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비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크레이그 톰슨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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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로 선택했어. 하지만 돌아오는 차편을 놓치고 말았어. 결국 걸어왔어. 

사막에서의 그 여덟 시간이야말로 사십 일 동안의 낮과 밤이었지.


<하비비>를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두 가지다. 노예문제 즉 인종문제와 생명의 탄생 혹은 신비. 


여기서 하나 더 보태면, 1900년에 태어나 지금까지 장수하고 계신 할머니를 한 번 떠올려보자. 그런 할머니 안계신다고? 나도 없다. 상상해보자. 아니, 빙의를 해보는 거다. 호롱불 켜고 농사 짓거나 삯바느질 하고살다 갑자기 일본인들에게 점령됐다. 신랑 얼굴도 모른 채 열여덟에 시집와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 거쳐 자식을 길렀더니 해방이란다. 같은 민족이라더니 내전 비스무리한 전쟁도 3년이나 계속된다. 휴전선이 그어지는 걸 보았다. 더불어 부모의 삶으로부터 일정부분 영향받을 수밖에 없는 자식이고보면 이런 일도 있었다. 일본과 청나라, 서양문물이 막 들어오기 시작한다. 부모시대는 영정조, 순조,헌종,철종 시대 세도정치기인데 어느 날 갑자기 신분제 폐지라더니 곧이어 일본에 의한 식민시대를 맞고 계속된 애국과 계몽 끝에 해방이라는 결실을 본다. 호롱불이 형광등으로, 개울에서 방망이로 하던 빨래가 세탁기 역할로 바뀐다. 오래 살다보니 텔레비전, 김치전용냉장고, 에어컨, 컴퓨터란 걸 다 본다. 1,2,3차 산업 시대를 인생 전체와 맞부딪혀가며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반대로 할머니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까. 이 세상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 세월이 흐른다는 건 그런 뜻이다.

  

읽다 가려운 곳이 생겨도 성경이나 코란을 펼쳐 독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작한 일이다. 크레이그 톰슨이 바쳤다는 7년이 허투루 가능한 시간도 아닌데다 띠지에 적힌 수많은 수상이력을 대하면서 무엇 하나 보여주겠지 싶은 믿음이 있었다. 코란과 성경.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면 달리 방법이 없지만 아랍이든 서구든,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종교를 향한 뿌리깊은 선입견이라도 배제하는 게 이 책을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라고 여겼다. 적나라한 섹스라도 있는 걸까. 비닐로 꽁꽁싸인 벽돌처럼 두꺼운 책을 받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설렜다. 빽빽한 그림과 경건한 글자체. 그린 이의 위대함을 체험하는 건 수년 들인 공을 단 몇 시간 신공으로 낼름 집어삼키는 게 왠지 모르게 미안해질 때부터다. 아버지에게 팔려 필경사의 아내가 되었다가 남편이 책사냥꾼들에게 목숨을 잃자 다시 노예시장으로 온 열두살 소녀 도돌라가 버림받아 죽기 직전의 운명인 세 살배기 잠을 만나면서 위대한 사랑이 시작된다. 장장 15년. 9년을 함께하고 6년을 그리워하다 비로소 다시 만난 연.인.들. 종교를 갖지 못한 이들이 특정 문화권의 한낱 종교서에 불과하다 여기는 코란과 성경이 이 오누이의 성장과 사랑을 둘러싼 채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맞다. 새삼감탄할 것도 없다. 사랑에 대해, 세월에 대해, 달콤함에 대해 두 종교서는 늘 접점을 보여주곤 했었다.


두 가지 색의 실타래가 얽혀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켰다. 코란과 성경이 따로 놀도록, 도돌라와 잠의 인연 사이 억지로 끼어들도록 하지 않는다. 숨겨진 상징을 찾아내고 말고는 읽는 이의 몫이지만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두 종교서-코란과 성경-를 곧고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동시에 이야기적 특수성과 시대적 보편성을 필연적으로 획득한다. 찾아내는 만큼만 보인다. 노예시장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오누이가 버려진 배 위에서 살아가며 필요한 것들을 사막에서 구한다. 각자 먹고마실 것을 구해오기로 한 그들은 때로 도와주고 때로 가혹한 하늘의 이치를 모르고 있다. 도돌라의 희생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사건과 아랍의 문화 혹은 신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맞닿아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지키기 위해 내어주는 행위는 영혼과 육체가 따로 행하는 숭고한 결합이며, 그 열기는 오래도록 식지 않고 불빛을 밝혔다. 어린 잠이 도돌라를 위해 물을 팔아 식량을 사러간 사이 정체모를 이들에게 잡혀간 도돌라는 술탄의 하렘에 갇혀 매일밤 왕의 욕망을 받아내며 괴물로서의 지옥을 살아간다. 힘겹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낳지만 권모술수에 능한 권력과 투기로 잃어버린다. 그녀는 오래도록 잠에게로 가기 위한 자유와, 아이이자 소년의 이상으로 남은 지켜주기 위한 이로서의 잠과, 진정한 사랑에 의한 봉인된 분수의 샘을 위해 버틴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아팠는지 차마 확신할 수 없었으니, 고통 때문에 순차적 시간 감각에 혼란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러 질병에 매달린 것도 있었다. 내 이상의 상실과 이 낯선 남자의 기묘함을 받아들일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이 남자는 내가 창조한 잠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6년간 스스로를 창조해 온 잠이었다. (p.517)


