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 김 경미 -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

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他人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

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

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

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

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

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

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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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17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일은 아닐지라도...
어느날 문득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던 날이 있었다...
돌아 돌아 돌아 오면 결국은 이 자리 여기였지만...
 
The One Page Proposal - 강력하고 간결한 한 장의 기획서
패트릭 G. 라일리 지음, 안진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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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34장짜리 기획서를 제출했다. 처음에는 12장 정도의 분량으로 제출하였으나 최종 결재자의 검토와 추가사항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34장짜리 두툼한 기획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실제적인 부분은 처음의 12장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되나 보여주기 위한, 설명하기 위한 자료의 첨가로 그렇게 부풀려지고 만것이다.

저자 패트릭 G. 라일리는 세계 최고의 부호 애드넌 카쇼키와의 만남을 계기로 강력하고 간결한 한장의 기획서의 비법을 전수받아 그만의 독특한 기획서로 발전시킨다.

그가 제시하는 한장의 기획서의 8단계는 제목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나타내는 스토리의 헤드라인), 부제 (제목을 보강하는 추가적인 설명), 목표 (기획서의 의도를 밝혀 원하는 바를 진술), 2차 목표 (부가적인 목표및 주목적을 보완), 논리적 근거 (설정,매력포인트,설득의 3단계를 거치며 주장하고자 하는 근거 설명), 재정 (재정적인 면을 파악하여 숫자로 말하기), 현재 상태 (제안하는 사업이 현재 자리잡고 있는 실정 설명), 실행 (기획서를 읽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할지를 설명) 이다. 그외에도 자료 수집의 준비 과정, 한장의 기획서를 쓰기 위한 자료 정리 과정, 최종 교정,축소,압축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의도대로 한장의 기획서가 가지는 장점은 분명 인정한다. 한장이라는 의미가 자료의 미비나 자료 작성의 용이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수십장짜리로 풀어쓰여질 자료를 한장으로 압축하는 기술이고 비법이다.

그러나, 동서양의 문화 차이일까? 실제적인 업무에서의 효용성은 크게 나타날것 같지는 않다. 물론 개인의 능력 향상이나 기획 능력 향상에 많은 도움은 될 것이다. 다만 아직 한국의 기획 문화가 보여주기 위한, 설명하기 위한 시각적 문화에 비중을 두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가 제시한 한장의 기획서는 간결한, 너무 간결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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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4-17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시네요. 맞아요. 동서양의 문화차이. 그런데 우린 왜 서양을 못 쫓아가서 안달하는지 모르겠어요. 그쪽 나라 사람들은 글을 간결하게 쓰는대신 말을 잘하고, 우리는 글을 잘 쓰는 대신 말을 잘 못하고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요?

잉크냄새 2004-04-20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나오는 책들중에도 그런 사고와 문화의 차이를 무시하고 '이것이 정답이고 진리고 길이다'라고 제시하는 경우가 많죠.
물론 독자들이 판단의 잣대를 쥐고 있기는 하지만 한번쯤 읽는 이의 입장도 고려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땅끝에서의 一泊(일박) 


        - 김선태 -


1.

삶이 거추장스럽게 껴입은 옷과 같을 때
내 서른 몇 살의 온갖 절망 데리고 땅끝에 와서
병든 가슴처럼 참담하게 떨리는 바다를 본다
활처럼 휘어 구부정한 마을 입구를 돌아
사자봉 꼭대기를 헉헉 기어올라서면
막막하여라, 파도만 어둡게 부서지고 있을 뿐
군데군데 떠 있는 섬 같은 희망도
오늘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질 않는 구나
넘어지고 다치며 불편하게 끌고 온 젊음
어디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어디에서 깨끗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2.

막차를 놓쳐버린 적막한 어촌의 밤
주막거리 뒷 켠에 누워 밤 파도 소릴 듣는다
왜 살아야 하냐고
더럽게 구겨진 누더기 같은 삶을
얼마나 더 살아야만 하냐고
파도는 밤새 방파제를 치며 울부짖었지만
그러나 보아라,
여기 스무 몇 가구의 집들이 야윈 어깨를 포개고
그래도 고즈너기 잠들지 않았느냐, 저기
가파른 낭떠러지 바위들도 어둠 속
무릎 세우고 의연히 서 있질 않느냐

3.

편지를 쓰리라
두고 온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리라
막차는 떠났어도 돌아가야 할 내일을 남겨놓은
땅끝에서의 일박
밤이 깊을수록 더욱 거칠어지는 파도소릴 들으며
아직 나는 살고 싶노라고
새벽토록 길고 긴 편지를 쓰리라
하여, 어느덧 내 잠든 꿈속으로 밀려들어온 바다
그 만경창파 속살을 헤치고 마침내
나는 푸른 섬 하나로 눈부시게 떠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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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04-1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땅끝에 갔을때가 생각납니다....너무 좋네요

비로그인 2004-04-1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중, 백석.....




잉크냄새 2004-04-1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이 백석 시인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님을 통해서 백석 시인의 시를 몇번 접했네요. 저도 기회되면 한번 읽어볼 요량입니다.

