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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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15일 월요일




    들라크루아는 허풍쟁이였던 모양이다.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옥상에서 떨어뜨린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그걸 그려내지 못하는 이는 화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머릿속의 물건이 아니라, 실제 낙하 중인 물건을 눈에 담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가? 눈으로 좇기에도 벅찬 그 짧은 시간, 말 그대로 ‘순간’이 아닌가 말이다. 그동안 대체 뭘 그리라는 것인가?


    사실 들라크루아는 떨어지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남자’라고 했다. 그가 남긴 진짜 말은 이렇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있다. 그가 4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사이에 그를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영어로는 draw가 아니라 sketch로 번역됐다. 그리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 숙련되어 있지 않다면, 당신은 결코 걸작을 만들어낼 수가 없을 것이다.”


    화가란 어떤 사람인가? 수많은 철학자, 평론가, 미술학자들의 정의가 있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화가들이 있었다. 미술을 공부하면서 나는 ‘나에게 화가는?’이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했다.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것은 미술을 바라보는 나를 다듬어줄 작업이었다. 그런 와중에 들라크루아의 말을 만났고, 어렴풋이 아틀리에의 지독한 유화 냄새가 코에 스쳤다.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은 방에서 수 년 간 미술을 공부하던 한 청년에게 화가는 그런 존재였다. 춤추듯 날아가는 창밖의 새 한 쌍을 우연히 본 화가. 그녀/그는 황급히 화구(畵具)들을 챙겨 들판으로 뛰어가거나 골목 굽이굽이를 하늘만 바라보며 돈다. 고백하건대, 나는 수많은 완성작들보다는 대가들의 드로잉과 스케치를 보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흑연의 매캐한 광물 냄새에서 피어오르는 눈의 세계. 내가 보는 미술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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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을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생각하는 건 도대체 알 수 없는, 번뜩이는 창조의 순간이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얼마간 시도 썼었고, 지금은 글도 쓴다. 부모님 덕분에 일찍 음악을 배워 선율을 다룰 줄 알고, 따지고 보면 그림을 아주 못 그리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글을 빼면, 도무지 오랜 반복과 깊은 숙련을 해본 것이 없어서 책에 실린 모습 이면의 예술이 내게 속살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생각해보니, 글도 모르겠다. 독자의 삶으로 적잖은 걸 읽고 생각하고 썼지만 도대체 나는 무엇을 알고 그런 작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그마저도 모르겠다. 요컨대, 창조가 궁금한 것이다. 그 앞에서는 흡사 관음증 환자처럼 어디 들여다볼 구멍은 없는가, 기웃거리게 된다. 모든 작업은 극도로 은밀하다. 정말 은밀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된 거, 그림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된 거,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작정했던 것이다. 대학 도서관의 도판들은 너무 작았다. 차라리 확대할 수 있는 모니터로 보는 것이 나아 그렇게 했더니 몇 주 사이에 그냥 눈이 침침해졌다. 그렇게 몇 년을 하다 보니 화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눈 여겨 본다는 말은 쉽게 쓸 만한 것이 아니다. 작은 색점 위에, 아니 정확히 위는 아니고 그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살짝 빗겨나간 또 다른, 아랫것보다 조금 더 밝은 색점이 있다. 그것을 멀리서보면 화폭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화가가 그 오랜 옛날에 봤던 빛이다. 빛줄기이자, 그 빛을 튕겨낸 한 물체의 표면이다. 미술은 내게 본다는 것의 여러 의미들 중에서 가장 묵직한 뭔가를 알려줬다. 화가는 어두운 우물 속에서도 빛을 볼 것이고, 글자에서도 그림을 찾을 것이다. 어차피 ‘쓴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 안에 포함되는 말이니까.


    미술은 이렇게 의미하는 바가 많다. 한 번 보고 아름답다고 느껴 그 감정을 여러 번 누리고자 전시관을 찾거나 도록을 사서 보는 것도 좋다. 아니, 좋은 일이다. 그런 사람은 그럴 줄 모르거나 그럴 수 없는 사람보다 더 풍성한 과일 바구니를 손에 쥔 사람이다. 다채로운 향은 삶의 사계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미술에서 감정만 느끼거나 향기만 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 있다. 바로 미술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는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을 통해 가능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의 노력과 조금의 도움이 필요하다.


