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녀 펭귄클래식 56
프랜시스 호즈슨 버넷 지음, 곽명단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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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 오래 전 다락방에 기어올라 읽던, 그 시절 소중한 시간들을 선사해준 동화책을 떠올리며.

 

에일리가 [불후의 명곡]에 나와 노래하는 내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었지만 이 한 곡 때문에(에일리가 부르는 스타일은 여전히 맘에 안든다, 그저 곡이 좋아서) 간혹 에일리가 노래하던 무대가 생각나곤 한다. 이승환 편에서도 (곡이 좋으니까) 좋았는데 거기서 하차했다. 그렇잖아도 그만나올 때 됐다 싶던 참이었다. 모름지기 연예인이 오래가려면 한창 주목받을 때야말로 치고빠지기를 잘 해야 한다. 오래된 감성과 옛날 노래의 감각을 잃기 싫어 보기 시작한 프로그램은 어느새 습관처럼 내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래봐야 원곡의 감동을 따라갈 수 없지만 나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그들은 아날로그를 노래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대부분의 가수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에일리가 더 별로였던 이유는 가만히 불러도 잘 하는 노래실력을 감성을 실으려 기교를 부림으로서 상쇄시키는 느낌 때문이었는데, 어린 나이의 풋풋함 보다는 어서 어른이 되어 장렬하게 전시되고픈 야심이 느껴져서였다. 그녀가 그날 불렀던 노래는 가사도 멜로디도 딱 그때 그 시절을 내 앞으로 불러올 만큼 아련하면서도 명료했다. 강변가요제 시대를 청춘으로 보내진 않았어도 80년대 후반의 서정적 멜로디는 엄마의 영향 탓인지 늘 앓을만큼 좋.았.다. 이 노래는 스물 세 살 되던 해, 콩알만 하게 태어나 걱정시키면서 드디어 엄마 인생의 절반을 살고있다며 세상 다 가진 듯 좋아라하던 때를 헤엄치게 한다. 모든 것을 탄생시키고 또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하룻밤의 꿈 [가사]

 

이쯤에서 돌아가려해
변함없는 이 세상 변한 건 그저 내 마음

다가서면 멀어지고 떠나기엔 가까운
너의 눈빛은 여전히 고운데

지금까지 널 사랑하며
흘린 내 눈물만큼 너와의 거릴 느끼고

너의 그 모든 마음을 갖기엔
아직도 어린 나를 알고

이토록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건 없는지
사랑에 버려진 세월의 슬픔을 아는지

알 수 없는 너를 하룻밤 꿈같은 너를
언제고 다시는 찾지 않으리

나만의 기대도 한겨울 바람 같은 네 맘도
모두다 하룻밤의 꿈
잊혀져 버릴 꿈

지금까지 널 사랑하며
흘린 내 눈물만큼 너와의 거릴 느끼고

너의 그 모든 마음을 갖기엔
아직도 어린 나를 알고

이토록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되는 건 없는지
사랑에 버려진 세월의 슬픔을 아는지

알 수 없는 너를 하룻밤 꿈같은 너를
언제고 다시는 찾지 않으리

나만의 기대도 한겨울 바람 같은 네 맘도
모두다 하룻밤의 꿈
잊혀져 버릴 꿈

(알 수 없는 너를 하룻밤 꿈같은 너를)
언제고 다시는 찾지 않으리

나만의 기대도 한겨울 바람 같은 네 맘도
모두다 하룻밤의 꿈 ~

밤보다 짧은 꿈 
펼친 부분 접기 ▲

 

 

그리고 버넷의 가장 완벽한 동화 <소공녀>는 살아온 모든 순간을 밤보다 짧은 꿈으로 인식시킨다. 반드시 지나쳐야 했을, 결코 피할 수는 없었을 많은 순간순간의 선택과 시간,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을.

 

아홉 살부터 열한 살, 1년 하고도 몇 달 더 살았을 그 집에서는 이십년 후가 아니라 사십년 후에 떠올려도 미소 지어질 그런 일들이 아주 많았다. 동네 아이들(언니오빠친구동생) 모두 모여 생일파티를 했고, 최고 인기선물은 연필과 수첩과 노트와 지우개 등이 가득 든 문구세트와 저금통이었다. 옆집 오빠가 좋아서 새침데기처럼 굴었고, 주차장에 주차하고 골목을 한참 걸어와야 대문에 닿았고, 마을 근처에 꽈배기 과자 공장이 있어 날마다 고소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아직도 그곳을 생각하면 꽈배기 공장을 떠올리고 그러면 그 당시 동네 곳곳에 살던 친구들과 밤마다 하던 숨바꼭질이 떠오른다. 엄마가 얼른 들어오라고 부르는 소리, 아이들끼리 마음이 어긋나는 바람에 편먹고 싸우던 일까지(지금으로 치면 패싸움), 두 편으로 나뉘어 이어달리기, 술래잡기,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고무줄 놀이 같은 구식에 목숨걸던 시절. 요즘 아이들은 잘 모를 놀이들. 훗날 잔세스칸스에서의 강렬한 코코아 향이 맡아지고, 그러다보면 아- 추억은 향기로 맡아지는 구나, 하며 향수에 젖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타임머신이 제멋대로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첫사랑이나 파리, 학창시절, 어린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가능하다. 이 시간들을 겪지 않았다면 많은 향수를 모른 채 어른이 되었을 듯한 불안한 예감 같은 것에 다름 아니다.

 

어린아이의 키와 눈높이에 딱 어울릴 다락방이 딸린 방에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커서는 절대로 읽은 책을 다시 보는 일이 없지만(확 줄었지만) 아홉 살 크리스마스, 엄마로부터 이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세라의 다락방이 마치 지도 위 어느 나라들 보다 넓고 크게 느껴졌다. 그곳은 갖가지 보물로 반짝거리는, 없는 것이 없고 있을 것만 있는, 해와 달과 별처럼 손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거대한 상상력으로 빚어진 멋진 세상이었다. 그때부터였을 지도 모른다. 내가 종종 혼자, 외롭게, 쓸쓸히 무언가에 몰두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한 것이. 세라는 에밀리(인형)를 친구로 삼아 인도장교인 아빠와 떨어져 영국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지내게 된다. 슬픔을 감출 줄 알고, 기다릴 줄도 알며, 무엇보다 인사와 감탄과 예의를 잊지 않는, 바른 마음가짐을 가진 베풀 줄 아는 소녀다. 당시 세라보다 두 살이 더 많던 나는 세라와 닮기를 소망했다. 책이 지금보다 훨씬 귀하던 시절, 온종일 읽고는 다시 또 다시 읽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발랄하고 성실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자고 일어나니 엄마가 책상 위에 올려두신 빨간장화(플라스틱)에 든 종합과자선물셋트와 동화책 한 권. 그때 우린 좁은 방에 살고 있어서 책이 많지 않았는데 좋아하기 시작한 유일한 책 속 주인공이 세라였다. 유일해서가 아니라 처음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홉 살의 여자아이에게 세라는 모든 것을 다시 쓰게 하고, 예뻐지고 착해지고 싶게 만든 주범이다. 동생은 파란장화 속 종합과자선물셋트와 <톰 소여의 모험>을 받았고, 아마도 그애는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된 책을 정리할 때마다 고개를 내미는 동화책은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낡고 더러워졌다. 하지만 제자리에 꽂힌다. 다시 펼치지도 못한 채 그저 다시 꽂아놓는다. 그 책은 남아있음으로서 제 할 일을 다한다.

 

어릴 때, 학창시절에도 기숙학교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님과 하루 이상 떨어져 지낸 적이 없고, 어릴 때는 언제나 엄마가 곁에 있었는데, 가족과 떨어지거나 집을 떠나 생활할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막연히 성인이 되면 독립할 거라 맹신했다. 진심으로 떠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조금 더 낯선 세계를 동경했을 뿐이다. 엄마 없이 일곱 살에 아빠 말동무가 될 정도로 철이 들어버린 아이, 아빠의 경제력과 지위로 인해 부유하게 자랐지만 예의범절과 성실과 밝음을 잃지 않은 아이, 어른스러움과 천진난만함이 세라를 더욱 빛나는 화려한 숙녀로 만들지만, <소공녀>에는 소녀시절 꿈꿨던 모든 여자아이들의 로망과 미래가 흘러넘칠 뿐 아니라, 배경묘사 또한 절절하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빠와 떨어져 홀로 생활하며 친구와 자아, 꿈을 확립해가는 아직 어린 세라의 찬란한 성장담으로도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는 <빨강머리 앤>과도 어느정도 상통하는 면이 많은 여자아이들의 필독서다. 하지만 '있는 집 자식'이라서 기숙학교 원장으로부터 은근히 당하는 핍박과 괄시, 조롱어린 멸시나 기득권 경쟁처럼 친구들과의 다툼에서 오는 외로움과 쓸쓸함은 둘째로 치더라도,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두고 어른들이 하는 '줄대기', '잘보이기' 같은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썩 좋지만은 않다.

 

앤이나 주디, 캔디가 가난한 고아소녀들이라면 세라는 부유한 아빠를 뒀지만 나중에 아빠를 잃고 그들과 같아진다는 점에서 현대가 말하는 신데렐라 혹은 캔디 캐릭터는 그다지 진화되지 못했다. 꿋꿋하게 웃으며 제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고 가다가 동화 속에서 걸어나온 근사한 왕자님 하나 물면, 이 시대 브라운관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치는 로맨스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여전히 슬픈 대목에서 슬프고, 우울한 대목에서 우울하고, 분노하는 대목에서 분노한다. 달라지지 않았다. 방이 한 칸 뿐이었으므로 늘 다락방에 책상을 놔달라고 조르던, 날마다 창고로 쓰는 다락방 계단을 기어오르던 아홉 살의 여자아이는 이제 없다. 세라는 여전히 풋풋한 상상력과 통통튀는 발랄함과 순하면서도 강단있는 어여쁜 여자아이로 남아있는데, 옆집 오빠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고 그의 손을 쥐고 싶었던, 작은 나만 없어졌다. 억울하진 않지만 되찾고 싶어지는 밤.

