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3일 토요일
나에게도 박준의 <미인>이 있었다. 그러나 <미인>이 마음에 앉으니, 언어보다 훨씬 선명한 걸 알게 됐다. 그것은 차라리 소리. 갇힌 공간에서 끊임없이 울려 돌고 도는 음성이었으며, 나는 그 감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어의 그물은 자주 찢어졌다. 잡히는 것도 없는데 허구한 날 찢어졌다. 어부는 성질이 나서 시를 관뒀다, 라고 말하면 될까. 시는 내게서 시작하는데, 안에서 나오는데, 도무지 공간의 메아리는 나의 것일 수가 없어서, <미인>은 시가 될 수 없었다. 시도 <미인>은 될 수 없었다. 박준에게도 성긴 그물을 만지작거린 날들이 있었으리라. 만지작거렸으니 저 정도로 썼지, 그가 훌륭한 낚시꾼이었다면 세상 모든 애가(哀歌)는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물고기 없는 바다는 비현실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배신자가 됐다. <미인>이 떠난 후로도 쓰지 않던 시를 대학 늦깎이 시절 강의 때문에 수 십 편 썼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들어줄 이가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적는다. 차라리 이 공간의 조촐함이 좋다. 나는 당신이 볼 수 없는 어딘가에 숨어 사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그래도 읽어주니, 당신에게 깊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이 그 소수 중 한 사람이라, 고마움은 고마움에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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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는 공간을 돌고 돌아 어느덧 미세한 잔향만 남기고 더 이상 마음을 울리지 않았다. 잔향을 듣는 귀의 지혜를 잃었다. 배신은 언제나 이렇듯 교묘한 술수를 부린다. 나는 짓궂게 웃고는 눈을 딱 감았다. 시를 쓰자. 혹은 시를 쓴다는 이들 곁에 앉아라도 보자. 그것은 무엇인가. 그래도 갈구한 날이 있었으니까.
김승희 시인 앞에서 시를 썼다. ‘정신줄’이라는 걸 놓고 쓰니 칭찬도 받았다. 한 번 만 더 결석하면 F처리 되는 나를 우수한 학생이라 불러줬다. 취향이려니 했다. 자주 대화를 나누던 남학우 여학우와 도무지 모를 말들에 대해 말했다. 모두 자기 것만 발표하고, 다른 사람 것은 몰랐다. 이게 뭐지, 했다. 계속 모르니까, 결국 아는 게 생겼다.
쓰다 보니, 나는 다시 청각이 예민해졌다. 저 소리들, 뭐라 하는 거야, 뭐라는 거야. 너는 알고 말하느냐, 나는 언제까지 들어야 알 수 있느냐, 아니, 나는 알고 썼느냐. 이 기이한 창작의 공방(工房). 내리치는 망치와 그걸 받는 모루 사이의 굉음에서 메아리의 흔적을, 감금의 추억을 기억해냈다. 그렇다. 돌연 <미인>이 그리워지고, 소리 속에 침묵하던, 오직 침묵만을 실천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다시 망각으로 들어가자. 무수한 시집들은 그렇게 내 서재의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얇고 비스듬하게, 아무 의미 없이 꽂혀 있다. 그에 비해 여기까지 돌아온 이 궤적의 거리는, 이 비틀비틀한 거리는 또 얼마나 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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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때는 많이 읽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대체 읽지 않으면 쓸 수 없으니, 읽어서 몰라도 일단 ‘읽는다는 것’을 해야 했다. 그만큼 곤욕인 게 또 어디 있는가. 젊은 시인들을 읽고, 난해한 시들을 읽고, 시의 흐름을 보려고 탁류에 고개를 처박고, 대체 숨은 제대로 쉬는지 모르겠는데 끈질기게 수중의 생을 보내다가 새벽 늦게야 이불 속에서 숨을 쉬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면 물이 눈에서 떨어지니, 몸 어딘가 액화 과정이 일어나는 기관이 있는 모양이었고, 그게 싫었다. 지겨웠다.
나를 속이는 것들. 저자들은 나를 바보로 만들 속셈인가보다. 분하다. 나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있다. 그런데도 뭘 쓰고 있다. 막스 피카르트가 말한 ‘그 모든 것의 원천’, 침묵이여, 나를 도와다오. 아무리 입을 다물고 있어도 침묵할 수 없는 이 박약한 정신. 밀어내려는 의지와 단절된 말. 그 와중에 일어나는 폭력. 언어 사투. 예술이란 그런 것이었는가. 이러다 미쳐버리겠지. 아주 돌아버려서 훌륭한 시인이 되어버릴 거야. 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읽을 수 없는 글을 쓰면서, 세상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고, 그리하여 온전하게 홀로 제정신인 상태로 살아가겠지. 그렇게 되는 것이겠지.