    조이한과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 읽기』에 이어 옛 공부를 추억하며 두 번째 책을 추천한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다. 그러고 보니 또 진중권이다. 추궁해도 어쩔 수 없다. 추천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기존의 이야기들을 밋밋하게 재탕하는 책들은 읽지 않는다. 다행이도 미술은 오래도록 붙잡고 있었던 분야라 관련 신간이 나오면 들춰보는데, 몇몇 국내 저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근래 들어는 도판을 많이 넣어 책값만 올리고 내용은 그 값을 전혀 못하는 책들이 많다. 미국과 일본에서 번역되어 들어오는 책들의 높은 수준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가뜩이나 신간이 적다는 게 이쪽의 문제인데. 아쉬움을 달래며 서재를 돌아다녀본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어르신들의 말을 따라하고 싶은 건 아니나, 나에게도 믿고 읽는 저자들이 생긴 모양이다. 이 추천은 미술을 훑는 이들보다는 좀 더 깊어지는 눈을 추구하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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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분이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나는 너무나도 어려운 현대미술의 이론과 미학을 보고는 ‘그래 네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게나 악명이 높은지 한 번 보자.’라는 생각에 악에 받쳐 미술공부를 시작했어요.” 현대미술은 물론이고 미술 다방면의 책을 낸 분의 조언이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미술 공부를 할 적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못했다고 해야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그분은 미술을 ‘뚫어’보려고 공부를 시작하셨지만 나는 경우가 달랐다. 호주 어학연수 시절에 본 풍경화들의 경이로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Der Mönch am Meer)>을 봤을 때 느낀 감정 같은 것. 앙(仰), 숭(崇), 존(尊) 등의 오래된 신성한 느낌. 시드니의 성 메리 대성당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달려들던 그 압도의 순간들. 요컨대 미술은 분명하게, 아주 선명하게 인상을 남기고 떠나갔다. 미술이론을 공부하게 된 건 훨씬 후의 일이다.


    하지만 내게 다가왔던, 미술을 전혀 모르던 어린 고등학생에게 쏟아졌던 어떤 감정들은 미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공부를 하며 알게 됐다. 나의 체험은 진중권의 이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관객은 작품으로부터 정서적 감동을 받거나,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지성적 자극을 받거나,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가끔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한다.”(진중권의 책, 15쪽) 가장 후자의 경험은 시대가 지날수록 (전혀 특권인 것이 아닌데도) 소수의 특권처럼 회자될 것이지만 제임스 엘킨스의 『그림과 눈물(원제 :Pictures & Tears)』을 읽어보면 대단히 낯설거나 동떨어진 것은 아닌 듯도 하다. 여하튼 나의 경우는 정서적 감동에서 시작해 지각적 쾌감을 얻었고, 지금은 지성적 자극을 받고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서적 감동에 머물기를 좋아하며 원한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그런 이들이 2번 지각적 쾌감에서 3번 지성적 자극으로 넘어가도록 독려할 수 있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양서(良書)’라고 부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일단 진중권의 미학책은 제외하자. 그의 다른 책들을 읽어본 거의 모든 독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쓸모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쓰는 것 같은데 잘 읽어보면 요약이 아니다. 할 말을 다 하면서도 분명한 임팩트가 매 장 있다. 전문적인 미술사/미학 원서들에는 저자 자신의 주장을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사례들과 (기존 권위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한 장치인) 에두른 말들, 그리고 중언들이 많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이 책은 군더더기가 없다. 그렇다고 인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책 표지에는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 읽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자칫 그가 아주 다른 시선으로 작품을 보는 것처럼 선전이 되어 있는데, 이는 곡해의 소지가 있다. 그가 펼치는 사유의 놀이는 다른 학자들의 이론과 기존의 시각 이곳저곳에 걸쳐 있다. 그만의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을 ‘읽는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단 이 책을 읽기 전에 여기 실린 작품들을 눈으로 직접 보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차린다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미술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퍼즐조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컨대 그런 신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도 다 단련의 일이다. 굉장히 두꺼운 고서를 판독하는 파놉스키의 사진을 언젠가 본 일이 있는데, 그 모습은 한 학자가 작품을 둘러싼 세계와 그 의미망을 알아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독과 겨루는지를 보여준다. 진중권은 그 고독의 시간이 빚은 오랜 전통 위에 서서, 자신이 지적으로 호기심을 가졌던 여러 작품들을 배열해놓고 우리를 열두 장의 놀이 무대에 초대한다. 그렇다면 그 놀이에서 그는 전적으로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가? 그럴 순 없다. 누구나 이길 수 있는 무대다. 단, 그처럼 충분한 근거를 카드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 독자들은 그 놀이법을 알게 된다. 그것도 무려 열두 번에 걸쳐서. 모든 판을 옮겨놓을 수는 없으니 그 중 가장 오래 발붙여본 무대만 골라서 밑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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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도 사람이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서 그림에 숨긴다. 화가도 사람이다. 시대 속에 산다. 그 시대의 눈을 떠나지 못하므로 표현도 얼마간 제약을 받는다. 그래서 그렇게 그릴 수밖에 없다. 이 당연하고도 쉬운 말을 간과하지 않으면 그리다 만 것 같은 작품도 뭘 그리려고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제 1장에 소개된 <조롱당하는 그리스도>의 해석은 우리에게 교훈을 줄 만한 훌륭한 사례다. 내게 백의(白衣)의 화가로 기억되는 프라 안젤리코는 이 그림 속에 여러 개의 ‘주인 없는 손’을 그렸다. 실수일 리는 없다. 그가 실수할 리는 없다. 실수라고 생각하는 관람자도 아마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답은 “다 그리지 않아도 당시 사람들은 알아봤다.”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지만 진중권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중세인이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을, 오늘날 우리는 스크린 위에 고해상의 동영상으로 투사한다. 이를 우리는 ‘발전’이라 부르나, 그 발전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화의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외려 관객의 상상력은 줄어드는 게 아닐까?”(진중권의 책, 33~34쪽) 상상은 피안(彼岸)을 바라보는 자의 것이리니……