시공간 속에 또다른 시공간을 짜넣고, 이야기 안에 또다른 이야기를 섞은 이 책을 읽는 일만큼이나 독해 역시 만만치 않지만 결국 다시 이야기, 이야기의 이야기에 대해 생각한다. 돌아갈 곳에 대한 이야기를. 돌아가야 할 사람, 장소, 시간에 대한 모든 것들을. 마침내 잠이 도돌라를 구해 그들이 함께 지낸 샘물같은 터전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부터 믿어의심치 않았던 이야기, 이야기에 깃든 원천의 배신은 와르르 더없이 아프게 무너져내린다. 도돌라가 만들어낸 이상과 그 이상 속에서 훌쩍 커버린 남자아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제는 더이상 줄 수도, 주지 않을 수도 없는 괴리가 문명과 비문명, 문자와 이미지, 순결과 헤픔, 이성과 감성, 사랑과 욕정 등 많은 것들을 건드릴 수 있었다. 육체와 영혼, 물주와 노예, 여자와 남자, 탄생과 소멸, 천국과 지옥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어쩌지 못해 끝내 글로 적고야 마는 공허. 하루가 멀다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던 내 이야기. 써온 시간이 스쳐지나갔다. 흘러넘치면 또 다른 곳을 채우리라. 손상와 치유, 참회와 용서가 인과를 형성하고서야 허락된 반대말이듯, 나 그리고 너와의 차이, 그로인한 간격을 가늠해봤다. 섹스와 사랑이 동의어가 아닌 것. 쾌락과 욕망, 숨과 이야기로 가분된 세상 끝의 이야기들. 나는 오랫동안 나일 수가 없었다. 보여주는 데 인색함 없는 삶이고 싶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언제나 보여주기에, 시간흐름에, 홀딱 벗고 뒹구는데에, 결합의 시간이 소중한 것이라 믿고 또 믿었던 시간들. 고통과 희생과 사랑이 어쩌면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낙원에서 비롯된 막의 파열은 침묵과 운명이 낳은 같은 비율로 기능한다. 나는 펜을 다루지 못하고 내 글을 다루지도 못한다. 샘을 가늠할 수 없고 샘이 있기나한지 의심스러우며 확신도 없다. 시간도 욕망도 운명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삶이 가슴을 긋고 지나갔다. 나는 겨우 소유격과 내가 속한 사각형이나 삼각형, 맨 처음 글자와 마지막 글자 사이의 간극을 통제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이 태양과 구름을, 바다가 물과 파도를, 사랑이 욕망과 절제를 대하듯 그저 내 이름 세 글자(나는 다섯글자지만) 앞에서만 당당할 뿐이다. 지금 든 것들을 모두 휘두른 후에야 죽을 것이다. 잉태, 탄생, 풍요 앞에 나는 허약하다. 그래서 더욱 숭고하고 고귀하다는 것을 안다. 사라진 것들은 아직 파묻혀있다. 우리가 밟고지나온 바로 그곳에. 길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결국은 태어나고 살고 사랑하고 죽는 얘기다. 그래서 마주치는 온 세상에 맞서는 일이다. 그 과정에 분신을 하나쯤 생산해 던져주는 일이다. 세상을 제어하는 힘을 스스로 기르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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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8-0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그저 세상을 사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 나는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걸까 싶어서 자괴감이 들고는 합니다.(이게 뭔?) 어떻게 하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세상을 나름대로 제어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휘둘리지 않으면서...아시면 좀 알려주세요.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못잤더니 상당히 피곤하군요. 이럴 때에는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영화보다가 잠드는 게 최고인데..보다가 편안히 잠들만한 좋은 책이나 영화 없을까요? 요즘 영화들은 피곤해요, 영화 안에서 너무 관객을 휘두르려고 하니까, 저는 휘둘리지 않고 편하게 잠들고 싶네요. 적어도 지금은요.

거기는 아직 비 안 오나요?

아이리시스 2013-08-09 20:51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댓글이 많이 안달려서 되게 편한데 그래도 맥거핀님 댓글은 무지 반갑네요. 맥거핀님 잘 살아계시구나 싶어서.. 저는 사소한 책에는 감동하지 않고 책도 원가대비 최대한의 지식과 감동을 원하는 편이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은 좋더군요. 좋아요. 최근에도 그냥 막 화나는 일이 있었거든요. 제 일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왜 다들 남일에 감놔라 배추놔라 하길 좋아하나 싶어서요. 자기 전에는 그냥 드라마 보는 게 제일 좋지 않나요? 일단 드라마라는 매체는 아무리 좋다고 소문이 자자해도 어쩔 수 없는 '현장성' '즉시성'이란 게 작용해서 한 주 한 주 차근차근 봐야 하는 법이니까.

맥거핀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전라도도 다녀오시고^^ 저도 에어컨 달린 방에서는 잠밖에 잘 수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프랑스 현대철학인가..(제목도 가물가물) 그거 어제도 배 위에 얌전히 펴놓고 잤어요. 새벽에 벌떡 일어나 불끄고 다시 잔다는..

계속 동문서답하고있는 것 같은데, 네! 아직 비 한 방울도 안왔습니다.. 그..그러니까 반나절 이상 쭉 내리는 비 같은 비는.. 한 달 사이 한번도 안왔;; 진짜 죽을 것 같아요. 해운대는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쳐다만봐도 죽겠고 아이스크림이랑 얼음만 냉장고에 계속 채워가요. :)

아이리시스 2013-08-09 22:14   좋아요 0 | URL
그..그런데 이 더운데 유머해보겠다고 제가 배추라고 적었.... orz

맥거핀님! 책을 최소한을 담았는데 8만5천원이 되면요, 맥거핀님은 책을 더 끼워서 5만원씩 맞춰서 두번 주문하나요? 도로 한 권 빼서 5만원어치 주문하나요? :) 아님 그냥 신경 안써요? :)


맥거핀 2013-08-10 16:31   좋아요 0 | URL
요즘 사람들은 남의 일에는 감놔라 '배'추 놔라하는데, 졍작 자기 일에는 미적미적 하는 것 같아요. 어쩔 줄 몰라서 불안불안해 하면서 말이죠. 물론 이는 현대인의 고질병이기는 하고, 저도 완전히 그런 병이 없다고 말은 못하지만, 가끔 보면 너무 정도가 심한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질문에 답변드리면...
경험상볼 때 처음에 한 권 사겠다고 시작한 주문이 늘 2권, 3권, 4권 그 이상으로 불어나는 경험을 매번 하는지라..아마도 늘었으면 늘었지, 줄이지는 못 할 것 같은데..암튼 현대인의 최고의 발명품은 에어컨이요, 최악의 발명품은 신용카드입니다. (으흐흐..저넘의 신용카드 때문에 집에서도 이제는 막 지르고 있으니..)

아이리시스 2013-08-12 13:1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배'추는 실수아니고 진짜 감놔라 배추놔라라고 저 순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으하하하. 가만히나 있을걸, 내가 못살아ㅎㅎ 무식인증하고 있어;;

p.s 꽃보다 할배랑 후아유 재밌어요!. (뜬금없지만 요즘 케이블 맹신중이라서 말해봄?!)

