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의 가치사전 -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박민영 지음 / 청년사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2012.01.17

 

 

  나는 올해로 만 스물여섯이다. 보통이면 대학 졸업할 나이에 아직도 3학년이다. 국문학 전공은 나에게 여전히 맞지 않는 레고조각처럼 낯설기만 하다. 대학의 공부와 생활은 이모저모로 나의 기대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군대에 가서 생각을 정돈하기 전까지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핑계는 대지 않는다. 의지박약이었다. 그 때 쓴 글들은 모두 불살라버렸다. 때문에 나의 옛 글은 대학 초년생 무렵까지 썼던 시를 엮은 시집과 제대 이후의 글들로 확연히 구분이 된다. 얼마 전, 나는 이곳의 한 블로거와 함께 ‘자폐적 글쓰기’에 대해 코멘트를 나누다 응원을 하겠다는 요량으로 이런 말을 했었다.


  “천편일률적 글쓰기보다 차라리 안으로 굽어진 글쓰기로부터 뭔가를 얻어내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나 역시 그 때가 무척이나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트라우마는 쉽게 지울 수 없다던가. 새벽녘 한창 예민해질 때에 나는 감성적 사유를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한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 속의 존재가 그리도 두려운 것이다.


  자폐적일 때에는 쾌락도 추구하지 않는다. 반복적, 혹은 습관적 쾌락은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때문에 당시 나는 기쁜 적이 없었다. 무색, 무취, 아니면 건조된 육포 정도였다. 혈기왕성하지도 않았고, 나이에 걸맞은 패기도 없었다. 자폐적 글쓰기라는 것은 진정 공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몰랐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만 더 의욕적으로 생각했더라면 더 많은 성찰을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빠진 물은 별로 깊지 않았었더라. 하지만 익사할 줄로만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굳이 군대가 아니었어도 물 밖으로 힘껏 뻗은 손으로 내가 원래 있던 곳의 공기를 한 줌 쥐어보고, “아, 저곳이다.”라고 외치며, 이윽고 큰 호흡과 함께 얼굴을 물 바깥으로 내밀 수도 있었다. 불교의 표현대로, 그것은 손등과 손바닥의 차이였다.


  손목을 꺾어 양면을 모두 본 어떤 사람의 책을 나는 몇 해 전 읽게 되었다. 그런 책이 있다. “이 책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 서문을 읽자마자 잠시 책을 덮게 되는 그런 책 말이다. 저자도 기형도 시인의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시구를 나처럼 떠올린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낙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쾌락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했다고 했다. 나는 하지 못한 것. 아, 그는 과연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아픈 경험을 뒤로 하고, 나는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은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 장씩 읽어갈 때마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그가 위로할 목적으로 책을 썼는가? 천만에! 하지만 나는 반가운 이 책의 속표지 위에 크게 사인을 하나 그려 넣었다. 날짜를 보니 2009년 6월 25일. 제대한 지 막 반년이 되가는 때였다. 그로부터 얻은 3년의 위안을 다 털어놓기에 이 자리는 너무 작진 않은가. <즐거움의 가치사전>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이야기이다.

 

 

*   *   *

 

 

  내가 읽은 박민영氏의 책은 <이즘>이 처음이었다. 미학을 공부할 때, 철학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려는 심산으로 산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크게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는지, 나는 <즐거움의 가치사전>을 산 뒤 책장에 꽂고 나서야 비로소 의 저자가 바로 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둔감함이 준 뜻밖의 놀라움이라고 해야 하나. 독서에 애착을 갖게 하는 것들은 그만큼 사소한 것들이구나 싶었다. 사실 이런 반가움이 나를 추동한 것은 아니었다. 쾌락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저명한 사례들을 근거로 펼쳐나가는 ‘박민영식(式)’의 명료한 문장은 든든한 벗이 되기에 충분하다. 나처럼 시도 때도 없이 글로써 배설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면 탐낼 만한 내공이 들어 있는 문장이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무관하리라.