    제 6장으로 가면 ‘역행하는 미술’이라는 희한한 현상을 볼 수 있다. 피카소는 괴상한 화가였다. 기존의 대가들과 다른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대가들과는 ‘다르게’, 어떻게든 빤하지 않게 그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렸다. 그의 중심에는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있었다. 아프리카 공예품들을 전시한 곳에 가서 그가 받은 쇼크는 현대미술의 중대한 사건을 예비했다. 오른손을 버리고 왼손으로도 그렸다. 자신을 화가의 반열에 올려준 첫 번째 계단인 유년의 뛰어났던 회화 실력을 완전히 잘라내려고 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비단 피카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20세기 초반의 기이한 현상과 함께 화가들이 주목한 건 그야말로 괴짜였다. 정신병원의 환자들이 그린 작품에서 영감을 받거나 직접 마약을 하기도 했다. 다르게 그린다는 건 그 정도로 어렵고도 심각한 문제다.


    진중권은 카로토가 그린 한 점의 작품에서 시작해 ‘진화론적 사고’를 전복시킨 20세기 회화까지 단숨에 뛰어간다. 우리의 손에는 미술사학자인 리글의 ‘의지(wollen)’라는 단어가 쥐어진다. 기억하자. 화가에게는 능력이 아닌 의지가 중심이 된다. 만약 A와 같이 그렸다면 그건 A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A처럼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129쪽에 나온 뒤뷔페의 작품은 현대미술을 비난하는 일부 대중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만하다. 하지만 미술은 이제 더 이상 재현(representation)이라 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셈인가! 현대미술의 현상은 고전미학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거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화가를 ‘의지를 가진 존재’로 바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현대미술의 도래 이후 지금까지도 우리가 쉽게 하지 못하는 그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훨씬 넓은 품을 열어줄 것이다. 하지만 결단코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낯섦을 잃으면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 어려우니 쉽게 설명해주겠다고? 그런 어리석은 말이 또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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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광인의 배(여기서는 푸코에 대한 지식이 살짝 도움이 되지만 몰라도 상관은 없다.), 화가와 주체 사이의 표현 이야기, 풍경화가 역사화로 뒤바뀐 이상한 해석 이야기, 트롱프뢰유, 도상과 엠블럼, 해석 논쟁의 장 앞에서 현대의 새로운 장을 마련해준 고야의 <개>를 둘러싼 이야기…… ‘보는 것’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미술 이외의 이야기들과 함께 잘 버무려져 있다. 엮고 풀어나가는 저자의 방식이야말로 ‘독창적’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에서 각 장을 여는 작품들 중 서양미술을 교양 삼아 배우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건, 조르조네의 <템페스트(La Tempesta)>,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Madonna dal collo lungo)>, 티치아노의 <신중함의 알레고리(Allegoria della Prudenza)> 정도일 것이다. 판화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뒤러의 작품이 알려진 정도까지. 간간이 유명한 작품들이 양념처럼 나와 이해를 돕긴 한다. 이렇듯 정통 미술사에서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그리하여 대중에게 별로 알려주지 않았던 작품들을 골라 그 위에 지적 호기심의 그물을 쳐놓은 진중권의 솜씨에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일개 독자가 그에게 ‘솜씨’라는 표현을 쓰니 발칙해 보이지만, 아마 미술 공부한 사람들은 동감할 것이다. 이 작품들을 이런 식으로 마름질해서 소개하는 건, ‘스투디움’ 속에 ‘푼크툼’을 씨줄과 날줄로 엮는 건 무릎을 칠 만한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재단의 기술을 지닌 저자는, 국내로만 한정해놓고 보자면 거의 없다. 『천천히 그림 읽기』 추천글에서도 쓴 말을 여기서도 다시 하겠는데, “단순한 지식 나열에다가 화려한 컬러도판들, 깔끔한 도표 정리와 가독성 좋거나 특이한 폰트들로 치장한 작금의 미술 상식책들”은 우리의 폭을 넓혀줄 수 없다.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작품에 대한 표준적 해석을 넘어서는 직관을 제공해줄 때, 관객은 남이 찾아놓은 의미를 재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게 된다.”(진중권의 책, 22쪽)