 

좁지만 북적거리던 다세대주택이 늘어선 작은 골목 안의 집 안에 들어찬 사람들.

옆집 찌개 끓이는 냄새가 집안에서도 마당에서도 맡아지던 따닥따닥 붙어있던 한 대문 안에 살던 이웃들.

더럽지만 포근하고 따스하면서 정감있던 다락방을 혼자서만 기어오르고 싶은 순수.

 

내 안의 세라와 함께 안녕.

이 세상에 나를 꼭 닮은, 나만 꼭 닮은 소녀와 다시 찾아갈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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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2-09-20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공녀>는 만화로만 잠깐 본 기억이 있고, 책으로는 읽지 않았나 봐요. 과정도 결말도 생각이 나지 않아요.
어린 시절 공기, 고무줄 놀이를 제일 많이 했어요. 한데 동네서 나는 항상 깍두기였어요. 같은 성씨를 가진 아이들(그러니까 또래의 고모와 조카였어요. 그 때는 그 관계를 이해 못했는데..) 사이에서 성도 다른 나는 왼손잡이에 공기도 어설프게 보이기도 했고 잘 하지도 못했어요.

불후의 명곡을 볼 때마다, 잊었던 노래들을 만나서 그 시절에 빠져요. 최호섭이나 양홍섭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자목련 2012-09-20 21:41   좋아요 0 | URL
ㅎㅎ 이 글에는 제가 1등!!

아이리시스 2012-09-20 21:57   좋아요 0 | URL
또래의 고모와 조카.. 지금도 이해가 안가요ㅎㅎ 오홋, 자목련님 왼손잡이예요? 저는 왼손잡이가 되고 싶었어요. 왼손으로 젓가락질 하는 거랑 글씨 쓰는 게 부러웠어요. 저는 왼손잡이들을 예술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로 인식했거든요. 제가 왼손으로 하는 게 하나 있긴한데 이건 담에 어떻게 비밀로..... 별 거 아니지만 되게 중요한 거예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차마 말이 안나올 것 같네ㅎㅎㅎ

에일리 어때요? 싫죠? 싫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지지난주엔 최성수 아저씨가 나오셔서 엄마가 좋아하셨어요. 이 프로그램은 항상 엄마랑 함께 보거든요!

이 글에는 제가 2등!!

Shining 2012-09-2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저는 어릴적에 너무 심심하게 자랐나봐요_- 전 공기도, 고무줄놀이도 못해요; 제가 살던 동네에선(그러니까 그런 놀이를 할 때 나이쯤에 살던 동네) 밖에서 노는 애들이 없었거든요; 배울 기회를 놓쳐서 지금도 못해요_- 게다가 책에 매진하는 꼬마아이도 아니어서 소공녀, 톰 소여의 모험 등등과 인연이 없네요; 읽고 엄청 울었던 건 <플란더스의 개>에요, 그건 지금도 눈물 나-_ㅠ 어릴적엔 한국동화만 있었어요, 집에_- 쥘 베른도 스무살 넘어서 읽은것에 저는 이상한 콤플렉스가 있는데; 아이님 여러가지로 부럽군요!

아이리시스 2012-09-23 01:28   좋아요 0 | URL
보통 아파트에 살았으니까 학교 다녀오면 또래와 뛰어놀 일이 드문 것 같아요. 저때 2학년에서 4학년 정도였는데 저도 원래 아파트 살다가 좀 더 큰 집으로 옮겨가야 하는데 아파트 완공과 이사에 틈이 생겨 다세대주택으로 간 거예요. 다세대주택을 멸시하는 발언은 아니지만 거기로 들어가는 게 썩 좋은 기억은 아닐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저런 추억을 몇 개 가지고 있어 참 좋은 것 같아요.

갑자기 옆집 오빠가 보고싶네요 :)

저는 앤과 주디와 캔디 이 모든 애들이 세라 뒤에 놓여요. 그리고 샤이닝님은 어릴 때부터도 저보다 훨씬 더 문학소녀였는 걸요! 쥘 베른은 당연히 스무살 넘어서 읽는 거죠! (저도 해저 2만 리 완역본 정독한 적이 있죠, 몇 년 전에ㅎㅎ)
 
시르트의 바닷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1
줄리앙 그라크 지음, 송진석 옮김 / 민음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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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중. 우리의 처지다. 남발공약으로 징병제 폐지를 들먹인다거나 정치/경제/외교적으로 얽힌 독도에 깜짝쇼식으로 한 번 갔다온다거나 해서는 곤란하다.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지지 철회로 압박하는 일본도 웃기지만 그보다 웃긴 건 내부분열하는 우리다. 그래서인지 <시르트의 바닷가>가 색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독도에서는 벌써부터 군경 통틀어 풀가동 수비를 서고 있고, 윗 대가리들 싸움에 괜한 말단들만 고생하는 게 이 세계 룰이긴 하지만 휴전이 장난인가? 심심하다고? 권태? 위험과 불안을 도발해보시겠다고? 시르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한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일본과 북한과 한국의 관계가 삼각으로 섞인 게 한탄스러워져 나온 문장들.. 안보리 상임 이사국은 되고 싶고, 고귀한 역사를 지닌 타국의 영토인 독도는 자기네 땅 하고 싶은 게 지금 일본이다. 안보리의 기본적 역할에 대해 모르는 건가. 상임 이사국이 돼서 이 나라 저 나라 운명을 손에 쥐고 아무렇게나 표결만 갈기면 그게 국익인가.  

 


이 소설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데, 오히려 문학적 도발에 10페이지 읽어내리기가 벅찬데, 문학과는 달리 세상은 참 시끄럽기만 하다. 


쥘리앙 그라크는 1951년 이 작품으로 받게 된 콩쿠르 상을 거부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왜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책날개에 씌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은둔하는 이미지를 획득하면서 주류 문단과는 영영 결별하는 셈이 되어 자국에서조차 그라크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베일에 쌓여있다고 한다. 사연이 궁금하지만 그런 건 찾지 않는 게 옳다. 알려지기 싫다잖아. 작품으로 승부하고 싶다잖아. 잊혀지고 싶은 사람은 잊혀지게 두고, 나오고 싶어할 때 반기고 그럼 안되는 걸까.

 

<시르트의 바닷가>를 읽으면서 내 안의 이중성을 발견했다. 그림에 있어 늘 초현실주의보다는 인상주의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줄거리보다는 문체에 감탄하는 취향이라 이게 문학으로 오니까 인상주의보다는 초현실주의로 탈바꿈한다. 다중이로 좀 살아보지 뭐. 라고 일단 둘러친 다음.

 

몽환적이면서 아득한 문장이다. 지루하지 않다고는 안했다. 이 지루함은 취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재미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여전히 잘 읽히지는 않지만 집중하면 다음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문체의 매력이 상당하다. 그래서 호불호 또한 심하게 갈릴 것이다. 이건 문체에 대한 것일 뿐이지만 내용도 상당히 없다. 한방이 없고 여기저기 서걱거리며 겉돌기만 한다. 앞 문장이 뒷 문장을, 뒷 문장이 앞 문장을 부연하며 소설이 한 편의 시처럼 씌어졌다. 적막한 시르트 기지에서의 공허한 낮과 밤을 인상적 풍경화로 스케치하고, 탁월한 시적감각과 감수성으로 승화시킨다.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처음에는 스페인의 극작가 로르카를 연상했지만 로르카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사유한다면, 그라크는 서술을 하고있다. 상당히 다르다. 비슷하지 않다. 연상이 틀렸다. 안고 안긴 문장을 단번에 캐치하기도 어렵지만 단 한 문장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휘발성 마력을 지닌 글이라 탐냈다.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를 스케치한다. 아무 일도 없는 상태를 모든 일이 있는 것처럼 그리려니 얼마나 세세한 터치가 필요했을까. 실제로도 가장 넓은 곳에서 가장 구석진 곳까지 세세히 묘사한다. 알갱이가 보라빛, 핑크빛, 회색빛으로 각각 반짝거린다. 그곳에 있는 해군과 관리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인데 읽는 나는 망원경으로 그들이 겪는 삶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처럼 재밌다. 날카로운 시어가 관통하는 권태로운 일상은 마치 평화를 넘어선 평화를 연상시킨다. 바다 가운데 나홀로 남은 낙후한 요새의 풍경과 일상을 한 편의 시로 쓸 줄 아는 작가라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문장들은 또 얼마나 황홀할까.

 

그라크라는 작가가 세상에서 숨어버린 게 수긍이 간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은밀하면서도 경이로운 꿈이 가상 국가 오르세나의 버려진 땅 시르트로 전근간 젊은 귀족 알도의 눈을 통해 펼쳐진다. 낡게 버려진 땅, 문을 열고 나가면 끝없이 푸른 잿빛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곳을 지키는 해군기지 간부들은 바다 건너편 이웃 국가 파르게스탄과의 휴전 이후 할 일이 끊긴 지 오래다. 권태로운 일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는 곳. 이미 전쟁이 끊긴 지 300년 지난 이 요새 같은 곳에 모인 이들은 양치기나 동물 사냥 등 이득되는 일과 한량의 취미생활에 집중한다. 안보를 위해 파견된 땅에서 돈놀이가 급급해지고 모두들 권태에 찌들었다. 아무 일이든 일어나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기대와 어떤 일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규칙적 평온 사이의 갈등은 내밀하게 그려진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어느 쪽을 더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한다. 이곳을 오래 지켜온 마리노 대위는 안정을, 감찰대장으로 파견된 젊은 알도는 불안을 원한다. 고요한 물결을 흐리는 한낱 파도처럼 시르트의 기지에 폭풍전야의 긴장이 감돈다.