지금 저희집에 식구가 별로 없으니 이번여름 버티기로 했어요. 에어컨 안 켜고^^ 데스크탑이 에어컨이랑 같이 꽂혀있어서 콘센트 문제도 있고 일단 버티기로.. 제가 비가 안와서 미치겠다는 건 아마 그런 이유일 듯. 네! 에어컨은 정말 미친 발명품이죠. 근데 요즘 제 유일한 낙은 계곡이 흐르는 전원주택 매물 삼매경입니다.. 책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여행도 아니고 그냥 잘 지어진 집을 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가끔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생각하지만 제 탓도 할 수 없고 부모님 탓도 할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비 한 방울 안오는 남쪽나라 아파트에서 사는 거..

맥거핀 2013-08-13 22:54   좋아요 0 | URL
나도 꿏보다 할배! 요즘에는 야구 외에는 TV 안보는데, 그것만 유일하게 보고 있어요. ㅋㅋ
 
쥐를 박멸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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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거울 뒤에 숨은 카뮈. 눈으로 읽고 이해함으로서 만나는 카뮈, 카뮈, 카뮈에 대한 모든 것들.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알기 위한 방법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 마흔 여섯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카뮈가 남긴 소설, 산문, 희곡, 철학적 에세이, 시평, 사적인 글 등 다양한 장르적 탐색은 김화영 선생님의 오랜 노고로 번역되어 있는 전집을 읽음으로서 가능할 수 있다. 그의 글을 차곡차곡 읽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가 어린시절 그리고 삶의 일부를 보냈던 곳으로의 여행이 유일한 차선책일 것이다. 카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찬탄의 일환에서 엮어낸 이 책은 그가 남긴 작품들의 요약별 발췌를 통해 열 개 키워드를 반추한다. 우리가 카뮈를 생각하면 거의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들. 그 빛나는 문장들을 유영하는 한편의 미장센이다.

 

그래서 이 책의 타깃은 명확해진다. 카뮈에게로 가는 입문의 역할이 아니라 카뮈의 매력에 다시 취하고 싶은 이들이 찾을 것.

 

가난과 유약함이 준 유리조각 같은 감성, 그가 살았던 파리와 프로방스, 북아프리카 알제리로의 기행, 저항과 부조리의 상징이 되어버린 작품의 의미를 헤집다보면 어느새 동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카뮈를 엿볼 수 있다. 태양 아래 청춘을 불태웠지만 열정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해 괴로워했던 한 소년과 청년의 모습을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카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눈부심과 괴로움이 공존한다는 사실과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일 따름이라는 몇 개의 깨달음을 제외하면, 카뮈 곁에 놓여 있던 내 모든 경의는 어쩌면 아무런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카뮈라는 사람 자체에 매료된 것인지, 그의 불완전함을 사랑한 것인지, 위태로움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했는지 알지 못한다. 많이 알아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카뮈에 대해 아무 말도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지만 카뮈는 내 20대의 일부를 채워준 작가에 속한다.

 

 

카뮈를 읽는 일은 존재와 존재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일이다. 소설 <이방인>, <전락>, <페스트>가 그랬고, 네 편의 희곡과 그가 발표를 한사코 거부한 처녀작 <행복한 죽음>과 미완성 유작 <최초의 인간>,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을 숨기지 않는 철학 에세이 <결혼, 여름>과 고통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행복을 찾아나선 <시지프 신화>, <안과 겉> 같은 철학적 사유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알기 위해 읽을 것이 문학작품 밖에 없지 않다는 사실은 세 권의 <작가수첩>이 또다른 방법으로 증명한다. 거기다 사르트르와의 이념 논쟁이나 스승 장 그르니에와의 관계, 아름다움으로 존재의미를 다하는 유럽 곳곳의 그의 발자취까지, 이만하면 이름 만으로도 유혹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예술을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저 꼭대기에 올려놓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반대로 예술이 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그 누구와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가 모든 사람들과 같은 높이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예술은 고독한 향락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괴로움과 기쁨의 각별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최대 다수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수단입니다. (중략)' (p.281)

 

1957년 12월 10일 노벨상 수여식을 마감하는 연회가 끝날 무렵 열린 강연에서 카뮈의 말 중 일부분이다. 내면의 혼란과 광란의 역사, 가난과 병치레를 고스란히 겪으며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의지와 끈기를 보여준 그의 마음 안에 들어찬 예술에 대한 예찬과 작가로서의 다짐은 스물 몇 살의 도서관에서 마주한 이래, 철학과 예술, 사회와 역사를 향해 머리와 마음을 열어두는 일 또한 문학을 사랑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새겨준 계기가 되었다.

 

 

저자가 엮기만 했고 비평이 아닌 찬양에 가까운 이 책의 탄생은 별점으로 그 평가를 다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카뮈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만들 수 없는 책이며, 카뮈의 글을 발췌하는 데 시간과 정력을 쏟은 이가 다른 독자에게 카뮈를 소개하는 일이다. 인간을 하나의 틀에 가두는 일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일이라고 할 때, 카뮈가 남긴 작품들의 양 만큼이나 여러 조각으로 분열하는 이 책이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도 분명하지만, 마냥 좋았다. 이 찬연하고도 빛나는 사유 안에서 언제까지나 숨쉴 수 있다는 것이.

 

카뮈를 좋아한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마음만은 투명하다. 그가 가진 것이 한낱 문학과 이론 속에 머물고 마는 것이었다고 해도 그의 이름에 반응하는 내 속도는 그다지 구애받지 않는다. 이십 대에는 문학에만 발을 담글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희곡은 손대지 못했다. 다시, 이 책을 발판으로 정의와 영혼에 다가가는 카뮈 읽기를 시작해야지. 어쩐지 햇빛 푹푹 찌는 더위 아래 양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이 청춘이 다하도록, 생각이 깊어지도록 그렇게 읽어야 할 것 같다. 그의 <작가수첩> 마냥 지금 나도 잘 쓰고 있는 것인지.

