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의 一泊(일박) 


        - 김선태 -


1.

삶이 거추장스럽게 껴입은 옷과 같을 때
내 서른 몇 살의 온갖 절망 데리고 땅끝에 와서
병든 가슴처럼 참담하게 떨리는 바다를 본다
활처럼 휘어 구부정한 마을 입구를 돌아
사자봉 꼭대기를 헉헉 기어올라서면
막막하여라, 파도만 어둡게 부서지고 있을 뿐
군데군데 떠 있는 섬 같은 희망도
오늘은 안개에 휩싸여 보이질 않는 구나
넘어지고 다치며 불편하게 끌고 온 젊음
어디에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까
어디에서 깨끗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2.

막차를 놓쳐버린 적막한 어촌의 밤
주막거리 뒷 켠에 누워 밤 파도 소릴 듣는다
왜 살아야 하냐고
더럽게 구겨진 누더기 같은 삶을
얼마나 더 살아야만 하냐고
파도는 밤새 방파제를 치며 울부짖었지만
그러나 보아라,
여기 스무 몇 가구의 집들이 야윈 어깨를 포개고
그래도 고즈너기 잠들지 않았느냐, 저기
가파른 낭떠러지 바위들도 어둠 속
무릎 세우고 의연히 서 있질 않느냐

3.

편지를 쓰리라
두고 온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리라
막차는 떠났어도 돌아가야 할 내일을 남겨놓은
땅끝에서의 일박
밤이 깊을수록 더욱 거칠어지는 파도소릴 들으며
아직 나는 살고 싶노라고
새벽토록 길고 긴 편지를 쓰리라
하여, 어느덧 내 잠든 꿈속으로 밀려들어온 바다
그 만경창파 속살을 헤치고 마침내
나는 푸른 섬 하나로 눈부시게 떠오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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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ika 2004-04-16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땅끝에 갔을때가 생각납니다....너무 좋네요

비로그인 2004-04-1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신의주(南新義州) 유동(柳洞) 박시봉방(朴時逢方) 중, 백석.....




잉크냄새 2004-04-17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열.사님이 백석 시인을 좋아한다고 하셨죠...
님을 통해서 백석 시인의 시를 몇번 접했네요. 저도 기회되면 한번 읽어볼 요량입니다.

박가분아저씨 2004-05-12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나 다 그런 세월이 있나 봅니다.
예전 화순 운주사 거쳐 목포 지나 해남 갔다가 내친 김에 보길도까지 내달려 간 적이 있답니다.
밤새 파도는 머리맡에서 철썩이는데
아아, 산다는 건 왜 그렇게도
밤새 쓰다 지우고 다시 쓰곤 하던, 끝내 보내지 뫃한 편지처럼 절실한 것이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