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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트의 바닷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1
줄리앙 그라크 지음, 송진석 옮김 / 민음사 / 2006년 2월
평점 :
휴전중. 우리의 처지다. 남발공약으로 징병제 폐지를 들먹인다거나 정치/경제/외교적으로 얽힌 독도에 깜짝쇼식으로 한 번 갔다온다거나 해서는 곤란하다.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지지 철회로 압박하는 일본도 웃기지만 그보다 웃긴 건 내부분열하는 우리다. 그래서인지 <시르트의 바닷가>가 색다르게 보이지 않았다. 독도에서는 벌써부터 군경 통틀어 풀가동 수비를 서고 있고, 윗 대가리들 싸움에 괜한 말단들만 고생하는 게 이 세계 룰이긴 하지만 휴전이 장난인가? 심심하다고? 권태? 위험과 불안을 도발해보시겠다고? 시르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한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날 수도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일본과 북한과 한국의 관계가 삼각으로 섞인 게 한탄스러워져 나온 문장들.. 안보리 상임 이사국은 되고 싶고, 고귀한 역사를 지닌 타국의 영토인 독도는 자기네 땅 하고 싶은 게 지금 일본이다. 안보리의 기본적 역할에 대해 모르는 건가. 상임 이사국이 돼서 이 나라 저 나라 운명을 손에 쥐고 아무렇게나 표결만 갈기면 그게 국익인가.
이 소설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데, 오히려 문학적 도발에 10페이지 읽어내리기가 벅찬데, 문학과는 달리 세상은 참 시끄럽기만 하다.
쥘리앙 그라크는 1951년 이 작품으로 받게 된 콩쿠르 상을 거부하면서 처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왜 거부했는지에 대해서는 책날개에 씌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은둔하는 이미지를 획득하면서 주류 문단과는 영영 결별하는 셈이 되어 자국에서조차 그라크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베일에 쌓여있다고 한다. 사연이 궁금하지만 그런 건 찾지 않는 게 옳다. 알려지기 싫다잖아. 작품으로 승부하고 싶다잖아. 잊혀지고 싶은 사람은 잊혀지게 두고, 나오고 싶어할 때 반기고 그럼 안되는 걸까.
<시르트의 바닷가>를 읽으면서 내 안의 이중성을 발견했다. 그림에 있어 늘 초현실주의보다는 인상주의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줄거리보다는 문체에 감탄하는 취향이라 이게 문학으로 오니까 인상주의보다는 초현실주의로 탈바꿈한다. 다중이로 좀 살아보지 뭐. 라고 일단 둘러친 다음.
몽환적이면서 아득한 문장이다. 지루하지 않다고는 안했다. 이 지루함은 취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재미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법. 여전히 잘 읽히지는 않지만 집중하면 다음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없게 문체의 매력이 상당하다. 그래서 호불호 또한 심하게 갈릴 것이다. 이건 문체에 대한 것일 뿐이지만 내용도 상당히 없다. 한방이 없고 여기저기 서걱거리며 겉돌기만 한다. 앞 문장이 뒷 문장을, 뒷 문장이 앞 문장을 부연하며 소설이 한 편의 시처럼 씌어졌다. 적막한 시르트 기지에서의 공허한 낮과 밤을 인상적 풍경화로 스케치하고, 탁월한 시적감각과 감수성으로 승화시킨다. 환상적이고 마술적이다. 처음에는 스페인의 극작가 로르카를 연상했지만 로르카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사유한다면, 그라크는 서술을 하고있다. 상당히 다르다. 비슷하지 않다. 연상이 틀렸다. 안고 안긴 문장을 단번에 캐치하기도 어렵지만 단 한 문장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할 휘발성 마력을 지닌 글이라 탐냈다.
사건이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기까지를 스케치한다. 아무 일도 없는 상태를 모든 일이 있는 것처럼 그리려니 얼마나 세세한 터치가 필요했을까. 실제로도 가장 넓은 곳에서 가장 구석진 곳까지 세세히 묘사한다. 알갱이가 보라빛, 핑크빛, 회색빛으로 각각 반짝거린다. 그곳에 있는 해군과 관리들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인데 읽는 나는 망원경으로 그들이 겪는 삶의 풍경을 관찰하는 것처럼 재밌다. 날카로운 시어가 관통하는 권태로운 일상은 마치 평화를 넘어선 평화를 연상시킨다. 바다 가운데 나홀로 남은 낙후한 요새의 풍경과 일상을 한 편의 시로 쓸 줄 아는 작가라면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의 문장들은 또 얼마나 황홀할까.
그라크라는 작가가 세상에서 숨어버린 게 수긍이 간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옳다.
은밀하면서도 경이로운 꿈이 가상 국가 오르세나의 버려진 땅 시르트로 전근간 젊은 귀족 알도의 눈을 통해 펼쳐진다. 낡게 버려진 땅, 문을 열고 나가면 끝없이 푸른 잿빛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이곳을 지키는 해군기지 간부들은 바다 건너편 이웃 국가 파르게스탄과의 휴전 이후 할 일이 끊긴 지 오래다. 권태로운 일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하는 곳. 이미 전쟁이 끊긴 지 300년 지난 이 요새 같은 곳에 모인 이들은 양치기나 동물 사냥 등 이득되는 일과 한량의 취미생활에 집중한다. 안보를 위해 파견된 땅에서 돈놀이가 급급해지고 모두들 권태에 찌들었다. 아무 일이든 일어나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기대와 어떤 일도 일어나서는 안되는 규칙적 평온 사이의 갈등은 내밀하게 그려진다. 어느 쪽이 더 나은지, 어느 쪽을 더 원하는 지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도 알지 못한다. 이곳을 오래 지켜온 마리노 대위는 안정을, 감찰대장으로 파견된 젊은 알도는 불안을 원한다. 고요한 물결을 흐리는 한낱 파도처럼 시르트의 기지에 폭풍전야의 긴장이 감돈다.