 

 

인생이라는 꿈속에서, 여기 한 인간이 죽음의 땅 위에서 자신의 진실들을 찾았다가 잃고, 전쟁과 함성, 정의와 사랑의 광기, 마침내 고통을 거쳐서 죽음마저 행복한 침묵인 평화로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또 여기...... 그렇다, 나는 적어도 이것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으니, 이 유적(流謫)의 시간에, 인간에 의하여 이룩되는 작품이란, 예술이라는 우회로들을 거쳐서, 처음으로 가슴을 열었던 두세 개의 단순하고도 위대한 이미지들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행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꿈꾸는 것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20년 동안 일과 작품 활동을 거치고 나서도, 여전히 나의 작품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안과 겉> 서문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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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01: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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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0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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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8 0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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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0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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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8 03: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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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이님 태그 멋져요. 아직 이 글 읽기 전인데, 태그가 멋져서 한 마디 안 할 수 없네요. 아이님은 진정한 낭만가~~*

아이리시스 2013-08-06 10:33   좋아요 0 | URL
섬님, 좋은 아침! 그..그런데..저도 착각이 들었는데.. 저건 제가 한 마..말이..아..니고.. 저자가.. 이 책을 그렇게 만들고 싶으셨대요. 참 좋은 말이죠? 낭만적이고 뭉클하고 그래서 저한테 그런 책이 어떤 책일지 이제부터 찾아보기로 했어요 ^-^
 
역사의 한 순간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 유럽 5대 왕실에 숨겨진 피의 역사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이봄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파리에서 루브르보다 오르세가 사실상 더 인기있는 것처럼 런던에서 대영 박물관보다 내셔널 갤러리의 작품들이 더 익숙한 것은 상대적으로 친숙한 화가의 작품이 많고 시대적으로도 가까워서다. 내셔널 갤러리와 트라팔가 광장의 해질녘 풍경과 비에 젖은 연하늘빛 세상을 좋아한 만큼 오래 그리워했지만 당시에는 몸통을 나란히 붙이고 있는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는 무관심했다. 포트레이트만 걸려있다는 게 그다지 발길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장료 무료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솔깃한 일인데도 우린 그때 런던 전역을 돌며 수줍은 관광객티를 내느라 거의 매일 물에 젖은 새털처럼 무겁고 기운이 빠져 있었다. 평소 배우던 것과는 다른 발음과 억양으로 흘러나오는 묵직한 영어는 훗날 원어민을 만났을 때 트라우마가 되었고, 좁다래서 차라리 귀여운 전철이나 빨간색이층버스에 탄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일 경우 나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자유는 어둠이 내린 타워브릿지 불빛 찰나에서나 가능했다. 그곳은 나의 도시가 아니었다. 업적 모르는 인물의 얼굴만 나열된 그곳을 좋아했을 리도 없지만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들이 사용되는 방식으로 역사를 대하니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하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걸린 초상화의 주인공이 케이트 미들턴이었을라나.

 

유럽 왕실 곳곳에 불어닥친 강풍, 피와 광기의 역사, 혈연으로 뒤얽힌 사랑과 파멸의 대서사시. 촘촘하게 밀착된 연대기적 사건을 잔인한 왕에게 죽임 당하거나 버려진 가련한 왕비 중심으로 다섯 챕터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만난다. 

 

여왕들의 경쟁: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 스튜어트


푸른 피를 지키기 위한 결혼: 합스부르크 가문과 마르가리타 테레사


광기의 군주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일곱 황비: 이반 뇌제와 황비들


무식하고 야비한 왕에게 평생을 유폐당한 왕비: 조지 1세와 조피아 도로테아


잔혹함에 맞선 왕비의 생존법: 헨리 8세와 앤 불린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 I, 1533-1603) 

 

 

메리 스튜어트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올라, 다섯 살 때 잉글랜드와의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한 궁책 끝에 프랑스 왕비가 된다. 후사를 생산 못한 메리가 권력구도로부터 밀려 조국으로 돌아올 때도 아직 스물이 되기 전이었으니 날 때부터 갈 때까지 지독히도 잔인한 운명에 가려진 그녀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다. 최고의 불운은 예쁜 얼굴과 가녀린 몸매,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남자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 1세를 라이벌로 둔 것으로, 헨리 8세 여동생의 손녀인 메리는 사실상 서출인 엘리자베스에 비해 왕위계승서열이 앞섰다. 아버지에 의한 어머니의 가혹한 처형을 목격한 엘리자베스가 만개한 아름다움을 지닌 메리를 여자로서 질투하고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타고난 아름다움이 처연한 피의 현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에 의해 오랫동안 유폐당했다가 종교혁명을 억압하려는 대신들의 요구로 처형당한다. 실패한 세 번의 결혼에서 얻은 유일한 아들은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통합한 제임스 1세다.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보이고자 한 그녀의 애처로운 노력은 무참하게 짓밟힌다.

 

 

메리 스튜어트를 담당했던 형리는 동요한 채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최초의 일격은 목이 아니라 뒤통수에 떨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왕의 모습에 더욱 당황한 그는 두번재 시도에서는 힘을 제대로 싣지 못했다. 목덜미에 맞기는 했지만 피가 뿜어 나왔을 뿐 목은 떨어지지 않았다. 세번째에야 겨우 잘라낼 수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목을 벤 뒤에는 늘 그랬듯 그 머리칼을 움켜쥐고 높이 치켜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형리는 그렇게 했다. 그런데, 머리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메리가 자신의 백발을 숨기기 위해 썼던 가발이었다. 가발을 움켜쥐었으니 머리는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았다. 그냥 떨어지기만 한 게 아니라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pp.18-19)

 

 

데.굴.데.굴. 작두를 포청천한테서 빌려오든가 하지, 도끼로 몇 번을 치는 거야, 대체. 초반에 저런 장면을 만나 상상력 지나친 나는 웩웩거리다가 읽는 도중에 못견디고 또는 전혀 관련없게 츠바이크가 쓴 평전 <메리 스튜어트>를 주문했다. 유럽역사는 실타래마냥 한군데만 툭 건드려도 줄줄 풀려나온다. 유럽 왕실 역사에 정통하거나 초집중 못하면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뒤얽힌 인물과 가문의 결합이다. 혈연관계로 뭉친 근친결합이 대부분이며, 주로 권력을 나누거나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한 사람이 두 번 이상 결혼하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누가 누구와, 어떻게, 왜 결혼했는지 정도의 사연은 별 것 아니게 되어버린다. 죽었구나, 왕비 바뀌었네, 나라 넘어갔네, 어떻게 됐지, 하다가 이런 절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대체 결혼은 무엇이고 또 권력은 무엇인가!

