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이 파묵의 첫 타자가 되어서는 안되었다. 처음에는 몰랐고,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파묵이라는 생소한 터키 작가를 알게 한 노벨상의 존재를 고려했다면 그가 노벨상 수상 '이후' 출간한 이 책을 시작으로 삼는 건 어쩐지 반칙 같은데 이미 읽은 거 물릴 수도 없고 그래서 일단 시작을 되짚어보면, 날 혹하게 했던 '순수박물관' 이벤트가 있었다. 핑크색 글씨 속 이벤트 당첨자 명단 열 번째에 운좋게도 내가 있다. 나는 이제 다른 책을 구입하면 된다. <하얀 성>이라든가 <눈>이라든가 시린 겨울의 찬 온기를 마구 뽐내는 그런 리스트로 말이지.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

 

때맞춰 찾아온 이벤트에 읽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넣어서 결제하고 기다리는 즐거움을 잃었다. 책을 받았다. 내게는 터키어를 전공한(정확히는 중앙아시아어다) 친구가 있고, 이스탄불이 낯설지 않다.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두 문화의 빼어난 점만 간직한 도시라고 터키를 방문한 이들이 말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묵이 그리는 이스탄불의 1960년대 풍경이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문화적인 면에서 여자에게 기대되는 첫경험이나 순결같은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이 소설의 주인공 케말이 이스탄불의 상류층 서른 살 청년이기 때문에 내가 보고 있는 이 배경이 이스탄불의 보편적 모습인지 잘 모르겠는 것만 제외하면 소설이 향하는(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완벽하다. '사랑'이다. 그것도 44일 사랑하고 평생을 찾아헤매는, 영원에 걸친 어느 남자의 어떤 여자를 향한 사랑이다. 다소 이질적인 터키식 이름이 집중도를 흩트리지만 마르케스만 할까, 제자리를 찾는 순간 곧 빠져든다. <순수 박물관>은 마법같다.

 

케말은 시벨과 결혼할 예정이다. 좋은 집안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은 요조숙녀로, 꽉 막히지는 않은(그러니까 순결을 고집한다던가 하지 않는) 현대적 여성으로, 집안에서도 기대를 한몸에 받는 커플이다. 그가 이뤄온 것만큼이나 그녀와의 미래가 탄탄할 거란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먼 친척뻘인 이모(고모)의 딸 퓌순을 만나면서부터다. 열 두 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수줍으면서 강렬한 그녀의 매력에 하염없이 빠져들어간 그는 용기를 내보기도 전 이미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그녀를 끌어당겨 안아 침대로 간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끌림이 먼저 서로를 지배한 것. 그는 그 여자를 가졌지만 계속 갖고 싶어하고(잠자리 몇 번 한 걸로 여자를 다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지만, 누구를 알기 위해선 늘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침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벨과의 결혼을 깨거나 엎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쁜 놈. 안정된 결혼과 끌어당기는 강렬한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지만 곧 시벨과 결혼하여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이 '사랑'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녀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모른 채 초대장을 보낸 그는 결혼식 이후 다시는 퓌순을 보지 못한다.

 

퓌순을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되고나서야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깨닫는다. 그녀에 대한 사랑은 저울질해서는 안되는 감정이었다는 걸 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 사랑은 늘 끝났기 때문에, 잡을 수 없어서 더 간절해진다. 이스탄불에 있는 순수 박물관에 대해 말해보자. 파묵은 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실제 박물관 개관을 계획했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한 배경과 소품, 케말과 퓌순의 사랑을 매개하는 것들을 직접 수집해 오브제로서의 박물관을 꾸렸다. 그리고 개관했다. 소설을 읽고 방문한다면 박물관에서 그들의 사랑흔적을 찾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모든 것이 있어도 케말과 퓌순은 없단다. 아쉬운 소식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물관은 지금껏 천안에 있는 '독립 기념관'이었다. 커서는 못 갔지만 어릴 적 몇 번의 기억만으로 시대별, 주제별로 번호가 붙어있어 하루종일 관람해도 끝까지 가기가 벅찬 이곳은 환상적이면서도 아팠던 어린 시절 가장 큰 아이러니였다. 독립하기 위해 발버둥쳤던 세월은 누군가에게 눈물이었을텐데, 아픔을 재현한 곳에서 나는 즐거워하다니 모순도 그런 모순이 없었다. 순수 박물관을 방문하는 자국인들의 마음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곳은 역사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사랑'을 담은 곳이자, 지나간 시대의 터키문화를 한눈에 전시한 곳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묵의 <순수 박물관>의 오브제를 전열한 공간이지만 말이다.

 

예전에 전경린은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이란 소설에서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이 헤어지면 함께 나눈 '사랑'은 다 어디로 사라질까 궁금해했고, 나는 지금 이 순간 잃어버린 내 순수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다시 오는 게 진리지만, 한 번 잃어버린 순수는 곧 과거와도 같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그걸 알고 있다. 오늘이 내일이 되는 순간, 오늘의 순수는 내일 속에 없다는 것을. 지금도 케말이 찾아헤맨 것이 오로지 퓌순이었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그는 결국 잃어버린 자기 사랑과 용기내지 못했던 비겁함과 돌아오지 못할 과거의 순간을 평생토록 찾아헤맨 게 아닐까. 어떤 한 존재가 오로지 다른 한 존재를 사랑이란 이름으로 30년간이나 찾아헤매는 일이 가능할까. 늘 과거를 되새김질했지만 과거가 다시 오길 바라서는 아니었다. 시간은 수평선 위에 있지만 나는 뒤로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선을 일평생 살아간다는 걸 가장 잘 받아들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썼다. 파묵은 이렇게 우리의 지나간 모든 시간들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기도 하니까.

