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2.01.13

 

 

 

[사진출처] guardian.co.uk

 

 

  정확치 않은 기억으로는, 그 때는 아마 겨울이었다. 한창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소설을 읽겠노라고 벼르던 어린 시절. 카뮈, 가오싱젠, 쿳시, 그라스, 지드, 야스나리. 하지만 이들의 글은 얼마나 어려웠던가. 많은 것을 느끼기는커녕 나의 모자람만 반복적으로 확인했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를 너무 앞당겨 경험한 기분. 처참하진 않았다. 동경은 오히려 커졌다. 단, 문제는 문학에의 열정이 식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고 펜을 굴리며 잠시 공황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까. 체력과 의지가 탁월하지 못한 나는 장애물을 만나면 한참을 머리로 씨름한다. 아니, 씨름만 한다. 문학에도 기초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노벨문학상’이라는 후광만을 바라보다 제 눈 먼 줄을 모르게 된 꼴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근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번 동경한 것은 계속 동경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끈을 만든다. 다행이도 나는 그 끈의 어느 즈음에서 유독 애착을 갖게 된 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알게 되었다. 십 수 명의 사람들과 차례대로 만나 멀찌감치 서 추상적인 이야기만 나누던 차에 어떤 단짝을 만난 기분이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이다.

 

 

*   *   *

 

 

  무언가로부터 충격을 받아 어떤 잔상이 생기는 건 워낙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다. 솔제니친의 이 작품에서 나는 그 충격을 경험했다. 그것도 첫 장에서부터. 솔제니친은 구구절절 뭔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는 소설을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두텁게 낀 성에가 소리를 돕는다. 곧바로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 모든 낯선 상황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별 수고로움 없이 전개된다. 솔제니친이 직접 겪은 체험이 낳은 가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낯섦’이 소설을 익는 내내 ‘익숙함’으로 변하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요컨대, 본래 나는 슈호프 같은 사람이었던 것일까? 노련한 솜씨로 취사부로부터 국을 네 그릇이나 빼돌리고 그 중 하나는 적어도 나에게 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그 사람 말이다. 어떤 경험으로도 이 책의 이야기를 공감하지 못한다. 수용소 생활을 직접 해본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도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그러나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때론 해군 중령 죄수처럼 영창 갈 걸 알면서도 대꾸를 해보거나, 아니면 저열한 페추코프처럼 킁킁거리면서 어디 콩고물 떨어진 곳은 없나 눈치만 살피는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의 일면들에 속속 자리를 잡는데, 단 한 사람만은 될 수 없을 듯하다. 반장 추린 말이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은 전쟁터가 아닌 수용소에 더 적합한 말이지 않을까. 강한 자도 총을 맞으면 죽을 수 있으니. 반면, 솔제니친의 이 소설에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다.”라는 비공식적인 정답이 여러 죄수들의 행동과 입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나치게 정직하거나, 열심히 하거나, 혹은 도덕적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눈치를 잘 봐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원 전체의 목숨을 좌우하는 반장의 말을 잘 따라야 하고, 적절한 뇌물은 필수이다. 강하면 부러지는 곳이 다름 아닌 수용소이다. 형기가 “전혀 줄어들 기미가 없는(pg.76)” 이곳에서는 추위를 피하고, 먹을 것을 쫓고, 휴식을 갈구하는 삶에 맹종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장 내일이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pg.76).”이라, 슈호프는 굴종하지 않는 해군 중령 죄수의 미래도 결국 죄수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며 넋두리로 생각해본다. 이런 상황에 우리가 빠지게 된다면 머리와 온 몸의 감각은 오직 하나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앞이 캄캄한 곳에서 본능적으로 하게 되는 행동. “발밑만 보고 걸어 다니는(pg.82)” 것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의 수용소가 마냥 시베리아의 칼바람 같은 것은 아니다. 이곳도 엄연히 하나의 공동체이다. 누군가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할 관계라 해도 인정(人情)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소설의 낯선 환경이 읽는 이에게 금방 익숙해지는 까닭. 온갖 부류의 죄수들의 ‘온갖 이야기’는 또한 우리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극대화되어 있다.”는 것만 빼곤 어떤 것 하나 본질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없다.


  모스크바 사람인 체자리는 슈호프의 반원들에게 어렵지 않은 작업을 배당받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그 어떤 이들보다 쉬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엄동의 바깥에서 땀 흘릴 정도로 일하는 죄수들이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반장도 체자리는 존경하는데 말이다. 슈호프는 오히려 그에게 친절하게 행동하면서 그로부터 조금의 빵이나 국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의 소포를 지켜주고, 몰래 숨겨 왔던 만능칼도 빌려주면서 따뜻하게 배를 덥힐 수 있다면 그 무엇이 아쉬울까. 연차가 별로 안 된 해군 중령 죄수도 말은 명령조로 하지만 작업장에서는 녹초가 될 때까지 열심히 일한다. 알료쉬카와 같은 온순한 죄수는 말 그대로 ‘보물’이다. 하이에나와 같은 페추코프도 때론 불쌍해 보인다. 진짜 죄수든, 억울한 죄수든, 일단 그들의 편에 서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그들이 증오하는 간수들은 정말 악마처럼 느껴진다.