 

나는 규칙 없이 살았다. 시간표는 해군기지의 모두에게 단조롭지 않았다. 날씨의 우연과 바다의 변덕에 좌우되며, 느리고 매우 모호한 활동 가운데 시간표는 거의 농부들의 것에 가까운 다양함과 불연속성을 띠었고,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그것의 미미한 제한에서 벗어났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자유와 공허에서 오는 일종의 얼떨떨함으로 고생했다. 나는 동료들이 즐길뿐더러 견디기 어려운 고독의 시간을 짧게 해주는 격렬한 운동에 맹렬히 뛰어들었다. (p.34)

 

알도는 금새 이유모를 불안을 감지한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서 오는 권태적 회의와 비일상적 풍경이 주는 기시감이다. 사무실 책상 위에 해도가 펼쳐져 있다. 건너편에는 우리와 같은 이들이 지키는 요새가 있을 것이다. 미지의 공간을 공상처럼 펼치며 이 세계의 균열과 앞으로의 삶과 생활과 수없이 보내야 할 낮과 밤에 대해 생각한다. 간혹 전에 있던 도시의 화려함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이곳에서의 예외성이 마음이 든다. 예외적 존재이자 감시관 알도를 좋아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마리노 대위와의 긴장감은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불안을 감지하는 이, 불안에 다가가는 이, 불안을 회피하는 이, 불안에 맞서는 이들의 욕망이 한곳에서 만난다. 건너편에 존재하는 국가의 변화에 대한 미온적 감지는 이곳 사람들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다. 희망과 절망이 서로의 반대말이 맞다면, 이 예외성은 평온한 상태를 거부함으로서 권태와 환멸을 제거한 채 올바른 위기로 기능할 것이다. 알도가 희망하면서 희망하지 않는 것, 마리노 대위가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한 평화 속 균열, 알도가 느끼는 이곳과 저곳의 차이, 선택의 기로, 당신은 어느 쪽을 원할 거냐는 물음까지, 소설은 완벽하게 나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 더 두려운 법이다. 제거할 대상이 뚜렷하지 않을 때 제거해야 할 것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시르트는 300년간 평온 속의 불안을 견뎌왔고, 그것이 일상이 된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결말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바깥 세상과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한편 독자를 기가 질리게 만든다. 번역이 이 정도라면 원문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어딘가 갇혀 사흘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가진 책이 달랑 이것 뿐일 때 최고속도로 읽힐 것 같다. 생각이 없으면 진도는 나아가기 마련이다. 급하지 않으면 반드시 끝을 봐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진다. 한여름 전국일주를 하면서 포항과 영덕 사이 작은 해수욕장 근처 작은 민박에 묵은 적이 있다. 문을 열고 나오면 바다냄새가 훅 끼쳐오는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시르트의 바닷가> 표지그림이 잊었던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문을 열면 바다로 뛰쳐나갈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을 한 군데 알고 있다. 내내 로망이었던, 하지만 살기에는 겁이 났던, 어떤 곳.

 

이 아름다운 소설이 언젠가 시르트의 바닷가 추억을 나만의 바닷가 추억으로 전환시킬 지도. 하루에 한 권, 일주일째 소설이 참 잘 읽히는 시절을 살고 있다. 시르트 바닷가에 머무른 날은 단 하루였기에, 빛나는 햇살 아래 잔잔한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푸르고 평화로웠기에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숨이 막힌다. 세상에서 버려진 땅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또 하나의 여름을 과거로 보내는 중이다. 몸이 약한 엄마가 이 무더운 여름을 꼬박 다 보내고 여름의 막바지에 가서야 날 낳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물론 가을 중순에 태어나야 할 내가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나 막바지 여름과 초가을 한 달을 어느 바다 동네 언덕 위에 있는 아동병원 인큐베이터에서 하루 3만원짜리 잠을 자긴 했지만. 내 처음 한 달은 고귀하고 벅차고 걱정스런 삶이었다. 거의 다 들은 말에 의한 거지만. 죽을까봐 안지도 못했다고 엄마와 아빠는 말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다. 철마다 지독하게 앓는 감기몸살과 비염 외에는 아픈 적도 거의 없었고(그것들이 진짜 독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충분할 만큼 아들인 동생보다 더 사랑받았다. 내 동생은 짧은 인생 자체가 다소 롤러코스터 같은 아이였다. 뭐 거의 본인이 저지른 일이니 훈장처럼 달고 살아도 좋겠지만. 욕심도 많고 고집도 세고 성깔도 있어서 그애가 늘 불안한 반면 또 애착이 컸기 때문에 부모님의 관심은 늘 그애에게 쏠려있었지만 내가 받은 믿음은 더 컸다. 지금은 내가 좀 더 내다버리고 싶은 자식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시작부터 끝까지 내 인생은 바다를 빼면 남는 게 없다. 바다는 설렘과 고독과 시끌벅적함과 외로움과 시림과 차가움과 시원함을 동시에 가졌다. 모든 시작과 마지막을 바다에서 할 것이다.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그 중에서도 곧 다가올, 여름이 지난 후 쓸쓸히 버려진 쌀쌀하고 달콤한 늦가을과 초겨울의 밤바다를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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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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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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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8: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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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9: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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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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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런 책은 읽기가 버거워요. 진짜 한적한 바닷가 민박집에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가면 읽을 수 있으려나? "내용 이전, 문체의 매력" 얘길 하니까, <작은 것들의 신> 생각이 나네요. 완전 예찬하면서 읽다가 갑자기 뚝 끊긴 이후로 5년 이상 중단된 책. 이 책도 문장이 너무 매력적이었지요. 근데 <시트르의 바닷가>는 이 책보다 왠지 '난독'으로 치면 한 수 위일 것 같은 느낌!! ^^ 이런 책도 읽다니 아이리시스님 대단!

아이리시스 2012-08-21 19:46   좋아요 0 | URL
이건 정말 누구한테 읽으라 그럴수도 없고..(돌 날아올테니까요) 참..근데 나름 매력은 또 있거든요. 그냥 저나 읽죠 뭐ㅎㅎ 그냥 여행 포기하고 도시로 올 듯ㅋㅋㅋ

<작은 것들의 신>이 문체가 좋구나, 저도 그 책 있어요. 작년에 샀어요. (진짜 저 뭐 안 산 책이 없나봐요) 그치만 그 책은 줄거리도 좋을 것 같아요. '난독'은 이 책이 대단해요. 이런 책은 차라리 속독해야 그나마 끝까지 볼 수 있어요. 아니면 철저히 문학적 모드로 접근해야 해요. 대단한 건지 미련한 건지..

다시 도시생활 화이팅이에요, 섬님^^

댈러웨이 2012-08-21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환적, 아득한'에서 이건 내 책이야 했다가, '문체, 세세한 터치'라고 해서 고개를 저었다가, 결과는, 올려 놓은 본문 인용 글 + 아이님 리뷰 = 책 산다.

하루에 한 권이라는 독서력은 대체 얼마의 내공을 쌓아야 가능한 거에요? 좀 알려줘요. (4일이 지나도록 지금 읽는 이 책은 이제 절반. 무슨 책인지 알죠? 처음엔 한 시간에 한 10페이지 읽었어요. 원서 읽는 것도 아니고, 나 어떻게??? ㅠ.ㅠ 문체, 중요할 텐데, 장식은, 이번에 아주 질리고 있어요.)


설령 갖다 버리고 싶더래도 고 쪼만했던 아이가 지금까지 잘 살아 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2-08-22 00:02   좋아요 0 | URL
책의 질이 다르면 돼요! (저 아직 안갔어요..) 에잇 모르겠다, 잘 읽히는 책 읽으면 돼요. 근데 거기에 [자기만의 방]이랑 [말테의 수기]가 들어가니까 좀 신기한 거지만.. 저는 너무 재밌더라고요. 묘사많은 거, 문체 좋은 거, 그런 거 좋아요. 댈러웨이님은 다 빡빡한 책들만(!) 보시니까 그런 거고, 저는 안 빡빡한 책도 많이 봤거든요. 거기로 건너가려면 다 한 문학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을 것도 같아요. 하루만에 확 읽혀봐요, 댈러웨이님 기둥 뿌리 뽑아야 할 거예요.

그래서 저도 그 책 가진 거.. 좀 읽었는데.. 예전에는 아름답다고는 생각을 안하고 그분이 왜 그 책이 좋다고 했을까..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을까.. 했거든요. 솔직히 얼마나 지겨워요, 댈러웨이님이 아름답다고 하셔서 아~ 하게됐죠. 주렁주렁해요, 문장이. 근데 재밌는데요, 제 기억력은 얕은 것도 아니고 아예 없나 봐요. 저는 그냥 읽을 당시에만 기억해요( '') 그 책은 꼭 봐야 해요, 제가 좋아하는 책이니까요. 오홋.

걱정마세요, 아직은 갖다버리고 싶다고는 안하셨어요ㅋㅋㅋ (아마도 참고 계실 듯..)

댈러웨이 2012-08-22 00:45   좋아요 0 | URL
잠깐만, 저 이 댓글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아, 저 이해력 지금 엄청 떨어지고 있어요. 아이님때문에 정신 공황 상태라. 무슨 책 우리 얘기하고 있는 거에요? <마담 보바리>? 저 그 책 아름답다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채털리->가 아름답다고 했는데. <마담->은 지금 읽는 중이니까 끝까지 읽어야 뭐라 말할 수 있겠어요. 아이님이 좋았다면, 일단은 참을만하겠어요. 그래요, 문장이 주렁주렁, 미치겠어요 아주. ㅠ.ㅠ 이 차이가 더 극명한 이유는 로렌스 읽다가. 로렌스 문장 아주 똑똑 끊어져요. 난 이런 글이 더 좋다는 걸 이제 알겠어요.