 

 

 

메리 1세 (Mary I, 1542-1587)

 

 

엘리자베스보다 메리가 빼어나게 예뻤다고? 어디가? 어떻게? 왜? 아무리 미에 대한 관점이 달라도 그 시대 남자들 보는 눈들 참 거기서 거기다. 목소리, 교태, 지혜 같은 것들과 결합된 여자는 또 훨씬 다르긴 해도. 기록도 하나 없이 달랑 초상화 몇 점으로 남은 왕비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왕실의 그녀들이 그랬다면 아래의 여성들에 대한 대우나 처사가 어쨌을지 뻔하게 그려진다. 그림으로 남은 왕비라 하면, 마르가리타 테레사(1651-1673)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합이 낳은 근친의 증거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의 첫 번째 아내이다. 스페인 바로크를 대표하는 필리프 4세의 궁정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녀의 어린시절을 속속들이 그림으로 남겼는데 요란한 가문의 결합사에 비해 독자적으로는 업적이나 일화가 거의 없던 그녀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유명하다고 잘난 것도 아니고, 잘났다고 유명한 것만도 아니며, 자기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우연과 운명에 의해 이름이 좌우될 수 있다.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6)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다섯 챕터의 왕과 왕비의 연대기가 교묘하게 얽히는 지점을 포착하면 짜릿하다. 순차적 구성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 위아래, 옆을 오가다 마주치는 형식이라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엘리자베스와 메리 스튜어트를 들여다보기 위해 헨리 8세와 앤 불린, 카트린 드 메디치와 프랑소와 2세를 등장시키고, 관련된 모든 가문과 국가, 귀족과 대공, 왕실 가계도와 역사를 훑어내려간다.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러시아까지 뻗치고 뻗친 혈족결합의 여파가 어마어마해서, 왕비가 되길 손꼽아 기다렸거나 타고난 왕족도 있겠지만 시장에서 말이 선택되듯 줄지어 섰다가 뽑혀 왕실로 끌려들어간 여자들도 많다. 한 나라의 왕을 사랑과 지혜로 보살피고, 다음 왕을 낳아야 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자리라고 해도 시대와 남자의 손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생을 거듭 감상하는 일이 씁쓸하고 애처롭기만 하다.

 

한 명의 왕에게도 수 명의 왕비가 있고 그로인한 자녀들이 무수하기 때문에 여기저기 결혼시키고 대를 잇고 그러다보면 반복학습 없는 이상 하루 이상 뇌에 남겨지지 않는, 휘발성 강한 가계도가 그려진다. 안팎의 예외없이 국가 간, 왕실 간, 가문 간 피다툼이 날마다 벌어지는데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불안과 광기, 혼란과 환멸의 시대. 왕은 하룻밤의 욕망을 감추는 법이 없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멀어 점점 더 잔인한 피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린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살아서 궁전을 나가거나 더이상 평범한 미래를 꿈꿀 수가 없다. 유폐와 죽음만이 기다린다. 이전의 왕비를 공식적으로 없애야만 자리를 채우기 위한 다음의 절차가 타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궁정에는 늘 음모와 복수를 위한 살기가 유령처럼 맴돈다.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대하는 습관으로 피의 역사는 쉼없이 되물림된다.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일랴 레핀, 1885년

 

 

러시아의 이반 뇌제는 숙청과 암살의 저주와 혼란 아래 세 살 즈음 대공의 자리에 오른다. 언제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건 허울 뿐인 대공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대귀족들의 철저하고 알량한 계산 덕분이었다. 암살에 대한 두려움에 떨며 비로소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신부 콘테스트에서 뽑힌 로마노프 가문의 아나스타샤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사랑의 힘은 광기의 발현조차 깊고 상냥하게 눌렀다. 자세한 기록은 남지 않았지만 아나스타샤는 지혜와 사랑으로 황제를 잘 다스려나간 드물게 현명한 왕비였던 것 같다. 사랑받는 여자가 걱정할 것은 거의 없다는 서글픔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원인불명의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저 잠깐 숨겨졌을 뿐인 광기가 폭발하면서 러시아를 공포정치의 소굴로 밀어넣는다. 바로 그 공포정치의 이반 뇌제 시대가 열린 것. 그후 아나스탸샤의 로마노프 가문은 러시아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데 시작이 황비 아나스타샤였던 셈이다.

 

여느 왕이 그런 것처럼 아들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던 이반 역시 제대로 대를 이어주지 못하는 황비를 무려 여섯 번이나 갈아치웠는데 이때 폭군의 눈을 피해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눈 간 큰 황비도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주지 못하면 한낱 들판의 꽃을 꺾듯 독약을 들이키게 하고 매를 때리거나 버렸다. 황제의 잔혹한 광기와 여성편력은 그들이 단지 아름다운 장난감에 불과했음을 시사한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사랑한 아나스타샤가 낳은 이반이 왕조를 이을 것은 당연했다. 며느리 엘레나가 배가 불러온단 이유로 궁정의 관례에 따르지 않은 옷을 입었음을 알고 노발대발 지팡이를 휘두르다 손주를 유산시킨다. 아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반은 소중한 자식마저 지팡이를 휘둘러 때려죽인다. 러시아 리얼리즘의 아버지 일랴 레핀은 삼백 년이 지난 후 이 순간을 생생히 재현하는 작품을 그린다. 벨라스케스는 당대의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그렸지만 일랴 레핀의 그림은 역사를 제3자의 눈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긴 것이다. 그로부터 130년이 더 흘렀지만 그와 우리가 이반 뇌제를 보는 시각은 아마도 같을 것이다.

 

 

 

당첨!

놓칠 뻔한 <영국사>를 펼치는 날이 온다면 온전히 이 책 덕분이다. 책의 운명에 대해 떠올리는 날이다. 쉽고 수월한 것에서 복잡하고 깊은 내용으로 넘어가는 게 지극히 당연하니까 그 책을 먼저 만났다면 이 책을 만나지는 못했겠지. 이와 반대의 일은 웬만해선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것들이 참 많다. 선택, 책임, 마음, 행동, 인연, 운명. 내것인데도 내맘대로 되는 게 드문 경우의 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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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3-06-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두를 포청천한테서 빌려오든가 하지, 도끼로 몇 번을 치는 거야, 대체-이 부분에서 저,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어요, 아이리시스님! 이런 유머감각에 반했습니다. 종종 어떤 책은 그림 속 복식사에 관해, 어떤 책은 정물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더 포괄적인 것을 담고 있군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메리 스튜어트를 읽은 적 있는데, 츠바이크는 그것이 누구든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숨결까지 쥐락펴락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식, 관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정이 드러났어요. 아이리시스님이 읽으실 츠바이크를 기대해 봅니다.



