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특별판)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미로 찾기 게임이 매우 인기였다. 신문이나 잡지에 입구와 출구만이 확연히 눈에 띄는 복잡하게 그려진 미로들이 있었다. 미로만 보면 볼펜을 들고 입구에서부터 출구까지 선을 그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상대방의 마음을 열어 젖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과정을 미로찾기에 비유하자면 이처럼 복잡한 미로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 있다. 바로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오래 전에 출간되었지만 최근 영화가 개봉되면서 다시 재출간된 작품이다. 하는 일마다 어리숙하지만 자신이 짝사랑 하는 여자 후배의 뒷모습만은 기가막히게 알아보는 남자 선배와 하는 일마다 똑뿌러지고 불의를 보면 못참고 자신만의 특급무기인 친구펀치를 날리는 여자 후배의 로맨스 이야기이다. 남자는 첫눈에 반한 검은 머리의 여자후배를 좋아하지만, 그녀에게 직접 다가가지 못하고 그녀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서 우연을 가장해서 그녀와 인사를 한다. 이렇게 많은 만남을 가지면서도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이리하여 나는 가능한 한 그녀의 시야 안에 머무릭 위해 신경을 써왔다. 밤의 기야마치와 본토초에서, 여름의 시모가모 신사 헌책쇼ㅣ장에서, 나아가서는 나날의 행동 범위에서 - 중략- 이제 그것은 우연이라고 할 횟수를 훨씬 넘어 '너희들은 운명의 빨간 실로 칭칭 묶였어!'라고 만인이 보증설 만한 횟수에 달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의하하다. 내가 이렇게 모든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나타날 수는 없지 않은가. 편리주의도 정도가 있지. 그러나 중대한 문제는 그녀가 이 부분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지닌 보기 드문 매력은 커녕 내 존재 그 자체에 말이다. 이렇게 늘 마주치는데도. '뭐,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대사에 목에 피가 날 정도로 반복하는 내게,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선배, 또 만났네요!' 그게 다였다. 그녀와 만난 뒤로 벌써 반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P 188)"

그렇다고 남자가 쉽게 여자 후배와 마주치는 것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매번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봄의 밤거리를 활보하는 그녀를 만나고자 바지까지 잃어버리는 꼴부견을 당하기도 하고, 헌책방에서는 이상한 책방에 끌려가 그녀가 원하는 책을 얻기 위해 매운 것을 먹는 내기를 하기도 한다. 또 대학 축제에서는 이상한 가면을 쓴 사람들 연극 무리에 뛰어 들기도 하고, 감기로 인해 지독한 감기로 고생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매번 그녀를 만나서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얻어간다. 이런 과정에 대한 묘사가 시종일관 유머스러우면서도 기상천외하다. 이렇게 적고 보니 소설의 내용이 마치 하나의 미션을 완성해 가는 게임과 같기도 하다.

특이한 건 이 과정에서 매우 비현실적인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다. 3층전차를 타고 가짜전기부랑이라는 괴상망측한 술을 만드는 이백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하고, 기르던 잉어가 하늘로 날라거 폭싹 망한 도도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자칭 헌책방의 신이라고 말하는 꼬마를 만나기도 하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일년 동안 빤스를 갈아입지 않는 빤스총반장이라는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남자는 이 모든 미로같은 사건과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의 마음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는다.

"선배는 아마데 강 거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마치 봄날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닏. 선배는 그 햇살 속에서 턱을 괴고 앉아 어쩐지 낮잠 자는 고양이처럼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배 밑바닥에서부터 따스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가볍고 작은 고양이를 배위에 올려놓고 초원에 누운 기분일까요. 선배가 나를 알아보 웃으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나도 고개를 숙였습니다. 이리하여 선배 곁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이렇게 만나 것도 어떤 인연. (P 391-2)"

작가의 환타지적 생각이 마음껏 소설에 펼쳐져 있고, 읽는 내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젊은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이야기에 마음이 같이 들뜨기도 한다. 이런 소설의 이미지들이 만화 영화로 어떻게 표현되었을지 벌써 부터 기대가 크다. 영화도 기대가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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