어쨌거나, <말테->, 저 이 책도 고생 엄청했는데. 초반부에서만 좀 휘어잡혔는데 중간에서 영 삼천포로 빠졌어요. <자기만의 방>은 참 좋아요. 읽었다니 막 고마워지네요. ㅎㅎㅎ

근데, '거기로 건너가려면'이 무슨 말이에요? 불문학? 유럽문학?

p.s. 아이님 이렇게 온라인에서 오래 놀 때는 대작 준비하고 있는 거에요. 저 지금 기대 만빵하고 있어요.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8-22 00:59   좋아요 0 | URL
왜 이러는 거예요, 자꾸 이러심 진짜 김연수 미워할 거예요!(ㅋㅋㅋ) '거기로 건너가려면'은 바다 건너가면, 이란 뜻이고(배송료 엄청 든단 뜻이고). 책은 저한테 둘 다 별 차이 없거든요. 둘 다 대학 때 읽었던 거라서.. 누가 뭐래도 다 제가 읽은대로 기억하니까.. 엉뚱한 소릴 저렇게 하는 거예요ㅋㅋ 그래도 보바리가 더 좋은데, 저는 프랑스 작가가 좋아요. 다 비슷한 시절에 읽어서, 제가 쓸 때의 뜻은 김화영 쌤의 번역이 아름답단 얘기를 하는 거였을 거예요, 아마도.

로렌스는 저기 위에 [아들과 연인] 좋대요. 한 5년 전부터 보려던건데ㅎㅎ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추천해줬어요. 근데 뭐가 좋다고는 말을 안해줬는데..(안 좋으면 어쩌지..)

아니에요, 고장난 동안 못본 드라마 엄청 다운받고 있는 거예요. 아몬드 먹으면서요ㅋㅋㅋ

2012-08-22 0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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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2 0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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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2 0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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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2 0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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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8-23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 좋아하시는구나..좋아하실 수 밖에 없나? ㅎㅎㅎ
전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살아서 자주 바닷가에 놀러갔었는데 물을 무서워해서 그런지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예요. 넘실대는 파도가 배 위까지 차 오르면 그때부터 숨쉬기가 곤란해져요.
해산물을 좋아하지 않는 식성도 한 몫 할지도 몰라요. 바다 내음 나는 식품은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언젠가 포항과 부산의 도심을 걸은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화려한 도시 가운데서도 바다 냄새가 난다는게 너무 신기했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난 바닷가 도시에서는 살기 어렵겠다...는 생각도..ㅎㅎㅎ
하지만 여행은 좋아요!

벌써 1년이네요! ㅎㅎ

아이리시스 2012-08-23 16:29   좋아요 0 | URL
바다 자체보다는 바다의 상징을 좋아하는 걸 거예요. 농촌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은 도시의 편리함에 길들여지면 농촌의 한적함보다는 불편함만 눈에 들어오니까 좋아할 리가 없는 것처럼, 알기 때문에 로망도 있고ㅎㅎㅎ 예를 들어, 지금 그린란드나 노르웨이나 덴마크나 스웨덴이 그냥 북유럽으로 묶여 기억되는 것처럼.. 근데 저는 여러 바다를 알고 있으니까 바다마다 다 특색이 있는 것 같고..물놀이는 해본 적이 없는데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단막극을 잘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현맘님 들통 많이 났어요. 수영도 못하고 해산물도 안 좋아하시고! (저랑 똑같아요ㅎㅎ) 저는 원래 가리는 음식, 잘 못먹는 음식이 많은 편인데(글쎄, 그렇더라고요) 부산사람이 회나 조개구이, 해산물 못 먹는 건 외계인 같다면서요. 저는 그거 다 잘 못 먹어요. 먹는 유일한 해산물 아니 음식이 미역국.. 미끌한 거 싫은데 그건 맛있더라고요ㅎㅎㅎ 심지어 조개 넣으면 한 알 맛까지 기억해요. 싫어ㅠㅠ 이건 제가 한 수 위일 걸요. 조개국물맛이 다들 시원하다고 하니까.. 이 얘기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콩밥이 싫은데 엄마가 자꾸 콩을 넣으려고 하셔서 맨날 싸우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하기 전에 얼른 쌀 한바가지 퍼서 현미밥 해놔요. 007작전...ㅎㅎㅎ

아~ 그런데 정말 도심에서 바다냄새가 나요? 저는 자갈치나 송도 바닷가 정도에서 그걸 느껴요. 근데 거긴 수산시장이 있는 곳이니 당연한데, 타지역 친구들이 부산역에서 내리기만 해도 그렇다고 해서 이해를 못해요. 하긴 우리집에서도 베란다너머로 바다가 훤히 보이는 곳이니, 못 맡는 거지 안 난다고 하기도 어렵겠어요.

벌써 1년은 세계지도 후 1년을 말하는 거죠? (그때 주신 스케줄러는 아직도 잘 모시고 있는 중임)

저 어릴 때 강릉하고 정동진 차례로 찍었는데 좋던데, 사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바다풍경 중 하나가 해운대예요. 시끄럽고 정신없고 부딪치고 온갖 주점에다가..글쎄, 해운대 뒷골목에는 창녀촌도 있어요!

p.s. 이거 무슨 초딩 편식일기 같아요ㅎㅎㅎㅎㅎㅎㅎ

cyrus 2012-08-23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좀 어렵네요. 우리 집에 있는 민음사시리즈 세트에 있긴 한데, 과연 이 책을 언제 읽을 수 있을까요??
ㅎㅎㅎ 원래 여름방학 때 민음사 세트 완독 목표였는데 공부와 다른 책들에 치이다가 읽은게 별로 없네요.
그나마 읽은 게 고작 <설국>뿐이에요 ^^;;

아이리시스 2012-08-27 01:36   좋아요 0 | URL
이 책 이제 더 읽기 싫겠죠? 모르고 도전하면 나은데, 알고나면 더 힘들잖아요.

책읽기가 원래 꼬리에 꼬리를 물기 마련이라 확 쏠릴 수밖에 없잖아요. 저 지지난달엔가 세상에서 읽고싶은 책이 [십자군 이야기] 뿐이었거든요. 책만 사놓으면 안 좋은 게 사놓고 묵히다 신간가격으로 산 게 구간에 팔리고 있으면 언제부턴가 짜증스러워서 꼭 읽고싶은 것만 사기로 했는데, 그걸 하루이틀 묵히다 구입을 한 달 딱 늦췄더니 관심이 싹-하고 날아갔어요. 저는 이 정도-ㅎㅎ

언젠가 다시 보긴 하겠지만 다시 전쟁이나 세계사에 미쳐있을 때여야겠죠. 시루스님은 책 엄청 읽으시더만..^^
 
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이 파묵의 첫 타자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처음에는 몰랐고,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파묵이라는 생소한 터키 작가를 알게 한 노벨상의 존재를 고려했다면 그가 노벨상 수상 '이후' 출간한 이 책을 시작으로 삼는 건 어쩐지 반칙 같은데 이미 읽은 거 물릴 수도 없고 그래서 일단 시작을 되짚어보면, 날 혹하게 했던 '순수박물관' 이벤트가 있었다. 핑크색 글씨 속 이벤트 당첨자 명단 열 번째에 운좋게도 내가 있다. 나는 이제 다른 책을 구입하면 된다. <하얀 성>이라든가 <눈>이라든가 시린 겨울의 찬 온기를 마구 뽐내는 그런 리스트로 말이지.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

 

때맞춰 찾아온 이벤트에 읽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서 결제하고 기다리는 즐거움을 잃었다. 책을 받았다. 내게는 터키어를 전공한(정확히는 중앙아시아어다) 친구가 있고, 이스탄불이 낯설지 않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두 문화의 빼어난 점만 간직한 도시라고 터키를 방문한 이들이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묵이 그리는 이스탄불의 1960년대 풍경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문화적인 면에서 여자에게 기대되는 첫경험이나 순결같은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이 소설의 주인공 케말이 이스탄불의 상류층 서른 살 청년이기 때문에 내가 보고 있는 이 배경이 이스탄불의 보편적 모습인지 잘 모르겠는 것만 제외하면 소설이 향하는(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완벽하다. '사랑'이다. 그것도 44일 사랑하고 평생을 찾아헤매는, 영원에 걸친 어느 남자의 어떤 여자를 향한 사랑이다. 다소 이질적인 터키식 이름이 집중도를 흩트리지만 마르케스만 할까, 제자리를 찾는 순간 곧 빠져든다. <순수 박물관>은 마법같다.

 

케말은 시벨과 결혼할 예정이다. 좋은 집안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은 요조숙녀로, 꽉 막히지는 않은(그러니까 순결을 고집한다던가 하지 않는) 현대적 여성으로, 집안에서도 기대를 한몸에 받는 커플이다. 그가 이뤄온 것만큼이나 그녀와의 미래가 탄탄할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먼 친척뻘인 이모(고모)의 딸 퓌순을 만나면서부터다. 열 두 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수줍으면서 강렬한 그녀의 매력에 하염없이 빠져들어간 그는 용기를 내보기도 전 이미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 침대로 간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먼저 서로를 지배한 것. 그는 그 여자를 가졌지만 계속 갖고 싶어하고(잠자리 몇 번 한 걸로 여자를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지만, 누구를 알기 위해선 늘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침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벨과의 결혼을 깨거나 엎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쁜 놈. 안정된 결혼과 끌어당기는 강렬한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곧 시벨과 결혼하여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녀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모른 채 초대장을 보낸 그는 결혼식 이후 다시는 퓌순을 보지 못한다.