덧-푸른 피를 지키기 위함과 동시에 사각턱도 사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헤헤..

아이리시스 2013-06-30 17:06   좋아요 0 | URL
으흠, 역시 작두는 짱이죠. 제가 포청천을 엄청 좋아해요, 작두가 아니고. 너무 안타까워요. 가발이 잡히고 데굴데굴 굴러간 게 고스란히 상상이 돼서 이건 정말 못할 짓 같아요ㅠ.ㅠ

죽음을 앞에 두고 장난치면 안되는데 나중에 후회했답니다. 하지만 이제와서 고치는 것도 이상하고 나름 유머였는데 히히히. 미안해요, 메리! (제가 이제 메리한테 사과해야 하나요.. 미안, 메리할머니!!!) 다만 죽임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표면적 초상화 구경에서 더 깊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건 제가 왕실 역사에 무지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메리 스튜어트는 판본이 마리 앙투와네트보다 한참 안예뻐서(응?) 또 어디갔는지 안보인답니다.. 해가 쨍쨍하지도 않은데 하루종일 계곡물에 발담그고 수박 먹는 상상하면서 앉아있어요. 해수욕장이 인산인해인데 오늘 가볼걸, 하루가 다갔네요. 자고 밥먹고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 6월의 마지막날을 이렇게 보내나 봅니다..

쟌님은 주말 오후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내일은 더 뜨거워져서 만나요! 7월이니까요.

2013-07-02 0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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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은 다른 이유로 밤을 샜고 요즘은 그런 날이 이어지고 있기에 대수로울 게 없는데 침대로 기어들어야 할 시간에 어떤 소설의 끝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음은 다른 날과 달랐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후 사흘이 흘렀고, 몇 권의 소설을 더이상 필사적일 수 없는 속도로 읽어치웠지만 여전히 귓가에는 아비규환의 비명이 울려퍼지고, 눈은 아수라장의 세계를 잊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동물은 극복 못할 트라우마였다. 어릴 때 외가식구들과 계곡에서 캠핑 중 자루에 넣은 돼지를 패고 또 패서 나중에 구워먹던 걸 보며 한점을 가까스로 입에 넣었다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속을 모조리 게워낸 이후였나, 무섭고 두렵게만 여겼던 개를 처음 기르기 시작한 스무살부터였나, 그애가 집을 나간 지지난 여름 이후였나, 그게 내 아홉수와 연관이 있었을까, 동생이 어린 마음에 길거리 오토바이를 훔쳐타다 잡히던 전날 심한 설사로 몸을 못가누던 작은 강아지가 다음날 새벽 제집에서 혀를 길게 빼물고 죽어있던 이후부터였나. 어른들은 그걸 액땜이라고 불렀다. 모든 것을 고스란히 느낀다는 게 너무 무서워서 한동안 아예 귀를 닫고 살았다. 주변에서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낑낑대는 소리만 들려와도 동물학대 현장의 환상에 시달렸다. 계속됐다면 정신과로 가야 했을 터, 아픈 동물 앞에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로 인해 침체와 우울이 긴 나날 이어지는 것이, 이런 마음을 평생 지속하여 갖고 살아야 한다는 예감에 어느 날은 살아있는 게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쿠키.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만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너를 통해 황홀한 꿈을 꾸었다는 것도." (p.173)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동물을 사랑하는 자와 동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 둘 사이에 선과 악의 이분법은 당연히 성립하지 않고, 다만 경험의 차이일 뿐이라는 걸 안다.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면 길에서 살아갈 개와 고양이들이 가장 먼저 걱정이었다. 길에 쪼그리고 앉아 빵과 우유를 놓고 괜찮아, 먹어, 를 반복하던 나는 머지않아 뒷다리를 질질 끌며 사차선 한켠의 인도를 기어가는 아가를 무턱대고 데려온다. 영화 같은 그날을 몇 장면으로 기억한다. 퇴근시간 만원버스에 올라타 창너머를 보다 눈에 들어왔다. 가는 내내 잊혀지길 빌지만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아 내리자마자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간다. 하늘이 새까매지고 세상을 비추는 빛이 달과 별 뿐이던 것과 최초 발견지점에서 가까운 도로 끝에서 발견된, 추위와 두려움에 떨다 이젠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아이. 서툴게 구조해 동물병원 문이 닫힐까 두 구역을 죽어라 뛰던 우리. 몇 가지 검사. 내장파열이라면 증세는 금방 나타나지 않는데, 괜찮을 수도 심각할 수도 있다, 자세한 검사는 시간과 돈이 들테니 유기견이라면 구청에 신고하거나 안락사를 권한다, 는 친절한 수의사를 뒤로 하고 엉엉 울면서 케이지에 넣어 집으로 데려온 것까지. 페이드아웃.

 

내가 저보다 분별력 있고 힘센 인간이라서 어떠한 생명체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구청에 가면 어차피 치료도 못받고 애물단지로 전락하다 어찌될지 모르고, 안락사라니, 내 결정으로 그런 걸 하라고? 무턱대고 용감한 편은 아니지만 꼭 일어날 거라 믿었고 다음은 생각하지 않았다. 혹 숨을 놓더라도 마지막을 봐줄게, 네가 있었던 곳을 기억할게, 내 손으로 너를 묻을게, 약속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차라리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그애가 멈췄던 그곳에 홀로 두는 게 옳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이주는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다. 어느 날 일어서고 배변하고 밥을 받아먹고 마침내 두 다리로 섰을 때, 밤새 코에 손바닥을 대보느라 며칠간 오전 수업을 빼먹고 맘졸인 간절함을 그애가 들은 거라고 그땐 믿었다.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p.28)

 

 

인수공통전염병은 정유정 작가가 눅눅하고 질퍽하기 짝이 없는 진흙같은 곳에서 인간 위주로 돌아가는 가혹한 세계를 펼치기 위해 다음 타자로 사용한 카드다. 종말론을 이야기하는 영화에서 자주 사용되던 소재이긴한데, 특이한 건 시점이다. 개의 시점에서도 상황을 묘사한다는 것.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점과 등장인물 많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거쳤을 어마어마한 자료조사를 짐작케 한다. 누구나 하나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힘든 과정일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래서 바로 그게 정유정 작가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으리란 것도. 부단한 시점변화와 다양한 인물 입장은 소설보다는 드라마나 영화와 맞는 기법 아니던가. 뛰어난 가독성, 영화같은 이야기로는 필연적이게도 문단이나 독자가 원하는 문체의 문학성을 획득하기 힘들다. 능력의 문제이기보다는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그러니까 알래스카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황야를 가로지른 철길로 걸어가본 적이 있어요. 레일을 따라 걷다가 마을이 보이지 않는 곳에 다다르자 손목시계를 풀어서 선로 위에 놔두었죠."

