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으로 가는 길
강석경 지음, 강운구 사진 / 창비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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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내 기억속의 경주는 신라 천년의 고도라는 역사적 의미보다는 수학여행의 가장 빈번한 코스로 남아있다. 단체 투숙하였던 넓은 기와집의 문지방을 넘나들던 베갯싸움의 전쟁터였고 수학여행온 또래의 여학생들을 희롱하던 휘파람이 경주 남산의 흰개마냥 천년의 담장을 뛰어넘던 곳이었다. 불국사, 석굴암...그러나 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단지 천마총속에서 숨이 막힐듯 엄습하던 장중한 기운만이 잠시 떠오른다.

10여년전 경주로 내려온 작가는 고즈넉한 신라의 능을 거닐며 과거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곤 한다. 천년 고도의 무게를 짊어지고 허리가 휘어버린 소나무들을 만나고, 천년의 꿈을 고스란히 안고 누워있는 능을 만나고, 민초의 삶같은 쑥부쟁이와 망초꽃을 만나고, 이제는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문명의 잔재들을 한조각의 사금파리로 만나곤 한다. 그녀가 거닐며 바라본 능의 고즈넉한 능선에는 신라의 꿈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그 아지랑이 속에는 역신과 간통이 난 부인을 보고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처용의 호방함이 있고, 옷고름을 밟아 누이 문희와 당대 최고의 영웅 김유신을 맺어준 김춘추의 기지가 있고, 베인 목에서 흰젖이 솟아올라 꽃처럼 휘날린 이차돈의 보살같은 행실이 있다. 신라 천년의 서막을 알렸던 닭의 울음과 알영의 신비로움이 있고, 죽어서도 국토를 지키고자 동해에 수장된 문무왕의 충정이 있고, 절벽에 달린 꽃을 따는 노인과 수로부인의 애잔함이 있다.

역사로의 여행, 그것은 철저한 고증이 뒷받침되어야하기에 조심스럽다. 왜곡될수도 있고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치우칠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 강석경을 따라 떠난 역사속으로의 여행은 자유롭다. 그 여행은 역사속에 잠든 꿈을, 영혼을 따라 떠난 여행이기에 자유롭다. 저자가 구원이라는 화두를 멍에처럼 짊어지고 불현듯 정착한 경주의 능속에서 난 천년의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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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4-1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반가워요.^^

로드무비 2005-04-11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주가 얼마나 근사한 곳인지......
누구누구는 죽음을 맞이한다면 경주에서, 라고 말했답니다.
(김규항이었나?)
그런데 두 강씨의 합작품, 예전에 찜해놓고 안 사 읽는 이 심리는 뭘까요?^^;;;

Laika 2005-04-11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막 메신저로 후배랑 경주 얘기하고 있었는데...게다가 전 "강석경" 의 다른 책 읽고 있고요...오호~~ 경주 가고 싶어라...

2005-04-11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5-04-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책 사려다 품절이라는 거 확인하고 그렇구나, 하고 말았더니, 리뷰를 보니 새삼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이. 다시, 찾아봐야겠어요.

2005-04-12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magic 2005-04-12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주에 벚꽃놀이 가야지~~ 히히 잉크님 감사~!!

내가없는 이 안 2005-04-12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책 리뷰를 보고 책이 보고 싶어지는 것보단 잽싸게 경주로 튀고 싶으니 이상하군요. ^^ 잉크냄새님 고르시는 책은 참 잉크냄새님답다는 느낌이 들어요, 매번. ^^

잉크냄새 2005-04-12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 죽음을 맞이한다면 경주에서라...저도 능을 직접 본지는 오래되었지만 사진으로 통해본 정겨운 능의 모습만으로도 죽음은 경주에서 맞이하겠다는 마음,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라이카님 / 님은 경주랑 인연이 많지 않던가요. 작년 여름의 사찰체험도 그렇고, 페이퍼 여기저기서 경주를 만난것 같아요. 아, 그리고 님으로 인해 역사왜곡을 막았답니다.^^

우울과 몽상님 / 왜 알라딘에 품절상태로 남아있는지 모르겠네요. 님뿐 아니라 의외로 찾으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속삭이신님 / 아마 그 희롱은 그 또래의 남학생이라면 호기심과 괜한 객기에 힘입어 한번쯤은 해본 추억이 아닌가 싶어요. 님의 미모라면 상당한 휘파람을 뒤로 하고 자전거를 타셨으리라 봅니다.^^

매직님 / 맞아요. 경주 벚꽃도 유명하다고 하더군요. 근데 요즘은 봄의 수명이 딱 목련과 벚꽃의 수명만큼이나 짧아진것 같네요. 좋은 여행되시길...

이안님 / 경주는 천년고도였던만큼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나봅니다. 강석경도 구원이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결국 찾은 곳이 경주였으니...어느날 능을 배회하는 님을 보게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진주 2005-04-1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이 책 너무 너무 사고 싶었던 책이었어요. 리뷰도 멋있군요!

파란여우 2005-04-14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주...코오롱 호텔 앞의 흐드러진 봄꽃과 안성기 김보연 주연의 배창호 감독 <안녕하세요 하느님>이라는 영화....경주 남산..감실부처...감은사지 석탑.....
그리고 또 뭐가 있다냐....이게 제 한곕니다.
님의 글을 읽고나니 경주에 가서 나른한 봄을 만끽하고 싶어지는군요...

잉크냄새 2005-04-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주님 / 아직 진주님이라 쓰는 것이 어색하네요.^^ 이 책, 읽고자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걸로 아는데 알라딘에서는 준비하지 않네요. 알라딘의 운영입장에서 절판서적에 대한 보완이 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파란여우님 / 그래도 저보다는 더 많은 것을 기억하시네요. 경주에서 맞이하는 나른한 봄이라... 능의 부드러운 선을 따라 눈부시게 피어나는 초록의 생명과 꿈속에서 더 포근한 봄일것 같네요. 능에 올라가 낮잠 한번 늘어지게 자고 싶군요.^^

미네르바 2005-04-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가 참 좋아하는 책인데 님도 읽으셨군요. 고요하고, 잔잔하고... 몇 세기 전에 살았던 무덤 속의 주인공들을 만나는 듯한 인상을 품어주었어요. 지금도 가끔씩 펼쳐 보기도 하지요. 알라딘에서는 품절로 나와 있는데, 빌려서 읽으셨나요? 이 좋은 책이 왜 품절로 나오는지...

잉크냄새 2005-04-28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능으로 가는 길은 저번 이벤트때 호밀밭님이 추천하시고 선물해주신 책입니다. 알라딘에는 왜 품절상태로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예전에 어느 시에 한국의 묘가 고즈넉하고 인간적이라는 어귀, 이 책에서 또 찾고 말았답니다.

포로롱 2005-05-01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주에 갈 때마다 심호흡을 한번 하게 됩니다. 이주 전에 박물관에 갔었지요.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로 유적지 어디든 북작거렸어요. 조용한 날에 다시 한번 찾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왔죠. 공감가는 글이네요.^^

잉크냄새 2005-05-0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로롱님 / 저도 경주에 다시금 갈 기회가 생기면 고즈넉한 능을 걸어봐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그 속에 잠든 천년의 꿈을 보지는 못할지라도 그 아늑한 능선만은 두눈에 한껏 담을수 있을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