 

퓌순을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되고나서야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깨닫는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저울질해서는 안되는 감정이었다는 걸 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사랑은 늘 끝났기 때문에, 잡을 수 없어서 더 간절해진다. 이스탄불에 있는 순수 박물관에 대해 말해보자. 파묵은 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실제 박물관 개관을 계획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한 배경과 소품, 케말과 퓌순의 사랑을 매개하는 것들을 직접 수집해 오브제로서의 박물관을 꾸렸다. 그리고 개관했다. 소설을 읽고 방문한다면 박물관에서 그들의 사랑흔적을 찾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모든 것이 있어도 케말과 퓌순은 없단다. 아쉬운 소식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물관은 지금껏 천안에 있는 '독립 기념관'이었다. 커서는 못 갔지만 어릴 적 몇 번의 기억만으로 시대별, 주제별로 번호가 붙어있어 하루종일 관람해도 끝까지 가기가 벅찬 이곳은 환상적이면서도 아팠던 어린 시절 가장 큰 아이러니였다. 독립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세월은 누군가에게 눈물이었을텐데, 아픔을 재현한 곳에서 나는 즐거워하다니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었다. 순수 박물관을 방문하는 자국인들의 마음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곳은 역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사랑'을 담은 곳이자, 지나간 시대의 터키문화를 한눈에 전시한 곳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묵의 <순수 박물관>의 오브제를 전열한 공간이지만 말이다.

 

예전에 전경린은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이란 소설에서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이 헤어지면 함께 나눈 '사랑'은 다 어디로 사라질까 궁금해했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잃어버린 내 순수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다시 오는 게 진리지만, 한 번 잃어버린 순수는 곧 과거와도 같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그걸 알고 있다. 오늘이 내일이 되는 순간, 오늘의 순수는 내일 속에 없다는 것을. 지금도 케말이 찾아헤맨 것이 오로지 퓌순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는 결국 잃어버린 자기 사랑과 용기내지 못했던 비겁함과 돌아오지 못할 과거의 순간을 평생토록 찾아헤맨 게 아닐까. 어떤 한 존재가 오로지 다른 한 존재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30년간이나 찾아헤매는 일이 가능할까. 늘 과거를 되새김질했지만 과거가 다시 오길 바라서는 아니었다. 시간은 수평선 위에 있지만 나는 뒤로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선을 일평생 살아간다는 걸 가장 잘 받아들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썼다. 파묵은 이렇게 우리의 지나간 모든 시간들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기도 하니까.

 

시간은 돌아온다. 기다리지 않은 건 우리다. 순수는 그대로다. 변해버린 건 우리다. 시간이 우릴 변하게 했다고 투정하지만 우린 그저 스스로 혹은 각자가 변하고 싶었기에 변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박물관은 시간을 멈춘다. 변한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것처럼, 도시 곳곳에 우뚝 서서 우릴 위로한다.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순수 탐험이 책을 덮으며 나는 조금 슬펐다. 눈처럼 맑고 깨끗했던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어땠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순수는 박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박물관은 존재의미를 갖는다. 내가 어떤 시대를 여전히 그리워하거나 영광스러워하거나 아파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박제된 채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케말에게 퓌순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자길 기다릴 그런 시간의 또다른 이름 아니었을까. 그게 아픔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영광이든 그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스탄불을 생각하면 이 여름처럼 습기차고 뜨거운 태양 아래 작은 방 어느 침대 위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하며 땀을 흘리는 남자와 여자가 떠오른다. 그곳에 훗날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 따위의 계산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박물관에는 전시되어야 할, 소중히 이름붙여진 그것들만 자리한다.

 

과거에도 내가 있고 미래에도 내가 있다. 늘 지금 뿐이라는 건 너무 가혹한 오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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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8-1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 박물관은 아직 안읽었지만..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었어요.
마르케스를 언급하셔서 생각난 건데, 어쩌면 이 소설과 콜레라시대의 사랑.을 함께 읽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르한 파묵에 대한 관심이 아직 끊어지지 않으셨다면 검은 책. 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그건 정말..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의 전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리시스 2012-08-19 00:19   좋아요 0 | URL
오, 드림아웃님 특별추천리스트입니까? 그렇잖아도 워낙 많아서 다음은 뭐가 좋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잘 골라야 할 것 같은 본능적 감이 왔거든요. 호불호도 갈릴 것 같고 작품 편차가 있을 것 같고 아직 터키의 매력을 잘 모르겠어요. <검은 책>을 꼭 다음 타자로 삼을게요.

근데 안그래도 [콜레라-]를 읽기 시작했거든요. 완전 신기하네요ㅎㅎ 통한 건가..( '')

cyrus 2012-08-18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오르한 파묵 읽기 첫 소설이 <순수 박물관>이었어요. 처음에는 두 권짜리를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줄거리가 너무 좋아서 끝까지 완독한 기억이 나네요, 한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의 순수함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딱해보였어요. 시간 나면 또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

아이리시스 2012-08-19 00: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남자 주인공이 그렇게 감성주의자로는 안 보였는데, 그 사람이 찾던 건 퓌순 뿐만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당연하겠지만. '사랑'이라는 그 순수한 본연의 대상을 평생토록 찾아나선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이 좀 애틋하게 느껴지긴 했어요.

시루스님은 또 다른 작품 뭐 좋았어요? (의견모집중)^^

댈러웨이 2012-08-1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 박물관 두 권 짜리였어요? ㅠ.ㅠ
오르한 파묵은 정말이지 전작하고 싶은 작가에요. 때가 되면 날 잡아서 다 읽을 거에요, 반드시,라고 말은 하지만...

아이님, 마지막 긴 두 문장, 오래 읽었어요. 저런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남녀간의 케미스트리는 원래 그런거에요. 알잖아요. ( ")



아이리시스 2012-08-19 00:0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순수 박물관'이 파묵의 넘버 1,2,3는 아닐 것 같아요. 뭐 쓰리쯤에 넣어줄까....요?
작품들이 각각 편차도 있을 것 같고, 상이한 매력이라 어쩌다 가끔 발이 푹 빠지기도 할 것 같아요.

다음 작품으로는 그..댈러웨이님 서재에서 본 한 권이랑 드림아웃님 추천작으로 볼 겁니다!
(저 사야될 책 천지군요!)

그래도 다시 선물받은 [롤리타] 하고 전자책에 든 [콜레라-]랑 [채털리-] 꺼내오는 참인데.. 나 책은 더 필요없어요. 후훗.( '')

2012-08-18 2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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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0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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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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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0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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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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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7: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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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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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7: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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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2012-08-2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이름은 빨강>을 인상깊게 봤는데 <순수박물관>은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기간이 지나 반납한 슬픈 역사가..ㅜ
담번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그런데 <검은책>을 먼저 읽고 싶은 건 또 뭔지!ㅋㅋ

아이리시스 2012-08-21 17:20   좋아요 0 | URL
순수박물관까지 자국에 턱 지어놓은 파묵이 부러워요. 내이름은 빨강은 썩 끌리지가 않다가 반값할 때 책사는 것도 놓치고.. <검은 책>이 한 권짜리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
 
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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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할 것 같은 건 사르트르가 아니라 나였다. 백지연을 좋아해서 샀던 자기계발서(크리티컬 매스)에는 늘 15도까지만 끓어오르라는 얘기가 반복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14.9999999도에서 포기할 때 나만이라도 0.1111111만큼만 더 끓어오를 간절함과 끈기와 몰입을 가지라고. 몰라서 그런 게 아닌 거잖아. 나는 그 책을 던졌지만 의미를 잃어버린 건 아니었다. 스물 아홉과 서른이 내게는 그다지 벅차지 않았고, 평균수명과 절명 사이에서 방황하며 살아갈 일이 더 많이 남은 걸 저주했다. 자기만의 세상에 방을 만들고 들어가 끝내 스스로를 죽이는 간절함을 이해했다. 나는 다만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그래, 지금껏 내가 살 수 있었던 건 용기가 조금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 책은 5년 전 영국 드라마 [스킨스]를 보면서 처음 읽으려고 했었다. 거기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존재를 증명해야 할 기로에서 정신착란을 겪고 있었다. 꿈을 찾아야 했고, 세상을 전복시키려 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오면 약과 춤과 자기학대에 골몰했다. 처음에는 퇴폐적이었다. 영국은 무겁지만 어두운 곳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영국 드라마를 배운 나는 BBC 뉴스보다 먼저 그 어린 주인공들이 생각난다. 자기 삶 앞에 제대로 존재하기 위해 애썼던 어린 영혼들 말이다.