요컨대 나는 반 년 정도를 새벽마다 미치며 보냈다. 그런 와중에도 국문 고전 레포트를 쓰고, 종교분쟁을 연구하고,「莊子」를 읽은 것은 신기였다. 사람이 이렇게 진폭이 큰 소리로 살아도 신체가 부서지지 않다니. 아, 그러고 보니 또 ‘소리’다. 언제나 소리로 돌아온다. <미인>이 내게 가르쳐준 것. 붙어 떨어지지 않으니, 그것은 계절이 지나도 화석처럼 매달려 있는, 엇나간 나뭇잎 같다. 저 창 밖에 한 장이 빗속에 부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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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도 글이 써진다는 것이 미쳐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얘긴 아니겠지만, 여하튼 김승희 시인은 내가 살짝 돌기 시작할 무렵부터 습작에 관심을 가져줬다. “식도는 어둡다.”라든지, “다섯 살이 부서져요, 엄마”라든지, “잠에서 깨면 늘 나는 遠洋의 감옥 속에 있다.”라든지, 이런 구절에서 멈춰서더니 시가 죽고 사는 일에 대해 말해줬다.
더 미쳐야 한다는 뜻으로 들었다. 그러나 한 번 미치면, 뭐를 분별하는 건 둘째 치고 어느 선까지 미쳐야 하는지 누가 판단하는가. 여기까지? 여기가 어딘데? 도대체 정신의 공간에 어디 좌표가 있던가. 마름질 할 수 없는 곳에서 자를 들고 서있는 사람만큼 우스꽝스런 광대도 없다. 그런 작자들의 글에 수도 없이 속았고, 이런 공간이든 저런 공간이든 자신을 바보라 드러내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삼태기에 담아 수백이나 된다. 속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단단하게, 곡식 낱알들을 고르며 살아왔다. 이런 광기가, 말하자면 그건 또 광기일 수밖에 없는데, 그 미친 정신과 뜨거움과 운동과 폭력과, 하물며 성스러움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것들로 나는 함몰의 고비를 늘 상처로 지나왔다.
그런데 더 미치라니.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저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라고 속으로 말하면서도, 대시인 앞에서는 정중해야 하는 까닭에 더 다듬어서 제출하겠다고 했다. 다른 강의들 준비로 분주하게 마음을 추스르고, 성적을 확인하고, 나는 그 미소 뒤로는 다시는 미치지 않기로 했다. 관심 가져준 그분께는 고마운 마음이지만, 소설을 가르친 어느 교수의 말대로, 한 명의 독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충실하게. 더 충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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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는 이들은 광인이다. 그녀/그들이 뭐라 항변해도 나는 앞과 같이 확언한다. 모른다면 알려줄 생각이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글은 읽지 않는다. 작품을 통해 거의 미쳐서 공간을 부수고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날아가든 할 것 같은 불가능의 사람들만 만날 것이다. 그 일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인>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미쳐본 이들이여, 라며 그녀/그들을 어느 공간에 소환한다. 미쳐서 죽은 이들도 바람에 날려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거짓으로 불러놓고, 멀찌감치 그녀/그들의 한가운데서 멀어진다. 공간에서 벗어나진 않는 거리까지. 한 눈에 보일 수 있는 정도면 좋다. 그녀/그들이 뭐라고 서로 말하고 있는지, 무슨 안부를 전하는지, 작품 잘 되냐고 묻는지, 고민은 뭔지, 대체 우리말과 다른 말은 어떻게 통하는지, 그런 건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 다 어차피 미친 소리일 텐데.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은 소리다. 그 소리를 듣고 싶을 때면 언제든 다가간다. 모습을 보려고 할 때면 또 뒤로 물러난다. 둘 다 실패로 끝나긴 해도, 끊임없이 한다.
눈치 챈 사람도 벌써 있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녀/그들도 나와 같은 공간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이 차원이라든가 물리라든가 하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는 나의 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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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그래도 서재라고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독자로 산다. ‘독자됨’이 무엇인지 쉼 없이 묻고 갈구하면서, 광기의 새벽을 떠올린다. 광인들이 극도의 고온에서 건져낸, 하지만 우리는 저 차가운 활자와 헐거운 백지로 붙들고 읽게 되는 책에서 나는 광기와 마주하는 작업은 부단히 한다.
광기의 독자인가, 잠시 생각해본다. 저 먼 헤겔의 미학, 그걸 난 곧이곧대로 듣진 않지만 작품은 완성됨과 동시에 미완성이라는 그의 말은 옳다. 몫은 독자의 것. 하지만 ‘완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위험하다. 독자도 완성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아니, 사실 완성은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왔다. ‘독자가? 독자 주제에?’ 속으로는 이렇게까지 생각한다. 폄하로 들어도 상관없다. 자신의 유능함을 믿는 독자처럼 어리석은 자도 없으니까. 미완성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와 미완성을 읽고 미완인 생을 사는 독자만이 있다. 나는 미완이라 이렇게 쓰며, 이렇게 쓸 수밖에 없다. 솔직함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서평이라며 자신의 얄팍한 이해의 잣대를 들이대고 이런 말과 저런 말을 분간 없이 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니, 별로 들여다보진 않는데, 서두부터 웃는다. ‘현실을 들먹이며 판타지를 사는 이들이여.’