"왜요?"

"초바늘 똑딱이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해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았거든. 나는 좀 더 멀리 가보고 싶었고. 기찻길이 끝나는 곳까지."

"그래서 갔어요?"

"아니. 걷다가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면 여전히 똑딱똑딱 소리가 들려왔어요. 귀에서 피가 도는 소리보다 더 크게. 열 발짝, 스무 발짝, 시계는 멀어질수록 더 큰 소리로 집으로 돌아가라고 일렀어요. 결국 집으로 돌아갔죠."

"시계는요."

"화가 나서 선로에 그대로 두고 와버렸어요. 바람이 쓸어 가든가. 기차가 깔아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다음에 황야로 갔을 때 또 나를 불러 세우지 않도록."

"다음에 갔을 때에도 확인 안 해봤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어요. 바람에 날려갔다면 지금도 근처 어딘가에서 똑딱거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pp.237-238)

 

 

구원이 아닌 철저한 실험을 그린 세계. '왜'가 아니라 '어떻게',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을'이 중요한 세계. '왜'가 전염병의 이유, '어떻게'가 인간들의 각기 다른 대처라면 '무엇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지켜야 할 저 너머 무언가를 의미한다. 이 세계라는 파이 안에서는 거의 언제나 지켜내려는 사람보다 그 반대의 수가 훨씬 많거나 힘의 크기가 크지 않던가. 전염병의 세계에서 병에 걸리지 않고 죽어가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은 병에 걸린 세계의 절규와 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이 잃어가는 소중한 것을 들여다보자는 얘기. 그러면 마지막 남은 인간성이 보일 터였다. 공교롭게도 주인공 재형, 기준, 윤주, 수진, 동해, 링고는 전염병의 희생자가 아니다. 작가에게는 여섯 명의 전염되지 않은 주인공을 설정하며 각각을 통해 하고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다. 배경으로 가장 부각되는 유기견보호센터 드림랜드는 인간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다. 병이 발발하자 절차 하나 없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친 군인들에 의해 개들이 집단 사살된다. 죽고 살아남는 데에 타당근거가 없어진지 오래다. 인간은 병이 두려워 아까까지 식구였던 애견을 앞다투어 드림랜드에 버린다. 새 식구들은 재형에게 분노를 품은 동해가 고의로 불을 지르면서 다시 죽음을 맞이한다. 드림랜드 역시 폭삭 내려앉는다. 일순간 희미한 희망의 불씨마저 꺼진다. 살아생전 누군가의 소중한 무엇이었던 피투성이 사체들만이 슬픈 자화상처럼 멍든 드림랜드를 지킨다. 더 무서운 건 국가가 내린 봉쇄령이다. '빨간 눈'의 확산이 두려워 공권력으로 제압, 감금, 집단수용, (사실상) 처형하는 모습에서 인간과 개의 경계가 지워짐을 확인한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스타는 발작을 멈췄으나 죽은 개처럼 몸을 놔버렸다. 링고는 두려움에 휩싸여 스타에게 다가앉았다. 혀를 내밀어 코를 핥았다. 뜨겁고 마른 스타의 숨결이 입안을 어루만졌다. 살아있다는, 틀림없는 증거였다. 살아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정신없이 스타의 젖은 몸을 핥았다.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스타의 등에 배를 붙이고 누웠다. 거칠게 울리는 스타의 숨소리를 들으며 희망적인 변화를 감지해보려 애썼다. (p.107)

 

 

가장 인간적인 주인공이 다름아닌 개 링고라니, 인간을 상대로 복수하려다 개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재형으로부터 저지당하지만 링고가 해낸 일과 하려던 일을 종합하면 이러하다. 옳고 그름 앞에 인간은 늘 판단을 유예하는 미숙아이며, 시간을 끌거나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는다해서 올바른 판단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링고는 아직은 우리를 둘러싼 시계가 고장나지 않았음을, 초침소리를 듣고 뒤돌아보거나 되돌아오기를, 여전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간절함을 품고있음을 입증한다. 잘한 선택이 늘 잘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력하는 그 순간만 인간, 나를 지탱하는 세계와 버팀목이 나를 초월해버리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무너질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목적과 대가, 시간과 수단은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아는 자는 드물거나 아주 적다. 내내 잘못된 선택을 묵인하거나 용인하지 말라 경고하는 소리를 듣는다. 고요와 공허 속의 초침 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두 번 다시는 개와 인간이 함께 몰락하는, 그래서 다시 일어서기도 하는, 극에서 극까지 걸어갔다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읽고싶지 않다. 한 번은 어떻게 지나갔지만 두 번은 극심한 고통과 명징한 몰락을 온전히 견딜 가능성이 없다.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세계는 정말이지 아주 작고, 하찮다.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건너가는 일은 여전히 벅차고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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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06-2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 백만스물아홉열!!! 아이리시스님아...

아이리시스 2013-06-27 05:22   좋아요 0 | URL
고맙 백만스물아홉열!!! 포핀스님 오랜만...

2013-07-02 0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3 2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카소 월드 - 가장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 피카소의 삶과 예술 이야기
존 핀레이 지음, 정무정 옮김 / 미술문화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얼굴이라곤 카뮈만 겨우 떠올리는 내가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피카소(1881-1973). 스페인 말라가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이자 르누아르, 렘브란트, 뭉크, 고갱, 고흐, 고야, 마네 등의 영향을 받았고, 거트루드 스타인, 장 콕토, 기욤 아폴리네르와 친구로 지냈다.