 

대학 졸업 때까지 내가 욕심낸 전집은 카뮈 뿐인데, 내 20대 안에 카뮈의 사유와 게바라의 용기만 있다면 뭐든 할 것 같았는데, 카뮈만 책장에 나란히 있으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것 같았는데, 그의 도시 알제와 프랑스면 그토록 황홀한 여행이 또 없을 것 같았는데, 성큼 다가왔다. 내가,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사르트르가, 사르트르의 사유가, 사상이, 그가 세상에 뱉어논 <구토>가 구원 같았다. 이 책을 보부아르 두 권(위기의 여자, 제2의 성)을 읽고난 이후 다시 읽을 거란 생각은 못했다. 이토록 버겁고 무겁고 아픈 내가 존재의 증명인데, 얼만큼 더 실존의 증명을 배워야 하는지 궁금했다. 구토는 구토를 유발할 뿐, 읽어낸다 해서 그 속에 답이 없건만, 어리석은 나는 답을 구하려 했다. 내민 손이 하염없이 부끄러워졌을 때 그때 깨달았다. 내가 타고 있는 롤러코스터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사르트르에 답은 없었다. 그는 단지 그 사실을 전했다. 책 안에는 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내가 갖고 싶은 것에는 형체가 없었다. 아니 불분명했다. 그때마다 구토가 일었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끊었다. 술에는 그래, 말하고 싶지 않은, 말하지 못하는 아픈 추억이 많다. 그 시절 나는 외롭지는 않았지만 지독히 무서웠다. 그러나 잘 살고 싶었다. 자존심과 고집과 나르시시즘까지 고수해온 모든 것들이 차례로 구겨지고 접힐 때, 울지 말아야 할 곳에서 주저 앉았다. 책은 멀어졌다. 20대의 절반은 그렇게 책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읽었다고 했지만 충분하지 않은 걸 아는 건 나 뿐이다. 섹스와 마약에 쩔어있지도 않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대상도 없이 미쳐있었던 모든 찬란했던 순간을 이제와 책에 양보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는 그렇게 혼란으로 겨우 덮었는데 올해 맘 먹은 책 네 권(삼십세, 시지프스 신화, 벨자, 구토)을 서른(만으로는 여전히 이십팔세다)이 절반 남은 시점에서 시작하며 나는 좀 성숙해졌다(고 믿고 싶다). 바흐만을 가르쳐준 친구가 있다. 20대 내내 오래 파리와 서울을 오간,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한숨도 안 자고 일큐팔사를 단숨에 읽어내리던, 실비아 플라스 같은 예민함으로 세상을 견딜 듯했던 친구가 있었다. 전공이 불어였고 파리를 사랑했다. 그애 20대의 절반은 파리였다. 어쩌면 절반보다 더 긴 시간을 파리에서 살았다. 한동안 그를 좋아해서 때로 나는 탐정이 됐었다. 그애가 그의 여자라고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탐정놀이는 생각보다 미련하지 않고 집착스럽지도 않고 포기도 빠른 내 덕으로 오래가지 않았다. 내게 파리의 모든 문학과 예술은 그애로 귀결된다. 무엇을 더 알아야 할까. 이 나이에. 더 알아야 할 게 남긴 했나. 마음이 둔탁해지고 못 가진 것만 보이고 닿지도 않을 질투를 시작한다. 5년 전이었다면 '좋아해요'라고 단숨에 고백했을 것이다. 싫은 티를 숨기기 보다 좋은 티를 숨기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스무살에 이미 배웠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는데 모두 알고 있던 마음보다는 크고 싶었다. 숨기기의 달인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말할 용기 아니 용기를 가질 거란 욕망조차도 잃었다. 어른이 되려는 것일까. 어느 순간 가는 세월을 더는 붙잡지 못할 걸 알았고, 더는 물을 것도 구할 답도 없으니 제발 이 착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고작 그것만이 아니, 그것조차도 불가능할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과거의 일이다. 현재의 일이기도 하지만 무시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니까 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내 맘을 알아채는 일도 없겠지. 그저 왜 이 순간 내쳐야 했는지, 이제 날 잊었는지에 대해서는 혼자만 생각할 것이다. 미지의 공간에는 아무도 들여놓지 않을 것이고, 달래기 위해 바흐의 칸타타 속으로 침잠할 것이다. 태양이 작열하고 아스팔트가 끓어오르는 아픈 여름에는 아무래도 고백할 수가 없다. 가을이나 겨울이었다면 시끄러운 명동 어느 거리에서 네 손을 잡을 수도 있었을지 모르는데. 사르트르는 오래도록 잊고 있던 묘지기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 때문에 모든 여정을 시작했지만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가 안내하는 파리관광을 고스란히 답습했던 그 여정은 돌아와서야 실망스러웠지만 괜찮았다. 가보지 못한 몽파르나스의 묘지, 그곳에 시대를 앞선 결혼생활을 했던 유명한 지식인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고 처음 알려준 그녀를 다시 볼 일은 없다. 다만 이 모든 상황이 구토스럽다. 차오르는 말을 삼키는 것이 어른이 됐다고 믿는 이것이, 그저 몸이 아프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자위하는 이것이,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시간들의 반증이다. 지나간 시간은 없다. 다가올 시간도 마찬가지다. 나는 혼자다.

 

하루, 일생, 지구, 우주. 네 가지 테마로 시간(Time)를 설명하는 BBC 다큐를 틀었다. 이토록 그대로인 나를 자꾸만 다른 무엇이 되도록 강요하는 '시간'이란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시간에 얽매이는 삶을 살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시간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주진 못할 터였다. 아무 것도, 그 무엇도, 나를 해갈시킬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불안하게 내 머리 위로만 내려앉는 것 같을 때에는 늘 그랬듯 방법이 없다. 쌓인 신문에서는 종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으르릉대며 싸우고, 간혹 감동적인 사연이 살아가는 이유를 챙겨준다. [신의 퀴즈]의 어느 주 에피소드는 환각이었다. 독성을 가진 식물, 서서히 파괴하는 식물, 치유하는 식물 등 식물들의 세상도 인간사와 같다. 도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필요한 것과 필요악, 쓰잘데기 없는 것, 나의 무엇을 긍정하고 또 무엇을 부정할 수 있을까. 어떤 식물은 그 향에 노출되면 환각을 보여주는데, 환각 속에서 평소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본다. 지금 그 향에 중독된다면 나는 또다른 나를 볼 것 같다. 바닥에 가라앉은 절망과 고독과 질투와 시기, 그런 것들과 마주할 것 같다. 처녀귀신 보다 악마보다 사탄보다 강시보다 훨씬 겁날 것 같다. 알제리의 독립을 적극 지지해 드골과 대립각을 빚었던 사람, 나처럼 남쪽 항구도시에서 살았던 사람, 보부아르와의 결혼생활에서 보통(대부분)의 남자들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들)를 과감히 내려놓고 삶의 동반자이자 지식인으로서 그녀를 인정했던 사람, 그 무엇보다 자유를 우선했으면서도 책임을 잃지는 않던 사람, 누군가로부터 본질을 결정당하는 게 싫어 노벨상 수상마저도 거부했던 그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내'가 구토라고 말했다. 존재 자체가 구토라고. 존재는 구토를 견디며 앞으로 가는 거라고.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라는 귀중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거나 마시고 있지만, 존재하는 데는 어떠한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p.209)

 

로캉탱이 사르트르의 페르소나란 걸 부정할 수 없다. 철학교사, 역사연구가, 항구도시 르 아브르, 연금자, 구토자, 내면 연구자까지 로캉탱의 내면은 사르트르의 그것과 닮았다. 아무리 남의 의식이라지만 따라가는 입장이 만만찮다. 어려우면 내면에 처박히든지 외부로 시선을 돌리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자. 외부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내면으로 끌어안아 죽음을 생각할 필요는 없을테니까. 어긋난다면 차라리 죽어버리자. 극단을 택하란 말이다. 소멸시키고 다시 쓰자는 말은 과거를 보지 않겠다는 뜻이다. 당신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네가 그렇듯 너의 옛날에 나는 관심이 없다. 내 이전에 이미 이름 붙여진 것들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 연애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이 쉽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사물은 그로테스크하고, 고집이 세고, 거인같이 거기에 있다. 그것들을 의자라고 부른다든가, 또는 무엇이든 그것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려는 짓은 바보 짓일 것이다.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 혼자서 말없이, 아무 방비 없는 나를 사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밑에서, 뒤에서, 위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다. 사물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강요하지 않는다.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의자 쿠션 밑 나무틀에 한 줄기 어두운 선이 닿아 있다. 그것은 신비스럽고 장난꾼 같은 모습으로 거의 미소에 가까운 것을 띠고 의자를 타고 뻗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미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한다. (pp.234-235)

 

환각은 계속된다. 이런 방법으로 사물을 계속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를 부정하지 않은 채 세상을 부정하려 하고, 이해되지 않는 관념을 이미지로 환기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진정성 결여의 체험이다. 사르트르는 로캉탱이 되어 만나는 모든 등장인물을 전복시킨다. 옳다고 생각했던 윤리도덕적 휴머니즘에도 구토한다. 읽는 나는 무력화된다. 무엇이 구원이고 절망이며, 왜 어떤 것은 잠재적인 반면 어떤 것은 발화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밤 이름이 없고 그러므로 부재한다.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이 속절없는 미친 짓으로 자각된다. 누구나 두 가지(선과 악) 모습을 가졌으면서 왜 어떤 사람은 선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악이라 하는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누구인가. 이 순간에도 나는 내 모습이 어떨지를 걱정하고 있다. <구토>는 서울대 추천 고교 필독서다. '고교'생은 무얼 느껴야 할까. 당시의 내가 아니 내게, 사르트르가 있었다면, 홀든이 있었다면, 나는 내 좁은 방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을까. 제도와 관습에 꽁꽁 묶인 학교를 박차고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었을까.

 

혼란이 술주정처럼 발화하다니, 지금 나는 낭패라고 생각하고 있다. 길어지는 건 생각이 많았다는 증거이자 무슨 생각하는지 몰랐다는 반증이다. 나로서는 이 글을 간추려볼 엄두도 내지 못하겠다. 사르트르는 글이 아니라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의식과 사상의 흐름이 이토록 멋지게 형상화된 글을 나는 처음 읽어본다. 이 순간에도 나는 진정성을 잃었다. 환각상태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는 대화가 없다. 고통이 없고 공감이 없고 간절함이 없다. 내 안에 나는 존재하는가. 얼마나 더 서로에게 상쾌한 바람일 수 있을까. 부르고 부르다 지쳐 겨우 들려오는 메아리에도 귀기울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권태는 만나지 못한다. 내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 시대에 사랑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 이 계절에도 사랑할 수 있을까. 난 이렇게 뼛속 깊은 곳까지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미치도록 화사한 오늘같은 여름날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니. 청춘과 빛과 희망과 행복을 말하는 모든 것들을 불살라야 한다. 아니면 거창한 사랑을 시작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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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07-23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스파게티 잘 만드는데, 마늘 빵 옆에 구색 맞춰서 두고, 또 적포도주도 한 잔 있으면 더 좋겠고, 그래서 같이 밥 먹어요. 말은 안 나누는 게 더 좋겠네.