참으로 많은 책이 있으며, 많은 작가가 있고, 많은 글이 있지만, 그리하여 우리는 독서의 부족에도 이상하리만치 풍족한 ‘말’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로 그런가? 지칠 대로 속아서 완전히 지쳐버렸는데도 내일 또 속는 이 굴레의 지겨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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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미쳐본 적이 있나요?
이렇게 물었을 때, 대답하는 이들의 글은 읽지 말라. 제정신인 사람은 이 무대에 설 수 없다. 우리를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움직이게 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읽었더니 눈물이 나오더라, 읽었더니 힘들더라,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더라, 하지만 서재에 가만히 꽂아두고 자꾸만 눈을 주더라… 그 작가와는 죽을 때까지 작별하지 말라. 오래도록 읽지 않아도 남는 이들이 있다. <미인>이 있다. 소리가 있다.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울림을 그치지 않는 음성이 돈다. 그런 독자는 행복하다. 몹시도 많은 불행 속에서, 그녀/그들에게는 적어도 분명한 것이 하나 있으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이들에게 눈을 둬라. 미쳐서 쓰는 사람은, 질문을 듣지 않는다. 들을 수가 없다. 우릴 머쓱하게 만든다. 저기, 그래도 대답은 좀… 안타깝지만 그런 작가는 독자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독자이다, 우리는. 무엇이 우릴 그렇게 불행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수도 없는 이야기가 있지만, 자꾸 뭘 묻는다. 광인은 그런 우리에게 그동안 미쳤던 흔적을 툭 던진다. 그리고는 그 공간에서 사라진다. 소리처럼 저기 가서 울리고, 다음에는 다른 곳으로 가서 울리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녀/그들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좇을 수밖에 없다. 공간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무수한 책 앞에서, 서재에서, 당신의 그 공간에서, 단 한 번이라도 확언하듯 책 한 권을 덥석 잡아들고 끝까지 만족한 적이 있었는가? 그렇게나 자신하는가?
독서는 끝없는 실패다. 아, 이걸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녀/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초장’부터 자만이다. 조금은 더 작가와 가까워진 것 같아요, 다시 읽어보니 이건 바로 그뜻이었겠구나 (‘바로’라고?) 싶더라고요, etc, etc, etc. 단 한 권도, 심지어 단 한 문장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라는 사람들은 그냥 대중문화에 섞여 지내면 된다. 여기는 애당초 그녀/그들의 공간이 아니다. 불평은 무소용이다. 해봤자 광인은 듣지 않는다. ‘미친 길’이라는 건 따로 있는가? 그런 듯도 싶다. 어떻게든 설명해보고 싶지만, 직접 본 적도 없고, 물어봐서 들은 대답도 없다. 하지만 존재한다. 이게 무슨 비과학적 언사인가 싶어도, 사실이다. 독자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처럼 살아가는 그녀/그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그거요? 보이진 않는데, 있는 것 같아요. 이런 대답이 하나 둘 쌓이면 그 길은 실재가 되고, 우리는 믿게 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독자가 뭘 믿고 읽는지 생각해보면. 저요? 이렇게 처참하게 매일 떨어져 나가면서도 이상하게 나무에 붙어 있더라고요. 왜 그런 것일까, 생각해봤어요. 누군가가 저를 자꾸만 나뭇가지에 도로 데려다주는 것 같아요. 붙어 있으리라는 건지, 다시 떨어지라는 건지, 참, 도통 모르겠네요. 아, 그게 누구냐고요? 미친 사람이지 누구겠어요?
광인 : 나무 주변에 서식하며, 시간을 거슬러 사건을 되돌리는 이를 일컫는 말. 정신 생명 유지의 근원. 그 자체로는 수많은 곡해를 받기 마련이며, 의외로 주목 받는 만큼 이해되지 않는다. 수많은 지구의 영적 존재들은 주변에 낙엽이 뒹굴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나, 광인은 손에 잡히는 낙엽이면 그 무엇이든 다시 나무에 붙인다. 따라서 고통을 두려워하는 이들은 광인을 멀리한다고 알려져 있다. 광인의 수는 무척 적으며, 주로 숨어지내 소재를 알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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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 쓴다. 미친다. 자꾸 미친다, 미친다 하니 내가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더욱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도 서재 밖에서는 잘 살아간다. 바다 밖에서는. <미인>이 없는 곳에서는. 새삼스럽지만 인간은 원래 육지 생물이며, 그 중에서도 거의 막내라서 애당초 물에서는 살 수 없다. 물 속에서 허파로 숨쉬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추신 : 이 이야기는 당신의 공간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됩니다. 광기의 비밀은 당신과 저만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가끔 재미로 ‘미친 척’을, 하지만 여기서는 제대로 한 생을 다하여 기꺼이, 그리고 한없이… 미쳐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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