박가분아저씨 2004-05-12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다 그런 세월이 있나 봅니다.
예전 화순 운주사 거쳐 목포 지나 해남 갔다가 내친 김에 보길도까지 내달려 간 적이 있답니다.
밤새 파도는 머리맡에서 철썩이는데
아아, 산다는 건 왜 그렇게도
밤새 쓰다 지우고 다시 쓰곤 하던, 끝내 보내지 뫃한 편지처럼 절실한 것이던지...
 
노래의 날개
이윤기 지음 / 민음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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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신화연구가, 최고의 번역가로 평가받는 이윤기씨의 소설이다. 그의 글을 처음 접한것은 세권짜리 <뮈토스>를 통해서이다. 신들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의 3권으로 쓰여진 <뮈토스>에서 신들조차 인간적 정감으로 다가오게 했던 그의 글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난다. 신들의 질투조차 인간적 내음이 물씬 풍기던 그의 글들. 그의 소설은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숨은 그림 찾기>이후 두번째 소설인 셈이다.

이 책에 수록된 그의 단편에는 거의 대부분 노래가 등장한다.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며는'으로 시작하는 소월의 '옛이야기'가 등장하는 <옛이야기>, '비상이 든 노래'를 찾아 방황하던 젊은 시절의 회상을 그린 <노래의 날개>, '들에는 들국화 소소로이 피고'를 즐겨부르던 작고한 박정만 시인을 회상하던 <전설과 진실>,'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의 구절속에서 세월에 방울을 달고 세월에 주머니를 달기 위해 나무를 심는 의미를 찾는 <봄날은 간다>, '지도조차 나오지 않는, 그것도 바로 인생'이라며 서글퍼하던 옛 시절을 지우고 인생의 지도를 새로이 그리는 <지도>, '아밍 하이르테 미니 아브와 (목숨처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를 부르며 나만의 보르항을 찾아 나서는 <보르항을 찾아서>...

그의 소설은 첫 단편 <옛 이야기>에 등장하는 계곡물 속의 '한산소곡주'처럼 노래 한자락과 술 한잔이 쉽게 어우러질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말을 구수하게 구사하는 그의 화법이 우리의 풍류속 노랫가락 한소절 속으로 스며들고 있는 것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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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4-1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 좋으셨겠어요.^^

icaru 2004-04-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에 읽은 <전작주의자의 꿈>이란 책에서 필자가 택한 전작 작가가 바로 이윤기였단까요~~!! 저는 이윤기 작품 별로 읽은 게 없어놔서...하지만...작가 앞에 '작가다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이 수식어가..젤로 어색하지 않은 이가...바로 이윤기가 아닌가 싶어요...

비로그인 2004-04-1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국 소설은 고전을 제외하곤 별로 찾아 읽지 않는 터라, 번역가로서의 이윤기도...그래서인지 소설가로서의 이윤기도 많이 접하질 못 했어요.
고작해야 그의 신화 관련 서적 정도랄까...
번역가로 먼저 다가온 이윤기..그래서 그에 대한 선입견이 있죠..왠지 이국 냄새가 날 것 같은글을 쓸 것 같다는...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군요.
소설의 내용도, 그의 문체도....음~~
특히 <봄날은 간다>는 굉장히 사유적이면서도 미학적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잉크냄새 2004-04-1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번역가로서의, 소설가로서의 이윤기를 잘 알지는 못합니다. 저도 접한것이 몇권되지도 않으니까요...설령 많이 접했다고 하더라도 전 그런 쪽의 시각엔 워낙 잼뱅이라...
'작가다운'이란 표현은 이윤기씨에게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군요. 모든 작가가 꿈꾸는 최고의 수식어일수도 있겠군요. 전 개인적으로 <알타이어의 장작개비>가 제일 맘에 들더군요.

stella.K 2004-04-1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남들이 그러는데, 작가같이 생겼데요. (이런 교만덩어리) ㅎㅎ!
 

送人(송인)    님을 보내며

                                정지상   鄭知常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비가 그친 긴 제방에 풀빛은 가득한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당신을 보내는 마음 슬픈노래가 절로 납니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이별의 눈물은 세월이 가도 푸른파도를 적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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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4-1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別淚年年添綠波
이 구절이 주는 어감에 참 가슴 찡해하던 젊은날의 기억이여!

비로그인 2004-04-1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거 저도 좋아하는 시예요. 언젠가 외우기 과제가 있었던 것도 같구. 마지막 줄 해석은 '이별의 눈물은 해마다 푸른물결을 더하니' 이렇게도 들었었구. 오랜만에 들으니 더 좋네요. ^^

waho 2004-04-1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좋네요.

Laika 2004-04-14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그 당시에는 딸딸 외는것에만 신경써서 아무 생각없었는데,
이런곳에서 만나니...감회가 새롭네요...

비로그인 2004-04-14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비>

                                    이수복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送人>...오랜만에 님의 서재에서 다시 만나다니~

이 한시를 보면 항상 떠오르는 시가 <봄비>이기에 이리 한 자락 읊어보고 갑니다~ 냉.열.사의 넋두리.....^^*


잉크냄새 2004-04-1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봄비라는 이 시도 감회가 새롭게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