전쟁의 참혹상을 그린 <게르니카, 1937>,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 1907>, 1950년 미군과 한국군이 진주한 북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난 양민학살 소식을 듣고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1951> 등이 대표작이다. 아버지 돈 호세 역시 화가이자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넘치는 에너지와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피카소의 화풍은 크게 청색 시대(1901-4), 장미빛 시대(1904-6), 입체주의 시대(1908-15)로 구분된다. '청색시대'는 1900년 파리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맥주 겸 여인숙으로 알려진 네 마리 고양이(4 cats) 카페에서 카탈루냐의 모더니즘, 강한 무정부주의적 또는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극작가와 문인들을 만난다. 미술, 문학, 음악, 시, 정치 그리고 철학의 다양한 사상에 대해 배워나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00년 10월에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친구 카를레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였다. 피카소는 열일곱 살이었던 1899년 봄에 이 지적이고 매력적인 카사헤마스를 만났다. 카사헤마스는 고군분투하는 데카당파로서 자기 파괴적이고 가난하며 격정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는데, 비극적이게도 알코올과 모르핀에 중독된 상태였다. 카사헤마스는 18개월 후에 자살을 하는데, 이 사건은 피카소와 그의 청색 시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p.14)

검푸른색이나 짙은 청녹색을 사용하여 죽음이나 파리의 사교계, 고급 매춘부 등의 소재로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들의 고독을 주로 그렸다. 유학 온 피카소가 낯선 파리 화단에서 겪었던 이방인으로서의 우울을 드러낸다.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되고 이 때부터 빨강, 노랑, 장미빛 등의 색이 사용되어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그림이 변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장미빛 시대'로 부른다.



파리에 정착하기 전의 피카소는 다양한 모색을 통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고전적 모티프를 탐색하며 그가 찾은 것은 거리의 유랑극단과 서커스 공연자의 도상이었다. 곡예사, 공연자, 어릿광대, 익살꾼들을 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전통적으로 제3자로 간주되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서툰 불어실력이 유랑과 사회적 고독에 중첩되었을 것이며, 낭만이라는 관념과도 연계되었다.

1904년부터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1907년 파리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조각품과 가면들을 보았다. 이후 나온 작품이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이다. 매춘과 타락에 대한 반박으로도 읽히며, 죽음 충동, 메멘토 모리, 사드를 숭배하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부족미술의 어떠한 관계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피카소의 원시주의 및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충격과 강렬함이 이 초자연적 현실을 그리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준비스케치나 이 그림이 미친 효과, 이후 작품경향이 적실하게 보여준다.



피카소와 곧 첫 번째 부인이 될 러시아 발레 무용수인 올가 호흘로바와 프랑스 시인이자 문인, 미술가, 영화제작자인 장 콕토와 찍은 사진이다. 피카소는 1908년경 입체주의 공동창시자로 평가받는 조르주 브라크(1882-1963)와 입체주의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15년까지 전개되며 미술에 있어 재창조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대변한다. 입체주의는 새로운 재료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자극하여 전통적 묘사를 넘어서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콜라주, 파피에 콜레, 구성과 아상블라주 기법의 창안을 자극하였다.

마법의 근원을 소위 원시 문화에서 찾는 프로이트의 생각은 대체로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종교적 관습에 관한 기본적인 저서로 간주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1890-1915)에 상당 부분 뿌리를 두고 있다. 정신분석학자와 인류학자의 가정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위 그룹 사이에서 종교나 마법의 원리와 관련한 원시적 스테레오타입을 유행시키고 확정짓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야수주의자, 입체주의자, 초현실주의자와 같은 모더니스트 미술가 집단은 '원시 숭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 아프리카 미술을 차용하였다.(p.65)



1920년대 초, 피카소의 회화는 <목욕녀들, 1918>을 필두로 <올가의 초상, 1923>, <판의 피리, 1923>, <경주(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1922>처럼 평화와 몽상, 환락을 주제로 변화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고전주의, 자연주의, 입체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뒤섞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른쪽 페이지 윗그림 <경주>는 티치아노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1520-22>를 참고로 그린 작품으로 짐작, 술의 신 바커스를 방종한 행위의 원인으로 묘사한 신화적 주제를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디오니소스적 흥분과 바커스적 춤에 몰두한 여성이라는 주제가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의 관계를 확고하게 그렸다고 해석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초현실주의적 혁명에 들어서는 피카소는 1930년에 <초현실주의 제2선언, 1930>이라는 작품으로 그 정의를 확고히 한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그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기 때문인데,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이념과 이미지에 전적으로 동조한 적이 없지만 서서히 회화의 위기를 인정하면서 동조의 입장으로 변해간다. 미신적 성향, 비이성, 광기, 정신착란 그리고 욕망에 대한 초현실주의자들의 탐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는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고대 투우의 말라가 출신의 안달루시안으로서의 피카소의 문화적 정체성은 <게르니카, 1937>에 묘사한 투우 이미지에서 언급된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 이 작품은 정체성의 혼돈, 투우에 기초한 폭력적 주제, 고대 신화 속의 야수를 콜라주하여 신화적 피조물로서 그린 희생 의식이나 제의, 종교의 관습 등을 전쟁, 학살, 전투, 의식, 십자가 처형, 이교적 희생의식과 같은 신화적, 역사적, 종교적 주제에 뿌리를 내리고 그렸다. 더불어 개인의 갈등이나 정체성의 이해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화한다.

실제로 이 시기 아내 올가 호흘로바와 아들 파울로와 함께 투우를 보기 위해 연속 세 번이나 스페인을 방문하였으며 곧 결혼이 파국을 맞는다. 1933년에서 37년까지 그려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투우 이미지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26일 나치 콘돌 군단에 의한 융단폭격을 둘러싼 비극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1940년대 피카소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기념비로 생 제르맹 데 프레 광장에 놓인 조각 <도라 마르의 두상, 1941>을 비롯해 조각가로서의 작업에 몰두한다. 이교와 기독교, 홀로코스트, 집단 수용소에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메멘토 모리, 마술적 페르소나 등의 추상과 부재, 상실, 슬픔 등의 초현실적인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인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또렷한 특징을 보인다. 전쟁에 대한 불안과 도발적 분노, 일촉즉발의 상태와 파멸, 고독과 평화, 은둔, 자기반성의 징후와 파토스, 생애 말년의 무기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피카소의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행위, 즉 노령을 거부하고 병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 본성, 상상력을 이용하여 공포와 유약함을 드러낸 것이다.(p.175)

오리엔트적 관심을 반영한 <알제의 여인들, 1955>, 벨라스케스 작품을 토대로 제작한 45점의 유화 중 하나인 <시녀들, 1957>, <사비니 여인의 약탈, 1962>, <한국에서의 학살, 1951>이 억압과 전쟁의 희생자,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를 형상화시킨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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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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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0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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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1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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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1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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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0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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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4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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