  그가 적어놓은 항목들은 무척 많다. 따라서 전문적인 책이 아니다. 가령 이렇다. 근래 들어 읽고 있는 세 권의 책은 모두 심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도 10도>는 종교분쟁 중에서도 제목과 같은 ‘위도 10도’의 분쟁국가 사례를 토대로 한 현장감 넘치는 책이다. <과잉연결시대>는 <위도 10도>보다는 한결 쉽다. 인터넷을 체험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해할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 은행들의 파산, 각종 금융사기, 리먼 브라더스 파산, 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 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전문적인 글임은 부인할 수 없다. <휴버먼의 자본론>은 제목에서 이미 전문성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사례와 개념을 검색해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Wikipedia와 Google을 화면에 띄워놓는다. 미술을 공부했을 때와 똑같다. 하지만 <즐거움의 가치사전>은 제각각 단편적 내용들의 옴니버스 형식이라 설명이 깊지도 않을뿐더러 전체적 맥락을 공유한다. 요컨대, ‘쾌락의 종합’이다. 주제는 이렇듯 단순하지만 생각은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독자, 즉 생각의 주체와 말이다. ‘나’와 벗어난 사례는 하나도 없다.


  연결의 감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누구는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어 ‘신앙’의 장(章)에서 감명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마냥 감명을 받을 수는 없다. 저자는 인문주의자이다. 비판도 항상 견지한다. 그가 종교에 대해 한 말은 도킨스와 세이건이 그의 두꺼운 책에서 했던, 혹은 수많은 강의에서 했던 주장의 축약본이다. 따라서 박민영氏는 해당 챕터의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에게 문제를 재고하도록 요구하며, 필요할 경우 더 공부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식으로 권력, 노동, 자유, 민족애, 독서, 미술, 스포츠, 애완동물(‘반려동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쇼핑, 섹스, 매춘, 동성애, 효도 등 우리와 전혀 무관할 수 없는 거의 모든 문제들을 관통한다. 독자는 저자의 노력에 혀를 내두르며 “나는 왜 이런 생각들을 깊이 있게 해보지 않았던 것인가?”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왜일까? 우리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일까? 질문의 대답은 박민영氏의 서문에 명료한 문장으로 적혀 있다. 부분만 발췌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한 문단을 통째로 옮겨보고자 한다. 분명한 만큼 당연한 말이다.


  “이 책의 집필에는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자료 수집에는 거의 30년이 걸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이 총동원되었다는 의미이다. 힘에 부치는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할 수 없는’ 작업 성격 때문이었다. 그것이 특정 분야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대해 발언하고자 하는 나의 욕심에 불을 붙였다. 굳이 밝히자면 나는 ‘전문가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특정 분야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전문가는 결코 사회 전체를 읽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분업화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두루 알려고 하는 이의 실천을 나는 주변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떤 이가 요리도 잘 하고, 첼로를 잘 켜며, 운동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데, 그가 저명한 교수라면 “어떻게 그 많은 것들을 다 잘해?”라며 놀라곤 한다. 여기에다 그가 생물학, 철학, 종교학 등에 모두 능통해 박사 학위를 무려 너덧 개 정도 지니고 있는 이면 놀람은 경외로 바뀐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질문을 하나 해보자. 우리는 정말 저 다양한 것들에 능통할 수 없는 사람들일까? 일부만 천재이거나, 일부만 탁월한 의지의 소유자라 ‘super-talent’의 경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그것은 소수의 특권일까?


