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로니아공화국
김대현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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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역사소설이나 역사 드라마를 매우 좋아했다. 특히 기존의 구질서를 뒤집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내용의 작품들은 젊은 시절까지 나를 무척 매료시켰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이 구한말 무너져 가는 조선을 대신해 새로운 왕조를 새우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고(故) 이병주 작가의 [바람과 구름과 비]나 동학혁명을 배경으로 백정들의 혁명을 다루고 있는 정동주 작가의 [백정] 등이 기억이 남는다. 최근에는 [정몽주]와 [육룡이 나르샤]와 같은 드라마가 기억에 남는다. 정치권과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썩고 썩어서 도저히 다시 세울 수 없는 고려를 대신에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를 세우는 과정이 너무도도 흥미진진했다. 이런 소설이나 드라마를 접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이 생겨난다. 현실의 부조리와 답답함에 분노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들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럼에도 최근에는 이런 열정들을 잊고 살았다. 그냥 현실에 안주하며, 현실에 맞추어가기도 급급해서 이런 열정이나 뜨거움을 잊고 살았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러 번의 정권교체를 접하면서,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실망감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나의 아로니아 공화국]은 이런 잊었던 나의 열정을 자극하는 책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하면서는 그냥 현실 도피적인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이상 국가만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그동안의 한국 역사와 정치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책은 한반도 남쪽 한일 공동 개별 구역의 수역에 새워진 미래의 아로니아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배경으로 한다. 아로니아 공화국이 2대 대통령 김강현은 자신의 임기를 마치면서 자신이 지나온 과거를 회상한다. 김강현은 점방이라고 불리는 작지 많은 않은 건축사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은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만화방에서 부서진 텔레비전을 구입해 주기 위해 친구들의 삥을 뜯다가 아버지에게 죽도로 막기도 했었다. 그렇게 사람이 되라고 붙들려 들어가 합기도장에서 그는 수영 누나라고 부르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중학생인 그에게 고등학생인 수영 누나는 이상형이었고, 그는 수영 누나의 마음에 들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된다. 뛰어난 암기력을 가졌던 그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만점을 맞고, 대학 입학시험도 몇 문제 틀려서 서울 법대를 간다. 그리고 학교를 다니기 싫어서 사법고시를 보고 검사가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학국 교육의 현실을 접하게 된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냐? 무슨 문제가 어떻게 나오는지 구경이나 하려고 1차 사법시험에 응시한 나는 개관식 320문항 중에서 321문항을 맞혀버렸다. 확실히 외우는 데 타고난 모양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어렵다는 사법시험도 이리 꼬고 저리 비틀고 훌러덩 뒤집어 문제를 낸다고 한들 결국 무작정 외우는 놈들을 위한 그저 그렇고 그런 시험에 불과했다 - 중략 - 재수가 좋은 건지 실력이 뛰어난 건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지만 3차 면접시험을 통과한 나는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한국의 모든 교육과 시험은 인성과 감성, 창의력과 표현력, 독창성과 정의로운 인간성 따위는 애초에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달달 잘 외우는 놈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존속되는 요상하고 망측하기 짝이 없는 제도였다. 나는 한국 교육과 시험의 특출한 수혜자였다. (P 80)"

김강현은 그토록 원하던 수영 누나와 결혼을 하지만, 검사라는 제도 속에 빠져 들어가면서 점점 현실적이 되어 간다. 그리고 고위층만이 아는 토지 개발 계획을 미리 알아서 아버지에게 새로 들어서는 신도시에 땅을 사자고 말한다. 당시 IMF로 인해 재벌들이 부동산을 쓸어 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듣고만 있던 아버지가 또다시 아들을 두들겨 팬다. 훗날 그는 그렇게 자신을 패 준 아버지가 너무 그리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세상 속에 휩쓸려 살지 않기로 결심하고, 검사의 조직문화에 반기를 든다. 간첩 조작 사건의 재심에서 진실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검사 조직에서 나온다. 그는 쓰레기 속에서는 모두가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비참한 현실을 깨닫는다.

"설마 검찰청 안에 있는 모든 검사들이 쓰레기였겠는가? 국민에게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고 국민을 두려워하는 검사는 1명도 없었는가? 있었다. 분명히 있었고 그들이 있어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쓰레기장에 숨어 있는 한 그들 또한 쓰레기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의 속성, 쓰레기는 주변의 깨끗하고 쓸모 있는 존재들조차 모조리 쓰레기 취급받게 만든다. 주변의 완벽한 쓰레기장화. (P 137)"

그렇게 현실에 실망하고 있던 그에게 손성철관 백민정이라는 사람이 접근을 해 온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재미있고 신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 그리고 국민을 위하지 않는 국가, 서로를 경쟁하게 해서 자기들만의 왕국을 만드는 국가에 대해 결별을 선언하고, 한일 공동 해엽 부근 암초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세워 여의도 몇십 배 크기의 국가를 만들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강현은 그 계획에 동참하면서 아로니아 공화국이라는 이상 국가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소설의 내용은 어찌 보면 황당할 수 있으나, 우리 모두들이 고민하고 있는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 왔는가? 이대로 가면 한국 정치에 희망은 있는가? 그냥 퇴근길에 소주 한 잔 하며 대통령과 정치인들을 욕하고, 인터넷에 '헬조선'이란 단어만 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있는가? 국가가 과연 존속의 가치가 있는가? 이런 국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하고 있는 책이다. 소설은 소설로 읽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통해 현실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하는 책이다. 물론 소설적인 재미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김광현의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 이야기나 수영과의 사랑이야기는 읽는 재미를 더 한다. 비록 역성혁명을 꿈꾸는 역사소설이나 정치소설은 아니지만, 현실정치와 한국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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