(아 이 피하고 싶은 첫 댓글을 또 달게 하시는구먼요.)

아이리시스 2012-07-23 22:48   좋아요 0 | URL
첫 댓글이 아니라 유일한 댓글이에요. 댓글이 하나 뿐이야ㅜㅜ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사르트르한테 있긴 하지만요. 저 지금..<공산당 선언> 읽다가 엄청 좌절모드 됐어요. 벼르고 벼르다 자신있게 샀는데.. 마르크스는.. 이 나이에도 안 읽히는 겁니다ㅜㅜ

스파게티는 다이아몬드값을 치러야 먹을 수 있겠어요. 우리의 물리적 장벽이ㅜㅜ 거기다 경제적 장벽도ㅜㅜ 마늘빵도 댈러웨이님이 직접 구워요? 적포도주도 직접 담가요? 그럼 어디 먹어볼까?!ㅋㅋ 저는 늘 말을 해야했어요 :)

하지만 말은 안 나누는 게 더 좋겠어요222

댈러웨이 2012-07-24 14:34   좋아요 0 | URL
아이 참, 미안해요. 또 무플권장 댓글이 되어버렸어요. 또 비글로 돌려야 하나.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07-25 01:03   좋아요 0 | URL
푸핫, 괜찮아요, 댓글이 다섯 개니까요ㅜㅜ

알로하 2012-07-2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름에 도전하기엔 왠지 어려울 것 같아요.ㅠㅠ 사르트르, 가까이 하기엔 너무 복잡한 당신! 전 계절탓을 하며 추워지면 읽어보렵니다ㅋ

아이리시스 2012-07-25 01:05   좋아요 0 | URL
전에 몇 번 포기하고 또 도전하고 하는데 그..의식의 흐름을 좀 따라가고 싶은 타이밍이 있어요. 타이밍을 잘 잡으면 보부아르도 참 재밌고 그럽니다, 알로하님. 하지만 다른 작품은 당분간 안 읽는 걸로.

진짜 재밌는 것도 짜증나요ㅜㅜ 너무 더워요ㅜㅜ

2012-07-24 14: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5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5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5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태 2020-03-20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 언저리에 남긴 주절거림이 이렇게 시간이 지나 다른 사람에게 닿았습니다. 거침 없이 쓰였으나 기어코 끝까지 내려보게 만드는 이유는 선명한 문장 때문인가요, 나도 구역질을 느끼기 때문인가요. 8년이 지난 당신은 어떤 모습인지 묻고 싶습니다. 많은 것을 잊으셨나요, 아니면 저 언저리에 오랫동안 떠돌 운명을 예감하고 계신가요, 말이 필요없나요.

아이리시스 2020-08-28 22:20   좋아요 0 | URL
여전히 거기, 계신가요. 알라딘에 가끔 오나요? 저는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순응했고 많이 가라앉은 일상을 살아요. 다신 서른 언저리에 했던 생각들로, 저로 돌아갈순 없을 것 같아요. 지금도 꽤 괜찮거든요 : )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별을 스치는 바람 2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한 권의 책에 대해 정성껏 혹은 혼을 다해 말하는 일이 어느새 좀 어려워졌다. 쉽게 읽기와 단편적 쓰기만 가능하다. 읽기와 사색, 글쓰기 사이에서 방황하며 줄세우려한지 한 해 두 해도 아니지만 그동안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왜 읽는지마저도 희미한 상태로 앞으로 나아가려 발버둥쳤다. 시간이 멈춘다. 문장과 책으로 쌓인 벽이 허물어진다. 이 바람을 타고 식민지 청년들이 목숨처럼 읽었던 모든 작가와 책들이 불어온다. 어쨌든 작가 이정명이 윤동주를 말한다면 그건 반드시 읽어야한다는 뜻이다. 윤동주의 시(詩)에도 생(生)에도 관심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뜻이며 당장 만나야 한다는 뜻이다.

 

언젠가 <절정>이라는 특집극을 보고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시인에 대해 썼었는데 이 삶은 그보다 더 무겁단 말인가. 아는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다행인가. 시를 읊조려본다. 그는 스물 아홉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두 시인의 삶이 다르지 않다. 시작부터 먹먹하다. 또 이 시대인가.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삶은 더 팍팍하고 더 불꽃 같고 더 짧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던 그는 이제 없다. 잔혹하고 끔찍한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일제의 만행과 생체실험, 그의 마지막 1년을 그려내는 이 소설이 소설이 아니라서 막막하다. 읽을 수 있을까. 그의 삶을 끌어안기에 이 계절과 시대가 가혹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序詩))

 

돌아보고 싶지도 않은 형무소, 삶 뒤에 남겨진 것들의 헛헛함과 팍팍함, 무겁고 퀴퀴한 공기가 전부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날선 짐승처럼 고독했던 한 간수(스기야마 도잔)가 1944년 겨울 어느 날 나체로 천장에 목매달린 채 발견된다. 징병되어 형무소로 온지 3개월 된 신참 와타나베 유이치에게 그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밝혀내라는 은밀한 지시가 내려지고,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앳된 소년의 형무소 구석구석 탐험기가 시작된다. 슬프고 우울하고 고독하고 미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제3수용동에는 악질 중의 악질로 손꼽히는 조선인 죄수들이 산다. 그들이 대단한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제 나라를 찾겠다는 투쟁이 겁나 제국 스스로가 이름 붙인 것이다. 모든 기록과 서류를 검토하던 와타나베는 거칠고 난폭한 최치수 일당을 스기야마의 살인자로 내정한 다음, 그의 삶과 수감생활을 하나하나 캐지만 전쟁통의 여느 인생이 그렇듯 뭐하나 뚜렷한 게 있을 리 없다. 수용동 내의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사실로 쓰여진다. 불리한 진실은 소각되고 유리한 진실이 탄생한다. 다만 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차례로 소동을 일으켜, 들어간 지 3일이면 영혼마저 잃어버린다는 독방으로 기어들어간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눈여겨본다. 최치수에게 다가간 와타나베는 스기야마와 최치수 본인에 대해 묻고 들으며 전쟁을 나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영혼마저 내놓은 간수 스기야마의 삶과 죽음에 대한 조각난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간다. 그러던 중 간사한 기회주의자 소장에 의해 살인자는 최치수로 낙인 찍힌다. 그는 없는 죄를 인정한 채 사형당한다.

 

누구의 삶이 더 가엾고 슬픈지 논하기에는 시대가 어지럽다. 전쟁에서 승리국이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일본국과 다른 나라들. 가해자가 누구고 피해자가 누구든 전쟁 안에서 영혼을 잃어가기는 매한가지다. 영혼을 잃으면 곧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와타나베는 마흔이 넘은 스기야마의 고독한 생과 마지막을 추적해가는 한편, 최치수를 비롯한 조선인들에 대한 엄청난 소음을 듣는다. 그는 헷갈린다. 혼란스럽다. 시와 문장과 별과 책을 사랑하는 민족, 힘겨운 노역장에서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늘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미소마저 띄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나중에 모든 것이 꿈과 희망을 나누는 시간이었다는 걸 안 순간 그는 전율한다. 영혼까지 하얗던 민족, 전쟁의 적국이 아닌 식민국임에도 제국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민족, 조선인들의 모든 문장과 시, 책의 중심에는 매순간 히라누마 도주(윤동주)라는 인물이 존재했다.

 

이 이야기는 혹독하게 스러져가는 전쟁중의 어느 형무소에서 스기야마 도잔이라는 한 일본인 간수의 영혼을 구원한 조선인 시인에 대한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뉠 수밖에 없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문장'과 '시(詩)'라는 빛으로 슬프도록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던 한 남자와 한 남자의 뜨거움에 관한 것이다. 글이 뛰어난 동주는 온 편지가 검열을 당해 자신들처럼 이 형무소 안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소각될 때, 서러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종이 위에 쓸 줄 알았다. 독방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하염없이 두드리던 최치수 일당은 유약한 외모 속 강인한 생명력을 먼저 알아보고는 음모에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동주는 굴복하지 않는다. 아니, 그의 동조는 목적은 같되, 방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를 바보라 놀리던 최치수가 어느새 동주를 맹신해 저지르지 않은 죄를 모두 인정하고 떠날 만큼 제3수용동의 동주라는 인물은 크고 빛났다. 자기가 가진 모든 빛을 동주에게 얹어주고 떠난 최치수도 마찬가지였다.

 

동주는 수감동 안 모든 죄수들이 눈물로 쓴 편지를 소각되지 않도록 대필했고, 이를 세상으로 내보낼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스기야마였다. 뼛속까지 악마인 줄로 알았던 스기야마는 날마다 날아드는 동주의 편지글 속에서 봐서는 안될 것을 본다. 두 영혼이 통한 것이다. 그것은 금기시 된 영역이자 지양되어야 할 우정이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희미한 문장과 시로서 우정을, 영혼을, 전쟁을, 이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나누고 이겨왔다. 스기야마는 동주의 천재적인 시적 재능을, 동주는 스기야마의 악마 같은 외면 속에 가려진 전쟁의 상처와 개인적 나약함을 통찰했다.

