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13

사진출처 : visualreader.pbworks.com
photograph by Jennifer Zwick
이 공간에 글을 올리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타인의 독후감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타인의 책 리뷰는 거의 읽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아직 읽지 않은 책’의 리뷰는 접하지 않는다. 나의 것이 아닌 시선을 빌려 책을 읽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고전이나 경전을 누군가가 자신의 사상에 맞게 소화한 다음 나름의 글을 부려 책으로 낸 것이면 기꺼이 사겠으나, 짤막한 독후감을 실은 책이면 손도 대지 않는다. 이따금 “저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읽을까?”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저명한 이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건 다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참는다. 다른 건 몰라도 타인의 평이나 소문보다는 나의 경험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외골수라 불려도 괜찮다. 이런 습성이 나의 ‘공감력(共感力)’을 확장시켜주는 건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막말로 “얹혀살기 싫다.”는 고집인 셈이다.
그런데 이런 고집을 ‘원서 읽기’에서는 부릴 수가 없다. 외국에 대한 지식을 주식으로 삼고, 우리의 것을 주전부리로 삼은 못된 습관이 오래된 탓에 책장에 꽂힌 책들의 대부분이 외국원서의 번역본이다. 고집의 원칙대로라면 나는 원서를 읽어야 한다. 번역이 ‘기계적 옮기기’가 아니라는 것은 독서가들 사이에서는 나도 알고, 너도 아는 사실이 아닌가. 역자의 역량에 따라 훌륭한 번역이 간간이 나온다. 이곳 알라딘에도 번역을 문제시 삼을 정도의 외국어 실력을 갖춘 애독자들이 꽤 많다.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실은 대부분 못 알아듣는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번역에 대한 평가가 좋은 책을 사자.” 권위 있는 출판사의 번역이라도 백이면 백 다 놓을 것이라 믿으면 엄하게 지갑만 팽(烹)하는 것이라는 속설이 진리라는 뜻이다. 새삼 번역의 중함을 알게 된 뒤부터는 마음에 들어도 서문 정도는 꼭 읽어보고 산다. 책값이면 하루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는 때이다.
책을 읽을 때는 또 어떠한가? 독서란, 비유컨대 “부딪히는 것”이다. 문장을 읽다가 막히는 구절도 더러 있고, 이해하지 못할 사상과 조우할 때도 있다. 실망도 참 많이 한다. 결말을 모른 채 본 영화가 다 보고 난 후에는 재미없어지는 것처럼, 책 역시 그러할 때가 있다. 요즘 출판사들은 워낙 부풀려 광고를 하기 때문에 책에 대한 기대는 적을수록 좋다는 험담도 오고 간다. 그렇게 힘들게 한 권을 다 읽어 놓으면 “내가 그것에 대해 과연 어떤 할 말이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읽는 것보다는 쓰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지만 쓰는 것보다는 “읽은 것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것이 쉬운 것보다 반드시 나은 것도 아니다. 뭘 써야할지 모를 때에는 차라리 읽고 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으로 어렴풋하게 글을 쓰고, 타인에게는 자신의 감상에 대해 공감해줄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리하여, 한샤오궁의 말처럼 우리가 평생 소장해야 하는 책은 드물게 만날 수밖에 없다. 독서란 이 모든 것들이 조화되었을 때, “아, 참 잘 읽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하나의 요리이다. 무엇 하나 빠지면 안 된다. 더욱이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리면 시쳇말로 “말짱꽝”이다.
