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06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
서양이 ‘아시아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언론보도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을 드높였던 때가 기억난다. 그 때 나는 세상 돌아가는 바를 거의 몰랐기 때문에 대학입학 수시1차 선발에 논술문제로 나오지 않을까 싶어 한 번 들여다보는 정도에 그쳤지만 돌이켜보건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진중권, 박노자, 강준만 등의 글을 읽고, 더불어 홍세화의 ‘서구 對 우리나라’의 비교를 읽으면 그 가치의 테두리가 얼핏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책을 덮고 나면 그 모든 가치들을 역사의 유전으로 물려받은 내가 객관적인 입장에 서기란 참으로 어렵다.
서양미술을 공부할 때에는 서구의 사고 발전과정에 주목하면서 특히 모더니즘의 파격이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클 것이라고 예상한 적도 있다. 바깥 것을 보다보면 늘 나의 것이 모자라 보이는 법이리라. 그런데 또 다른 면에서는 아시아적 가치를 추종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인 <차마고도>는 KBS의 ‘인사이트 아시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인데, 이 프로젝트는 말 그대로 (때마침 서양이 동양을 주목하는 추세에 맞물려) 아시아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취지를 갖고 있다. 유교와 불교는 물론이고, 아시아에서 발원한 국수의 문화, 잃어버린 옛 가치들과 대안적 의미들을 발견하고자 했던 차마고도의 험준한 세계 등을 비춰준 적이 있고, 유독 관심을 많이 받았던 <차마고도>는 작년 12월에 영등위로부터 다큐멘터리 부문 “좋은 영상물”상을 받기도 했다.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해보자면, ‘인사이트 아시아’ 프로젝트는 <차마고도> 외에도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를 제작해서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 이후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웹사이트가 개설되어 있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아시안 트리(가족 관계)’, ‘아시안 비트(장단)’, 불교(같은 주제로는 작년 말에 팔만대장경과 대안적 불교 관련 다큐멘터리인 <다르마>가 있었는데, 이는 인사이트 아시아 프로젝트가 아니다.)와 같은 아시아적 중심 주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루 빨리 계획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결국 나는 ‘아시아적 가치’ 속에서 서양을 바라보고 이따금 제 태어난 곳으로 회귀하는 연어와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우리는, 특히 우리와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발전에 있어 민주주의가 반드시 서양의 노선을 밟을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곤 했고, 그 중심에는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가 있었다. 이에 민주주의를 앞세워야 한다고 반박한 故김대중氏의 주장이 우리나라와 싱가포르 사이의 사상적 차이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일부 병폐로 기억되고 있는 가치를 애써 지키려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 가치는 경제발전을 가져왔고, ‘아버지’상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대중들에게 심어놨으며, 무엇보다도 옛것을 생각했을 때 연장자들이 느끼는 ‘따뜻함’의 촉각적 가치들로 비약되기도 했다.
민주주의가 대중에게 있어 소중한 가치라는 오랜 생각에 수긍한다면 우리는 소위 ‘박통’시대로 대변되는 낮은 수준의 인권에 강한 부정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강력한 카리스마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다. 다행이도 우리나라는 젱하스가 말한 단계를 잘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반(反)식민지주의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를 요구한다.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이유도 같다. 그 과정에서 지도자들은 국가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데, 이 시기의 이데올로기는 상흔으로 남지만 겉으로 보기에 국가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 과정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대중들에게는 ‘평등’, ‘민주’라는 가치들이 주목받는다. 평등과 민주의 형태는 서양이 백년은 훨씬 더 걸린 오랜 시간동안 고통과 갈등을 통해 도출해낸 것으로,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 막 경제발전을 이룩한 신흥 근대화 국가에게도 요구된다. 우리나라로 이를테면 7~80년대이다. 그 이전의 항쟁도 세계사적으로 보자면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다. 알다시피 서양과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매우 다르다. 문민정부, 참여정부 이후 우리나라의 민주화는 상당부분 진행되었는데, 아직 상흔을 자랑스럽게 기억하는 이들, 가진 것으로 내리 누르려는 이들, 본래 민주화는 갈등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내비치는 상황이라 누구나 만족할 만한 수준의 상태에는 이르지 못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갈등을 조정하는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의 소통부재도 큰 문제 중 하나이다. (마침 소통과 관련해서 좋은 다큐멘터리가 KBS 일요스페셜로 방영 중에 있다. SBS에서도 저번 주에 차두리氏와 북한 정대세氏가 함께 출연한 소통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바 있다.)