 

수용동 안에 들어온 제국병원 의료진과 미도리라는 간호사, 간호사가 연주하는 오래된 피아노, 형무소 안의 유일한 꽃과 희망이던 피아노 반주 맞춰 노래하는 성가단은 조선인을 비롯한 모든 수감동에서 '별'처럼 여겨지는 죽지 않은 하나의 인간성이다. 누구도 말살하지 못할 내면 깊은 곳의 순결이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고문과 매질로 독방 생활을 자처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무엇 때문에 동주는 하루하루 쇠약해져 갔다. 그즈음 이전까지는 없던 의료진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잊혀져가는 기억과 가눌 수 없는 육체, 잃어가는 영혼을 두눈으로 확인할 뿐인 일련의 일들로 스기야마는 갈등한다. 소각해야 할 시(글)와 더 깊이 탐구하고픈 시(글) 사이에서 고뇌하는 스기야마는 나중에 와타나베가 그런 것처럼 동주를 감싸고 보호한다. 죽음을 막아주고 시를 쓰길 부탁했으며, 살아남길 희망했다. 하지만 이들의 간절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은 서서히 부서진다. 단 하루라도 조국으로 돌아가 햇살 아래 바람을 맞으며 별을 바라보고 싶었을 이들의 한숨과 눈물과 희망이 행간마다 너울댄다. 꿈처럼 아득하다. 돌아오지 못한 영혼이, 말살되어간 육체와 영혼과 모국어와 문장들이, 자신이 쓴 시로 단 한 권의 시집을 출판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냉전시대에 희생당한 청년의 꿈이 바스러져 간다. 문장과 단락과 페이지마다 살아숨쉬는 이들의 영혼이 아우성치기라도 하는 듯.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아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시는 감동에 감정을 더한다. 릴케와 고흐와 프랜시스 잠과 스탕달과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 <몬테 크리스토>와 <삼총사>를 비롯한 수많은 작가와 작품들이 이 소설을 관통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제3수용동에 수감된 이들에게는 단 한 권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권의 책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하나를 얻기 위해서라면 영혼마저 팔았을 그들에게 책은, 불꽃처럼 사라져가거나 냉혹한 손길에 소각될 가지지 못할 유일한 희망일 뿐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별이 없었다. 형무소 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도 없었다. 안과 밖이지만 전쟁 속에 갇힌 건 같았다. 동주는 단 2년을 선고받았을 뿐인데도 영영 민족과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짐승같은 타국 땅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에 별은 어디를 비추고 있었을까.

 

한 권이 아니, 두 권의 문장 전체가 시처럼 반짝인다. 그들은 죽어 시가 된 것인가. 다소 아스라이 그려진 실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하지만 진짜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 끔찍한 이야기를 언급할 자신이 없다. 와타나베가 밝히고자 다가간 진실은 우리(조선인)만이 피해자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스기야마와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이미 벌어진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란 뭐가 있었겠으며, 있었다한들 가능했을까.

 

살려준다는 의료진 말에 그들은 의무병동으로 옮겨져 주사를 맞았다. 처음에는 약인 줄 알았다. 나중에야 독인 줄 알았다. 어떤 이는 왜 죽는지 모른 채 죽어갔다. 굵은 주사기가 팔뚝을 뚫고 약물이 몸 속으로 흘러들어갈 때, 그가 그것이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짓밟는 거라는 사실과 영혼을 갉아 먹히고 있다는 사실과 곧 모든 시와 기억을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매 순간 가늘게 부서져내린 희망이지만 이 순간에도 희망을 찾아 주사와 피아노 반주의 노래소리를 바꾸었을 그의 마지막 희망이 내게는 다급한 절망이란 게 멀쩡한 정신을 좀먹는다. 밤하늘의 별은 당연한 것이 아닌데도 아이들의 연날리기는 일상이 아닌데도 자라는 풀과 웃지 않는 벌레와 다정하게 자장가를 불러주던 어머니의 목소리와 쓰다듬는 손길은 일상이 아닌데도 모두가 그런 줄 안다. 단 한권의 책을 갖기 위해 지하로 가는 땅굴을 파고, 자유로운 바람과 반짝이는 별 하나를 보기 위해 즉시 총알이 날아와 박힐 상황을 무릅쓴 채 나가려 했던 이들의 시간을 이제와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지 먹먹하다. 내 평온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얻은 게 아니라는 뼈저린 사실을 왜 우린 종종 잊는 걸까. 어째서 더 죽을 힘 다해 살지 못할까. 왜 이루지 못할 일에 매달려 불평하고 왜 바꿀 수 있는 일은 쉽게 포기해버릴까. 암울한 시대도 이용가치는 있다.

 

겨울을 나기만 하면 또 한철을 날 수 있다던 감방 안의 작은 희망, 부스러기를 붙잡고 한마음으로 책과 책을 말했던 민족이 바로 우리다. 이제와서 위기철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잘 써먹는 위기도발, 한국공격(속터지는 독도발언), 내부결집으로 몰아가고 싶진 않다. 피를 갈아채울 순 있어도 그렇다고 출생의 비밀을 가릴 순 없다. 우린 강했고, 타국을 공격하지 않고도 그 누구보다 용기있게 싸워 영혼을 불살라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장렬하게 꺼져간 불꽃 같은 민족이다. 잘못은 글과 말과 조국과 어머니를 가진 민족의 몸과 영혼을 태워 없애기만 하면 깡그리 소각될 거라 믿었던 어리석었던 이들에게 있는 것이고, 비록 수용동 담장벽을 넘지 못했던 초라한 연이지만 연을 만들어 날려보려 했던 이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대서 희망을 탓할 수 없었던 이들은 절망 속에 든 희망을 끌어안고 전사했다. 시는 종이 위에 글로 쓰는 게 아니라, 마음 속에 정신으로 쓰는 것.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고 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일본이라는 제국은 몰랐고, 하얀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민족은 알았다. 그래서 이겼다.

 

바람은 우리가 바람인 줄 모르는 동안에는 바람이 아닌가. 하물며 스쳐지나가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네는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없이 바스러져간 조선인들과 담장 밖에서 그들을 지켜주던 쓸쓸한 별과 갇힌 이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모래와 흙을 하염없이 실어나르던 바람은 모두 우리 편이었다. 육체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은 영원히 조국을 비추고 또 지킨다. 시인 윤동주의 짧은 삶과 남겨진 시는 엄청난 풍파를 겪고 살아남았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여름밤은 책 한 권을 읽기에 지나치게 짧다. 윤동주의 삶은 여름밤에 삼키기엔 너무나 크고 무겁다. 그리고 벅차다. 시가 반짝인다. 문장의 결이 종이 위에 녹아내린다. 그 날 사라진 별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바람과 별과 시가 보일 것이다. 문장은 더이상 그들을 가두지 못할 것이다. 죽음으로 찾은 자유가 오늘 밤에도 그들을 불러내 평소보다 더 밝은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살아있다고, 자유롭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으스러져 울어버릴 것이다. 오늘밤은 어젯밤과 다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시는 새로 씌어야 하며, 이 소설은 누가 죽고 죽이는 지를 떠나 시대의 행간에 숨은 의미를 되새기며 읽어야 한다.

 

그는 만으로 고작 스물 일곱 되던 해 시대를 등지고 조국을 안은 채 수도없이 많은 작가와 책을 탐하고 숨막힐 듯 아름다운 문장을 뱉어낸 천재시인이었다. 소설 속에 아름다운 문장이 쏟아지지만 모든 문장은 이 천재시인의 삶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시(詩)는 가슴에 박혀 마음결을 어루만지는 가장 고결한 언어다. 시는 용감하고 잔인하다. 뒷이야기는 훨씬 더 잔혹하지만 그게 바로 그가 속했던 시대의 유일한 진실이었다. 이토록 쓸쓸한 이야기가 당신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면 이 시대 소설은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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댈러웨이 2012-07-2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의 이 폭탄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저 밖에 없는 것 같애요.
이정명 그렇게 좋아요? 그렇게 단호할 정도로? 품어야 할 작가가 또 늘어난 거에요?

(근데 서재 왜 이렇게 조용해요? 벌써 피서 시즌이에요?)

아이리시스 2012-07-25 00:56   좋아요 0 | URL
피서시즌도 맞지만(쫌 이른데?!) 더워서 피서를 부르는 날씨예요. 폭염이에요. 해운대 바닷가 마실가면 해변의 여인이 되는 게 아니라 인파에 깔려서 짜증만 나는데..

폭탄 에너지!(ㅋㅋㅋ) 리뷰랑 페이퍼를 묵혀서 쓰면 이상하게 길어지네요. 요즘은 쓰다만 게 너무 많아요. 이정명보다는 윤동주가 좋아요. 예술혼이 살아있고, 시대에 시가 어떻게 타인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거든요. 문학전공자나 문학애호가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에요!

소이진님이 없어서 그래요. 이 더운데 어린이 소이진님은 대구에..( '')

맥거핀 2012-07-2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정주였나, 이광수였나, 다른 누군가였나 기억이 잘 안나는데, 왜 친일을 했느냐는 물음에 일본이 그렇게 빨리 패망할 줄 몰랐다,였다죠. 하기는 그 때 많은 지식인들조차도 일본이 그렇게 폭탄 몇 방에 무너질 줄 알 수가 없었겠죠. 그러니 반대로 보면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이 진짜 대단해보이기도 해요. 거의 희망이 없어보이는 일에 모든 것을 걸은 걸테니까요. 글을 읽으면서 시를 읽으니 시가 좀 달라보이네요.

아이리시스 2012-07-25 01:01   좋아요 0 | URL
그렇죠..이광수 작품들을 저는 정말 좋아해요. 카프문학 다음으로요. '시공사'에서 나온 책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입할 때가 있거든요. 이런 이중성. 내가 닥쳐보지 않은 이상 알 수가 없네요. 독립운동 했던 분들은 진짜 대단하지만요, 그게 국가적 차원에서지, 개인적 차원으로는 더없이 불행한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본지진났을 때 별로 슬퍼하지 않았어요.(응?)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국민들이 고생하듯, 과거책임을 지는 거죠.

이 책이 완성도와 문학성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못하는데요. 정말로 시가 다르게 읽히고, 가슴에 콕 들어와박혀요. 같이 보는데 이 책이 [제노사이드]를 이겼어요. 마음속에서 일본소설을 밀어냈어요!(진짜 주관적인 감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