    내가 미술 상식책에 의존하는 공부를 오래 전에 관둔 건, 미술이 그보다 훨씬 깊은 우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철학자도 아니면서 이런 말 쓰긴 창피하지만, 나에게도 분명한 전회(轉回)가 있었다. 그렇게 한 바퀴를 구르고 나니 한 손에는 어떤 종류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해석의 권위에 대항하는 무기. 물론 기존의 해석들은 훌륭하다. 더할 나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작품 하나에서 읽어낼 수 있는 세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게 해주며,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함부로 넘보지 말라.”라고 엄중히 경고하는 듯도 하다. 세상을 깊이 알아본다는 것이 호기심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만한 작업이 아니듯이.


    하지만 진중권은 분명 푼크툼을, 우리가 작품에서 느끼게 되는 그 사적인 경험을, 작품과 나 사이의 고독한 관계 속에서 느끼는 경험을 재고해보라고 한다. 재고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아니,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의 제목은 ‘교수대 위의 까치’. 제 5장의 놀이 무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뤼헐의 작품명이다. 진중권은 그 작품에서 뒤집어진 세상을 보는 브뤼헐의 날카로운 시선을 읽어낸다.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로 가득”(115쪽) 찬 세상이 기이한 모양을 한 교수대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브뤼헐이 그렇게 세상을 보기에 교수대가 3차원 공간에서는 불가능한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라는 해석이다. 나는 진중권이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작가는 세상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 우리는 그림을 보고 세상을 본다. 작가가 저마다 다르게 세상을 보는 것처럼 우리도 저마다 다르게 그림을 본다. 그리고 둘은 그림에서 만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 과정에서 해석은 열린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본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교수대 위의 까치(De ekster op de galg)>의 교수대가 3차원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브뤼헐은 교수대의 왼쪽 기둥을 교묘하게 안에서 바깥으로 휘어지게 그려 우리의 눈에 약간의 착란을 일으킨다. 기둥 그 자체도 고르게 굵지 않아서 (자세히 보면 왼쪽 기둥의 배 부분이 머리 부분보다 미세하게 굵다.) 원근을 깬다. 그런데도 진중권은 교수대에서 부조리를 읽는다. 아니, 부조리를 브뤼헐이 그렸다고 읽는다. 그걸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반대다. 브뤼헐은 이미 죽었고, 작품은 해석의 눈앞에 놓여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이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부조리하지 않은가. 이 해석은 진중권의 푼크툼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스투디움에서 비롯된 것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미술을 읽는다는 건 그런 가치를 지닌다. 이 책에서 자신의 반쪽을 찾아내길. 독자들에게 이 책을 건네는 내 마음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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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1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교수대위의 까치였군요. 진중권 문화평론가는 글 하나는 잘 쓰는 평론가입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