  루트번슈타인 부부의 공저 <생각의 탄생>도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책이었다. 박민영氏가 말한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란 <생각의 탄생>에서 줄기차게 주장된 ‘전인(全人)’이다. 단테와 알베르티가 그러했다. (참고하건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우리가 정의하는 ‘전인’이 아니다. 그는 언어적 능력이 다소 부족했다. 하지만 ‘예술적 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하며, 적어도 그 방면에서는 우리도 알듯이 역사 상 가장 탁월했던 인물 하나라 손꼽혀도 어색하지 않다.) 다방면에서 고루 뛰어나다는 것은 남들보다 넓은 시각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저자가 1년이나 걸렸다고 했던 집필의 시간이 평생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자와는 달리 ‘전공자’이다. 대학을 나온 이라면, 그리고 논문을 써본 이라면 전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항간에는 “직장 다닐 때에는 거의 쓸모없는 것” 정도로 회자되곤 하는 것. 그리하여 최근 대학에서는 미래형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전공논문을 폐지하고 인문학 수강을 독려한다. 이에 대해서는 짧게나마 다른 책 리뷰에서 언급한 바 있으니, 중복은 되도록 피하겠다.


  두루 견문이 있어 시각이 넓다는 것은 그 시대의 역사적 인식에 대해서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장점일 것이다. “대중은 무지하다.”라는 말은 곧 “우리는 모두 전공자이다.”라는 말과 진배없는 것이지 않을까? 타인의 개입이 아니면 다른 분야의 것이 요구될 때 우리는 무능력자가 된다. 물론 세부적인 전공기술이,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필요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중추가 되는가를 묻는다면 가령 이렇다. 나의 일부 국문학적 지식이나 미술적 지식이 그것만으로 온전한 지식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이 삶의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요컨대 이것들은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 관심의 사신들을 파견하고, 돌아온 그들로부터 견문을 얻어들은 뒤 모든 것을 종합해 각각의 것들을 ‘하이퍼링크’할 수 있는 역량은 전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박민영氏의 말마따나 그것은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에서 나온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전공자가 아닌 전인을 꿈꿔야 한다는 것도 일맥상통한 주장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얻어가야 하는 교훈도 바로 그것이다. 각각의 장과 그 장에서 설명된 사례들은 충분히 재미있다. 어렵지 않게 보따리에 넣을 수 있다. 얼마든지 대화와 작문에서 활용할 수도 있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직접적인 도움도 되리라. 하지만 그건 저자의 집필의도에서 벗어난 독서에 그친 것이다. 비유해본다. A씨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전공자이다. B씨는 권력에 대한 역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C군은 막 흡연에 관한 전공논문을 쓰려는 대학원생이다. 이들을 ‘쾌락’이라는 큰 나무에 가지로써 삼고, 멀찌감치 서서 그것을 바라보는 일을 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이다. 이 책은 다름 아닌 원경(遠境)을 조망하는 시선, 혹은 버드아이(Bird-eye)이다.


  <즐거움의 가치사전>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쾌락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아.”라는 만족감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조금의 이해’에서 오는 만족감이 바로 전인이 될 수 있는 기로에 섰다는 생리적 반응이다. 더 나아갈 것인지는 독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다. 박민영氏는 각 장마다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명언들을 남겨뒀다. 명언은 의지의 마약이지 않은가. 그리하여 저자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쓰고자 이 책을 남겼으나, 독자는 쾌락의 실체를 통해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려는 찰나에 놓이게 된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의 꿈이 샘솟는 소리가 나는 들린다.


  얼마 전, 나는 한 지인으로부터 카뮈가 그르니에의 책에 실어놓은 서문의 한 구절을 전해 들었다. 카뮈는 스무 살 무렵에 그르니에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회상했다. 훗날 그의 책을 읽을 독자들이 너무나도 부럽다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즐거움의 가치사전>에 담긴 저자의 진의, 그리고 쾌락의 다양함 속에서 각기 얻을 깨달음을 생각하며, 나는 이 책을 읽을 미래의 독자들이 카뮈만큼이나 부러워진다. 그들은 또 무엇을 얻을 것이며, 그것은 나의 것과 얼마나 다르고, 나는 그로부터 또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기쁨은 우주적이다. 몸에 갇혀 있지 않고, 정신을 뛰어넘고, 신의 '말씀'보다도 가까우며, 모든 것을 초월해 나의 온몸을 전율케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또 누가 이 책의 한 구절에서 무엇을 얻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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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8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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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8 2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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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5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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