 

시간은 돌아온다. 기다리지 않은 건 우리다. 순수는 그대로다. 변해버린 건 우리다. 시간이 우릴 변하게 했다고 투정하지만 우린 그저 스스로 혹은 각자가 변하고 싶었기에 변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박물관은 시간을 멈춘다. 변한 건 너뿐만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것처럼, 도시 곳곳에 우뚝 서서 우릴 위로한다. 슬프지도, 즐겁지도 않은 순수 탐험이 책을 덮으며 나는 조금 슬펐다. 눈처럼 맑고 깨끗했던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어땠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순수는 박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박물관은 존재의미를 갖는다. 내가 어떤 시대를 여전히 그리워하거나 영광스러워하거나 아파하는 것처럼 그것들은 박제된 채 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케말에게 퓌순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자길 기다릴 그런 시간의 또다른 이름 아니었을까. 그게 아픔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영광이든 그에게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이스탄불을 생각하면 이 여름처럼 습기차고 뜨거운 태양 아래 작은 방 어느 침대 위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하며 땀을 흘리는 남자와 여자가 떠오른다. 그곳에 훗날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인가 따위의 계산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박물관에는 전시되어야 할, 소중히 이름붙여진 그것들만 자리한다.

 

과거에도 내가 있고 미래에도 내가 있다. 늘 지금 뿐이라는 건 너무 가혹한 오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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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8-1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 박물관은 아직 안읽었지만.. 스토리는 대략 알고 있었어요.
마르케스를 언급하셔서 생각난 건데, 어쩌면 이 소설과 콜레라시대의 사랑.을 함께 읽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오르한 파묵에 대한 관심이 아직 끊어지지 않으셨다면 검은 책. 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그건 정말.. 아주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의 전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이리시스 2012-08-19 00:19   좋아요 0 | URL
오, 드림아웃님 특별추천리스트입니까? 그렇잖아도 워낙 많아서 다음은 뭐가 좋을까 생각하긴 했어요. 잘 골라야 할 것 같은 본능적 감이 왔거든요. 호불호도 갈릴 것 같고 작품 편차가 있을 것 같고 아직 터키의 매력을 잘 모르겠어요. <검은 책>을 꼭 다음 타자로 삼을게요.

근데 안그래도 [콜레라-]를 읽기 시작했거든요. 완전 신기하네요ㅎㅎ 통한 건가..( '')

cyrus 2012-08-18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오르한 파묵 읽기 첫 소설이 <순수 박물관>이었어요. 처음에는 두 권짜리를 다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줄거리가 너무 좋아서 끝까지 완독한 기억이 나네요, 한 여자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남자 주인공의 순수함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딱해보였어요. 시간 나면 또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

아이리시스 2012-08-19 00:1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남자 주인공이 그렇게 감성주의자로는 안 보였는데, 그 사람이 찾던 건 퓌순 뿐만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당연하겠지만. '사랑'이라는 그 순수한 본연의 대상을 평생토록 찾아나선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이 좀 애틋하게 느껴지긴 했어요.

시루스님은 또 다른 작품 뭐 좋았어요? (의견모집중)^^

댈러웨이 2012-08-1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 박물관 두 권 짜리였어요? ㅠ.ㅠ
오르한 파묵은 정말이지 전작하고 싶은 작가에요. 때가 되면 날 잡아서 다 읽을 거에요, 반드시,라고 말은 하지만...

아이님, 마지막 긴 두 문장, 오래 읽었어요. 저런 생각은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남녀간의 케미스트리는 원래 그런거에요. 알잖아요. ( ")



아이리시스 2012-08-19 00:08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 '순수 박물관'이 파묵의 넘버 1,2,3는 아닐 것 같아요. 뭐 쓰리쯤에 넣어줄까....요?
작품들이 각각 편차도 있을 것 같고, 상이한 매력이라 어쩌다 가끔 발이 푹 빠지기도 할 것 같아요.

다음 작품으로는 그..댈러웨이님 서재에서 본 한 권이랑 드림아웃님 추천작으로 볼 겁니다!
(저 사야될 책 천지군요!)

그래도 다시 선물받은 [롤리타] 하고 전자책에 든 [콜레라-]랑 [채털리-] 꺼내오는 참인데.. 나 책은 더 필요없어요. 후훗.( '')

2012-08-18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9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9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19 0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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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0 22: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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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7: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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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9 1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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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로하 2012-08-21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이름은 빨강>을 인상깊게 봤는데 <순수박물관>은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기간이 지나 반납한 슬픈 역사가..ㅜ
담번에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그런데 <검은책>을 먼저 읽고 싶은 건 또 뭔지!ㅋㅋ

아이리시스 2012-08-21 17:20   좋아요 0 | URL
순수박물관까지 자국에 턱 지어놓은 파묵이 부러워요. 내이름은 빨강은 썩 끌리지가 않다가 반값할 때 책사는 것도 놓치고.. <검은 책>이 한 권짜리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