나는 규칙 없이 살았다. 시간표는 해군기지의 모두에게 단조롭지 않았다. 날씨의 우연과 바다의 변덕에 좌우되며, 느리고 매우 모호한 활동 가운데 시간표는 거의 농부들의 것에 가까운 다양함과 불연속성을 띠었고, 나는 그 누구보다도 쉽게 그것의 미미한 제한에서 벗어났다. 처음 며칠 동안 나는 자유와 공허에서 오는 일종의 얼떨떨함으로 고생했다. 나는 동료들이 즐길뿐더러 견디기 어려운 고독의 시간을 짧게 해주는 격렬한 운동에 맹렬히 뛰어들었다. (p.34)
알도는 금새 이유모를 불안을 감지한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서 오는 권태적 회의와 비일상적 풍경이 주는 기시감이다. 사무실 책상 위에 해도가 펼쳐져 있다. 건너편에는 우리와 같은 이들이 지키는 요새가 있을 것이다. 미지의 공간을 공상처럼 펼치며 이 세계의 균열과 앞으로의 삶과 생활과 수없이 보내야 할 낮과 밤에 대해 생각한다. 간혹 전에 있던 도시의 화려함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대체로 이곳에서의 예외성이 마음이 든다. 예외적 존재이자 감시관 알도를 좋아하면서도 불안해하는 마리노 대위와의 긴장감은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불안을 감지하는 이, 불안에 다가가는 이, 불안을 회피하는 이, 불안에 맞서는 이들의 욕망이 한곳에서 만난다. 건너편에 존재하는 국가의 변화에 대한 미온적 감지는 이곳 사람들에게 희망인 동시에 절망이다. 희망과 절망이 서로의 반대말이 맞다면, 이 예외성은 평온한 상태를 거부함으로서 권태와 환멸을 제거한 채 올바른 위기로 기능할 것이다. 알도가 희망하면서 희망하지 않는 것, 마리노 대위가 평생을 바쳐 지키고자 한 평화 속 균열, 알도가 느끼는 이곳과 저곳의 차이, 선택의 기로, 당신은 어느 쪽을 원할 거냐는 물음까지, 소설은 완벽하게 나아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때로 더 두려운 법이다. 제거할 대상이 뚜렷하지 않을 때 제거해야 할 것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시르트는 300년간 평온 속의 불안을 견뎌왔고, 그것이 일상이 된 지금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결말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바깥 세상과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한편 독자를 기가 질리게 만든다. 번역이 이 정도라면 원문은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어딘가 갇혀 사흘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가진 책이 달랑 이것 뿐일 때 최고속도로 읽힐 것 같다. 생각이 없으면 진도는 나아가기 마련이다. 급하지 않으면 반드시 끝을 봐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진다. 한여름 전국일주를 하면서 포항과 영덕 사이 작은 해수욕장 근처 작은 민박에 묵은 적이 있다. 문을 열고 나오면 바다냄새가 훅 끼쳐오는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시르트의 바닷가> 표지그림이 잊었던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문을 열면 바다로 뛰쳐나갈 수 있는 바닷가 마을을 한 군데 알고 있다. 내내 로망이었던, 하지만 살기에는 겁이 났던, 어떤 곳.
이 아름다운 소설이 언젠가 시르트의 바닷가 추억을 나만의 바닷가 추억으로 전환시킬 지도. 하루에 한 권, 일주일째 소설이 참 잘 읽히는 시절을 살고 있다. 시르트 바닷가에 머무른 날은 단 하루였기에, 빛나는 햇살 아래 잔잔한 물결이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푸르고 평화로웠기에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숨이 막힌다. 세상에서 버려진 땅으로 숨어버리고 싶은 또 하나의 여름을 과거로 보내는 중이다. 몸이 약한 엄마가 이 무더운 여름을 꼬박 다 보내고 여름의 막바지에 가서야 날 낳았다는 걸 믿을 수가 없다. 물론 가을 중순에 태어나야 할 내가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나 막바지 여름과 초가을 한 달을 어느 바다 동네 언덕 위에 있는 아동병원 인큐베이터에서 하루 3만원짜리 잠을 자긴 했지만. 내 처음 한 달은 고귀하고 벅차고 걱정스런 삶이었다. 거의 다 들은 말에 의한 거지만. 죽을까봐 안지도 못했다고 엄마와 아빠는 말했다. 나는 죽지 않고 살았다. 철마다 지독하게 앓는 감기몸살과 비염 외에는 아픈 적도 거의 없었고(그것들이 진짜 독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충분할 만큼 아들인 동생보다 더 사랑받았다. 내 동생은 짧은 인생 자체가 다소 롤러코스터 같은 아이였다. 뭐 거의 본인이 저지른 일이니 훈장처럼 달고 살아도 좋겠지만. 욕심도 많고 고집도 세고 성깔도 있어서 그애가 늘 불안한 반면 또 애착이 컸기 때문에 부모님의 관심은 늘 그애에게 쏠려있었지만 내가 받은 믿음은 더 컸다. 지금은 내가 좀 더 내다버리고 싶은 자식인 것 같지만. 어쨌거나 시작부터 끝까지 내 인생은 바다를 빼면 남는 게 없다. 바다는 설렘과 고독과 시끌벅적함과 외로움과 시림과 차가움과 시원함을 동시에 가졌다. 모든 시작과 마지막을 바다에서 할 것이다.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그 중에서도 곧 다가올, 여름이 지난 후 쓸쓸히 버려진 쌀쌀하고 달콤한 늦가을과 초겨울의 밤바다를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