  반원들은 카리스마 있는 반장 추린의 비호를 받는다는 까닭에 서로 주동(主動)이 되어 도맡은 일을 끝까지 하고자 한다. 작업장에서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아 수용소 문을 코앞에 두고도 대기해야 할 때에 죄수들은 욕지거리를 한 바가지씩 내뱉으며, 슈호프의 말마따나 그를 죄수들 한복판에 세워둔다면 “송아지 새끼처럼 갈기갈기 찢어(pg.141)” 살점 하나 안 남기고 처참히 죽여 버릴 듯 군다. 하지만 이내 수용소 문을 통과하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랬던 그들이 식당 앞에서는 다시 추위와 굶주림에 굴종한다. 그들은 마치 베를린을 탈환한 옛 ‘붉은 군대’를 연상케 하듯 식당으로 돌진하려는 장면을 연출한다. 모든 이들이 제각각 쓸모가 있고, 행동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식당의 풍경이다. 솔제니친은 그 풍경을 “경건하다.”고 묘사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빵과 국. 그것도 대부분이 썩은 재료로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누구도 식사의 순간을 방해하지 못한다. 따뜻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 “한 번 견뎌보자.”라는 의지가 생기는 까닭이다. 복잡한 삶 속에서 잇달아 좌절을 겪는다고 하더라도 든든한 속은 늘 우리의 뚝심을 격려하지 않던가. 야만적이라 여길 법한 이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을 이가 있을까. 살벌한 군부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이라면 그 서슬 퍼런 시간을 그나마 견딜 수 있게 해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회상해볼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그리고 ‘우리(한국사람)’에게 각인되어 있는 역사의 한 토막도 짧게 소설에 등장한다. 슈호프가 담배를 구하기 위해 라트비아인의 방에 찾아갔을 때, 마침 그 방의 죄수들이 6.25 전쟁(중공군 개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 말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도 ‘우리’를 익숙하게 만든다.


  “다른 놈들이 오늘 죽는다면 나는 내일 죽을 거란 말이다!(pg.195)” 
  독일의 유명한 축구선수 중에 한 명이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더라. 오래된 분데스리가(독일의 프로축구 최상위 리그) 축구팬이라면 알 법한, 소위 ‘사냥개’라 불렸던 (지금은 은퇴한) 그의 투지와 관련돼 한동안 명언이라 회자된 것인데, 그가 말하기를 자기가 누군가에게 한 대 맞는다면 자신은 그의 엉덩이를 두 대 걷어찰 것이라고 했다. 야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손해는 늦춰 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손해 보는 세태에서 인정이 식고, 마음이 인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무엇이 모범이고, 무엇이 도덕인가를 더욱 열심히 논하려는 이때에 우리가 늘 보고 듣는 비리와 혐의들이야말로 진정한 야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다. 언젠가 “도덕은 얇다.”고 말한 적이 있는 듯하다. 역으로 말하면 그것은 도덕의 실천이 어렵지 않다는 희망이기도 하지만 당장은 그저 식어버린 사회를 묘사한 것과 다르지 않다. 수용소의 삶은 점점 익숙해지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체감된다.


  묻는다. 신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솔제니친은 그 부분도 빼놓지 않는다. 불평하는 법 없고, 올곧게 친절한 알료쉬카가 취침 전 슈호프와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두 개의 목적을 발견한다. 둘 다 맹목적이긴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 맹목의 손가락이 어딜 가리키고 있는가가 다르다. 우리는 대개 둘 중 하나이다.
  “왜 영혼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냐구? 알료쉬카, 기도라는 건 죄수들이 써내는 진정서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말해 봤자, 꿩 구워먹은 소식이 될 뿐이고, 거절당하기 십상이란 말이야!(pg.200)
  알료쉬카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슈호프는 이미 담배를 태우며 생각에 잠긴 뒤였다.
  “자넨,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감옥에 들어왔으니까. 하지만 난,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지? 1941년에 전쟁 준비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pg.204)
  그리하여 슈호프는 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논쟁은 결국 큰 의미 없이 끝난다. 어제 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슈호프는 체자리를 도와준 대가로 받은 비스킷 하나를 알료쉬카에게 넘겨준다. 그가 신앙을 강하게 주장해도 슈호프는 알료쉬카가 ‘좋은 놈’임을 안다.


  유난히 ‘운수 좋은 날’이었던 슈호프의 하루는 이렇게 끝난다. 내일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와 “레일을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창에는 두텁게 낀 성에가 이곳이 시베리아임을 알려줄 것이다. 단순한 이곳의 삶에서 “삶”을 쫓는 이들의 묵묵한 전쟁은 몇 십 년이고 계속될 것이다. 책은 얇다. 하루치 분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솔제니친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가 직접 겪은 8년의 형기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이다. 이 책을 가장 밑에 365권 쌓아놓고, 그 위로 여덟 겹을 더 쌓아야 한다. 상상이 불가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 하나 옮겨놓고, 글을 접는다.
  “토끼들의 즐거움이다. 그래, 우리를 보고 놀라는 개구리들도 있다고 좋아하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pg.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