중국의 한 미팅 TV 프로그램
젱하스에 따르면 아시아적 가치는 이런 것들과 유사하다. 아나톨리적 가치, 슈바벤적 가치, 롬바르디아적 가치(슈바벤과 롬바르디아는 지명으로 전자는 독일이고, 후자는 이탈리아이다. 그런데 아나톨리는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했다. 생각해보건대 이들은 개인보다는 전체를 강조하는 우리의 가치판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곳일 것이다.), 이슬람적 가치, 실존사회주의적 가치, 신권주의적 가치, 사회주의-조합주의적 가치 등과 말이다. 몇 년 간 미술사를 공부했기에 이 독일 석학의 비유에 내가 아는 것 하나를 덧붙여보자면, 반(反)종교개혁적 가치도 어울릴 것이다. 이런 가치들은 서구적 민주주의와는 흔히 상반되는 것이라 불리지만 지역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양상들은 모두 다르다. 다만 수구적 성향이라는 것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가치들에 대해 저항하는 가치들이다. 그러나 아시아적 가치는 탁월한 경제발전의 덕을 봤다는 점에 있어서 상기 가치들과는 달리 성공 사례 중 하나로 서양의 관심을 받은 것이다. 이슬람과 실존사회주의, 신권주의는 큰 실패를 맛봤고, 경제발전의 단기적 희망도 보이지 않을 때에는 온갖 부정과 비리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겪은 병폐는 오히려 그들의 가치를 더욱 철저하게 지키고자 하는 보수적 성향을 키우게 된다. 이들은 사상과 종교로써 세속과 저항하려고도 한다.
이런 저항적 사상과 관련해 나는 최근 중국을 주목했는데, 학자가 아니라 체계적인 분석은 하지 못했지만 최근 중국의 태도는 과거와는 다르다. 작년 말일에 에드워드 웡(Edward Wong)이 뉴욕타임스紙에 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기사는 매우 흥미로웠다. 웡이 주목한 것은 중국의 각 방송국들이 ‘변화하는 중국’, ‘소통하는 중국’을 모토로 해서 얼마간 소위 ‘된장남’과 ‘된장녀’를 연상케 하는 젊은 남녀들의 미팅 프로그램을 방송한 것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케이블 TV에서도 이런 것들을 많이 해주니, 새삼 어떤 프로그램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 프로그램들은 중국 CCTV의 저녁 뉴스가 기록하는 높은 시청률을 조금씩 나눠갈 만큼 큰 주목을 받았다. 프로그램을 대충 살펴보면 ‘막장’에 가깝다. 어떤 여자는 “나와 손잡고 싶으면 거액을 줘야 할 거에요.”라고 콧대를 세운다. 사회자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는 “나의 남자친구가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반문한다. 남자도 막장이긴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중국 젊은이들의 ‘아시아적 가치’를 희석시켰고, 급기야 정부가 나서 그 프로그램들을 폐지하거나, 혹은 벌금을 부과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나 역시 채널을 돌리다보면 일부 케이블방송 프로그램들이 대중의 다양성, 정신적 가치, 혹은 한국적인 것들을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목격하곤 한다. 가치가 위협받으면 자연스럽게 그 프로그램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마련이다. 즉물적 가치들의 선정성과 공격성이 얼마나 위력적인지는 우리 역시 겪어봐서 다 알고 있다. 중국 방송계가 처한 상황은 지금의 우리와 진배없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치의 두둔과 강조를 넘어선 ‘제한’이 중국인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뉴스와 신문에서는 중국의 신흥 갑부들이 중국정부의 강력한 경제압박을 피해 이민을 선택한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 현상은 중국에게 큰 골칫거리이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을 압박하며 소위 ‘차이메리카’의 시대를 열기 위해 국제 석유시장을 요모조모 공략하고 있고, 항공모함을 건조하여 미국의 태평양 라인을 경계해 베트남, 필리핀 등과의 남중국해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보이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정작 안방이 문제인 셈이다. 돈을 가진 이들이 나가버리면 이미 흉흉해진 내부 경제가 얼어붙거나 흔들리게 될 것이 뻔한데, 막상 중국정부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고, 그들의 출혈만 계속되고 있을 뿐이다.