‘창조적 독서’를 운운하는 요즘이다. 나는 독서에 비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창조’라는 말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 같아 가끔 배알이 꼬인다. 사람들은 정해진 것을 좋아한다. 정해진 것이 공신력의 인정을 받으면 그것을 진리로 여기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정신과 사상에도 바코드가 찍혀 얼마 정도의 가치가 있으리라 평가되어야 그 쪽으로 조금이나마 움직일 채비를 한다. 하지만 대개 일상이란 일상 바깥의 삶을 기웃거리는 형국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들 배운 사람이라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창조적일 수 있는 독서가 어렵다고 불평(독서는 원래 어려운 일이 아니던가 말이다!)하며,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와 같은 양적 문제에서부터 시작해 “어떻게 읽으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공신력의 응원을 받고자 한다. 저명한 누군가가 ‘글 읽기’에 대한 주제로 책을 내면 “글 읽기에 대한 글 읽기”를 위해 기꺼이 돈을 주고 산다. 그것들 대부분이 비슷한 말을, 그 비슷한 말들 대부분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서의 양과 질은 언제나 첨예한 논쟁거리였다. 하지만 자신이 책을 너무 빨리 읽는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깊은 독서”를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고, 책을 중구난방으로 읽어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것은 무엇이며, 자신은 남들보다 거북이처럼 책을 읽는 것 같아 늘 불안하다고 기우(杞憂)를 갖는 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독서는 책과 얼굴을 맞대는 행위이다. 타인의 눈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문장을 읽고, 아인슈타인이나 뉴턴의 뇌가 아닌 자신의 뇌로 그것을 이해하며, 무엇보다도 그 독서하는 이의 마음은 자기 자신의 것이다. 너무 어려우면 쉬운 것을 찾으면 되고, 사상이 맞지 않으면 또 다시 골라 읽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는 독서의 ‘도(道)’가 있으리라 여긴다. 아니면 그렇게 여기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조정당하는 것이다.
중학교 국어교사이신 어머니께서 이따금 교내 독후감 대회용이라며 아이들의 글을 가지고 오신다. 그 맘 때 나의 모습을 회상하며 하릴없이 그것들을 읽고 있노라면 글들이 하나같이 깊이도 얕고, 무엇보다도 턱없이 부족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따금 낭중지추처럼 눈에 띠는 글들을 만나면 반갑다. 하지만 그건 아이들 전체의 1%도 안 될 것이다. 그나마 발견한 글들 중 대부분도 다시 읽어보면 신선도가 떨어진다. 어머니의 말씀대로라면 학생들이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은 턱없이 적다. 문제는 “얼마나 읽느냐?”가 아니다. 그들을 볼 때는 이미 “읽느냐, 안 읽느냐?”라는 수준으로 비판의 시각이 뚝 떨어진다.
스페인 못지않게 책 안 읽는 대학생들이 많은 우리나라이다. 이런 세태의 책임을 어디인가로, 혹은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무책임한 행동이다. 문제는 개개인이 지닌 지적 성실성에 있다. 사람들은 요리조리 핑계를 잘 댄다. <믿음의 엔진>을 복기하는 자리에서도 거듭 밝혔지만 우리는 훌륭한 거짓말쟁이이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다. 우리가 문제의 방향을 애당초 잘못 잡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즉 양적 문제에 지나치게 매달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단락을 통해 거칠게 적어 내려온 나의 주장은 결국 이것이다. 책을 “어떻게, 얼마만큼 읽어라.”라는 것은 논리 상 말이 안 되는 일률이다. 한 권의 책이 너무 좋아 몇 달이 걸려도 필사하며 되읽는 사람이 있다. 속독을 너무나도 잘해 한 달에 수 십 권의 책을 읽는 사람도 있다. 독서 방식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것을 문제시하는 것은 시중에 나온 수많은 책들의 다양성을 독자들이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책이 다양한 만큼 독자도 다양하며, 다양해야 정상이다. 다양성이란 경험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조언과는 크게 상관없다. 조언들이 이따금 우리의 “더, 더, 더”라는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맹종하다보면 ‘주체성’이라는 크나큰 자존감이 상실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독서가 “읽어서 남 주는 행위”가 아닌 것은 자명하다. 어떤 글을 읽든, 어떻게 읽든, 얼마나 읽든 중요한 것은 독자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이다. 그렇다. 우리의 독서가 힘든 이유는 다중의 힘에 휘둘리는 얇은 귀, 그 속물근성 때문이다. 다른 것들 다 내려놓고, 책과 일대일로 정직하게 대면하는 습관만 기른다면, 그리고 독서의 어려움을 직시한다면 저 수많은 책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너의 책'이 아니다. '나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