 사람들, 지하 만화방과 같은 곳에서 하룻밤 잠을 자는 사람들... 이런 보도를 볼 때마다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내 감정의 밑바닥에서는 알 수 없는 두 가지 감정이 일어난다. 하나는 낯선 감정이다. 아무리 뉴스 영상을 통해 그들이 사는 공간을 보여줘도 그곳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니기에 낯선 공간처럼 보인다.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또 하나는 두려움이다. 저런 공간에 내가 떨어진다면 어떨까? 그 공간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치 그 공간이 나를 빨아들이는 듯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결국 개인에게 있어서 타인의 공간은 낯설고 두려움의 대상이다. 소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접했을 때 느끼는 낯설고 공포적인 감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작가가 있다. 한 번 수상하기도 힘들다는 맨부커상을 유일하게 두 번이나 수상한 '힐러리 맨틀'이란 작가이다. 힐러리 맨틀의 소설은 주로 다른 종족이나 다른 계층의 사람들과 접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나 관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인종혐오나 사회적 차별들을 교훈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이 자신과 다른 타인과 접하는 과정을 마치 SF 영화의 주인공이 낯선 우주 생명체와 접하는 과정처럼 낯설면서도 공포스럽게 그리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타인에 대한 낯선 감정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이 책에는 작가의 열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다. 첫 소설인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에서는 사우디에 근무한 남편을 따라 생활하는 한 여성의 시각에서 자신의 집을 방문한 한 파키스탄인을 묘사하고 있다. 더위와 권위적인 종교적 관습에 갇혀 주로 방안에서만 생활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자신의 집을 방문한 한 파키스탄인 남성 '이자즈'를 만나게 된다. 이후에도 이자즈는 계속 주인공의 집을 방문하다. 그녀는 이자즈를 만나면서 그에게 호감을 가지지만, 한편으로는 또 알 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남편과 함께 마지못해 파키스탄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했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항구 근처에 자리한 이자즈 가족의 아파트는 음식 냄새와 가구들로 꽉 차 있었다. 손이 닿는 곳마다 사진이 놓여 있었고, 카펫 위에 또 카펫이 깔려 있었다. 더운 밤이었고, 에어컨이 힘겹게 돌아가는 내내 잔기침을 해 가면서 물과 함께 곰팡이 홀씨와 병균을 뱉어 냈다. 식탁에 깐 리넨 테이블보는 축 늘어져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술 장식이 많았다. 나는 그 장식들을 계속 만지작거렸는데 마치 테디 베어의 귀처럼 나일론 털 같은 촉감이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했지만 그 술 장식을 만지면서 마음이 좀 편해졌다. 식탁에는 둔해 보이는 노파가 앉아 긴 턱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쩝쩝거리고 있었다. (P 36)"
작가의 이런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두 번째 작품인 콤마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 친구와 대저택에 들어가 휠체어를 탄 장애를 가진 아이를 관찰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들은 휠체어에 탄 아이를 문장의 콤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콤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아이의 모습을 처음 가까이서 봤을 때의 감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는 봤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뭔가 보긴 봤지만 아직 뭔가가 되지 못한 상태였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리가 본 건 얼굴이 아니라 어떻게든 얼굴이 되려고 하는 형상, 아마도 신이 우리를 만들려고 했을 때 막연히 상상하던 그런 형태 같았다. 우리가 본 공 같은 그것은 이목구비가 없었고, 어떤 의미도 없었고, 그냥 얼굴뼈 위로 살이 주르르 흘러내린 것 같았다. (P 69)"
이 소설집의 제목이자, 마지막 소설은 [마거릿 대처 암살 사건]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마을에 대처 수상이 눈 수술을 받기 위해 방문한다. 주인공이 집에서는 대처 수상이 수술을 받는 병원이 잘 보인다. 기자들과 관광객들이 마을에 진을 치고 있는데 누군가가 주인공의 집에 들어온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이들이 보일러 수리공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는 사진기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들은 대처 수상을 암살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소설에서는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아마 아일랜드 사람인 거 같다. 주인공은 이들에게 두려움과 함께 동질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들을 탈출구인 벽에 있는 문으로 인도하면서 그 문을 이렇게 묘사한다.
"벽에 있는 문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것은 병약한 아이의 위로이자 죄수의 마지막 희망이다. 헐떡거리는 단말마의 괴로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떨어지는 깃털처럼 한숨을 쉬며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한 쉬운 출구다. 나무나 철을 지배하는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는 문이다. 어떤 자물쇠 수리공도 이 문과 맞서 이길 수 없고 어떤 집행관도 차고 들어올 수 없는 문이며, 믿음을 지닌 자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에 순찰하는 경찰관들도 그냥 지나치는 문이다. 일단 그 문을 통과하면 당신은 공기와 불꽃과 불길로 돌아온다.(P 278)"
비록 소설들을 다 읽고 저자의 주제의식을 통해 작품들을 다시 곱씹으면서 리뷰를 쓰고 있지만, 막상 처음 이 소설들을 한 편 한 편 접할 때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이질적이고 공포스러운 묘사에, 무언가도 확실히 드러나기 전에 갑자기 소설을 끝내버리는 저자의 방식이 읽는 내내 혼란스럽고 불편하게도 했다. 그런데 그런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이상하게 소설을 읽고 나서도 깊은 여운을 느끼게 한다. 처음 접한 작가의 작품이어서 아직 힐러리 맨틀이라는 작가와 그녀의 작품에 대해 깊이 있는 평가를 내릴 수는 없지만 계속해서 읽어보고 싶은 매력적인 작가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