재작년으로 기억한다. 중국정부가 대대적인 공자(孔子) 알리기에 나섰을 때였을 것이다. 그 무렵 우리는 유교적 가치에 대해 재고하고자 했고, 인문학계에서도 열렬한 반응을 했었다. 작년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관중과 공자>였으니 사상적 조류는 지속된다고 하겠다. 하지만 정작 중국정부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자율적 시장의 동향이 아시아적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는데, 다만 중국의 아시아적 가치는 우리나라나 싱가포르와는 달리 실존사회주의적 가치의 맥락에서 진행되는 것이므로 앞으로 그들이 시장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될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서구에서는 중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두려워하겠지만.
젱하스가 결국 ‘아시아적 가치’를 논하는 짧은 장에서 하고자 했던 말은 그것을 맥락 없이 의미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나는 이 경고가 섬뜩하게 들린다. 까닭은 이렇다.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은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다양한 소통 매체를 활용할 수 있고, 이미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상의 이동과 변화가 이전 세대보다는 더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나, 유연성이 더 강화된 세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그런 세대들이 점차 사회를 주도하는 시대에 접어들어 세계경제의 급랭이 큰 문제로 떠올랐고, 지난 가치들을 전복시키려는 사상적 움직임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 병폐의 타파를 위해서라면 이 유연한 세대들은 어떤 것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다면 예전의, 폐단이라 불린 가치들이 어떤 대안으로 급부상하는 것을 사회가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독일의 젊은이들 중에서 히틀러를 추종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젊은 극우세력의 등장은 우리에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커지고 있는 상태에서 압박을 받는 것은 우리와 중국이다.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배신감은 전 세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가 헛것을 쫓았다는 것이다. 이 갈등 상황을 중재해 줄 수 있는 소통이 부재하게 된다면, 물론 그것은 사회적 역량에 따라 달라지므로 나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수준에 많은 기대를 걸게 되는데, 우리는 옛 유물들을 끄집어내 왕을 세우고 독재자를 세우는 일도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독재자가 무너지는 곳도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가 그러한데, ‘아랍의 봄’이라 불리는 일련 사건들이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긍정적 미래를 예단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러고 보니, 그 꽃은 피를 자양분으로 발화하는 것이라 우리의 것과 매우 닮았는데, 상황은 결코 닮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경제적 수준은 자국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줄 만큼 준수하지 못하다. 그곳의 독재자들과 박정희의 차이도 그렇다. (이것이 소위 ‘박통주의자’들이 그의 동상 앞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이유이다.) 미국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의 이권 문제도 놓여 있기 때문에 석유를 놓고 벌어지는 살벌한 싸움 속에서 민주화 과정이 더욱 진행되어야 한다. 결국 그곳 사람들은 리더의 자격을 꼼꼼하게 따질 것이고, 부족국가가 대부분인 북아프리카에서는 빈번한 유혈사태가 불가피할 것이다. 젱하스도 동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은 ‘아시아적 가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고 긍정했지만 이슬람 사회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결론의 장에 앞서 젱하스가 ‘아시아적 가치’를 논하는 이유는 소위 ‘대항 프로젝트’의 세계적 사례들 중 거의 유일하게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진 것이 바로 우리나라와 싱가포르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와 반대되는 사례들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 있고, 일부 이슬람과 북한이 서로 사상과 형태는 다르나 대항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다. 중국은 대단히 애매한 태도를 지니고 있어 ‘중국적 가치’라 따로 불러야하지 않을까 싶다. 여하튼 이런 과정들이 부단히 진행되는 중에 발생하는 각종 갈등들은 헌팅턴의 표현처럼 ‘문화 충돌’이라 부를 수만은 없는 일이다. 각 사례들을 젱하스가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라, 독자들이 그들 나름의 사례찾기를 해야 하는 장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남은 이야기는 하나, 바로 중재이다. 과연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젱하스는 어떤 고견을 내놓을 수 있을까?
- <문명 내의 충돌> 총 리뷰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