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치마 저고리 입고 달에게 무엇을 빌었는가

여장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행하여진 풍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것으로 보아 우리 고향에만 내려온 풍습일지도 모른다. 년령대를 보면 보통 국민학교를 졸업하기전까지의 아이들로 구성되었다. 보름날 달이 뜨기 전, 어머니의 한복을 몰래 꺼내들고 바닷가로 집결했다. 추위에 바들바들 떨며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수평선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바다위에서 출렁이기 시작하면 급하게 치마를 입고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후 일렬로 늘어서서 한해의 소원을 빌며 절을 하곤 했다. 족히 십여명이 넘는 숫자였다. 그때 빌었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종교의식처럼 경건한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살며시 자리잡았던 느낌은 아직도 남아있다.

2. 휘엄청 밝은 달빛 아래 각설이 타령은 울려퍼지고

여장을 하고 치루어진 의식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세숫대야를 들고 모였다. 동네를 돌며 밥을 얻어먹는 의식이 남은 것이다. 세숫대야의 종류는 보통 두가지로 구분되었다. 깨끗한 세숫대야는 밥과 나물이 담기는 것이요, 지저분한 세숫대야는 각설이 타령의 장단을 맞추는 꽹과리와 징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동네 집들을 모두 돌며 구성진 각설이 타령 한방이면 보통 밥과 나물이 나오곤 했다. 가끔 물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각설이의 집요함에 당해낼 재간은 없었던지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다. 밥과 나물이 한 세숫대야 그득해질때까지 돌아다닌후 휘엉청 밝은 달빛 아래서 즉석 비빔밥을 만들어 먹곤 했다. 온갖 종류의 밥과 나물, 그리고 각 집마다의 고유의 특유한 음식맛을 한방에 해결하곤 했다.

3. 달에게 던진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표준말로는 쥐불놀이인 놀이를 고향에서는 '망우리'라고 불렀다. 보통 남양분유 깡통에 못으로 구멍을 내고 철사로 손잡이를 만들어 윙윙 소리나도록 돌리곤 했다.  고향에는 하천이 있다. 그 하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 마을은 언덕배기 고수라든지 해변가 고수를 명목으로 전쟁놀이가 한창이었다. 그러다 보름이 다가오면 정전협정이라도 맺은듯이 조용히 망우리 놀이를 준비했다. 여장과 세숫대야 의식이 끝난후 하천 주변 언덕으로 모였다. 어느 한사람이 불을 붙이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하천 양쪽 언덕에서 불길이 솟는다. 시리도록 밝은 보름달이 토해낸 선혈들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동안 준비한 나뭇가지가 다 타고 보름달이 하천 중간 정도에 이르면 어디선가 하나의 망우리가 달을 향해 치솟는다. 그리고 양쪽 언덕에서 돌아가던 망우리들이 일제히 달을 향해 마지막 힘을 토해낸후 달빛 아래 하천 위로 조용히 사그러들었다. 마지막으로 달을 한번 흘낏 쳐다보고 돌아서던 가슴속이 알수없는 희열로 충만하곤 했다.

망우리를 마지막으로 돌려본것은 20대 초반이다. 당시 꽤나 힘든 시기를 보낼적이었다. 고향의 언덕길을 거닐던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몇 안되는 꼬마들이 돌리던 망우리였다. 어둠이 어스름 내리기 시작한 강가에서 돌아가는 불의 향연을 바라보면서 주요한의 < 불놀이 >가 강렬하게 떠올랐다. 아마 그처럼 < 불꽃의 고통속에서라도 더욱 뜨거운 삶을 살고 싶다 > 는 열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망우리 하나에 1000원을 흥정하는 꼬마에게 받은 망우리를 돌리며 " 안녕 " 이라고 소리치며 달을 향해 던져올렸다. 나의 고뇌와 아픔이 담겨 던져올려진 마지막 망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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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5-02-23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장을 한다는 말과 세숫대야에 밥을 얻어 먹는다는 건 정말이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예요! 신기하군요^^(물론 세수대야는 깨끗이 씻었겠죠?)
쥐불놀이는 저도 방학 때 시골가서 해 본 것 같아요. 빙빙 놀리면 불꽃이 발갛게 살아나던......불놀이 해도 어른들이 말리지 않고 밤새 즐겁게 놀았던 기억나요^^

호밀밭 2005-02-2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장은 저도 처음 들어보네요. 대보름이 예전에는 놀이 중심이었을 텐데 지금은 음식 중심으로 남은 듯해요. 저한테는 그래요. 나물 먹는 날로만 기억되거든요. 대보름에 대한 추억이 있는 님이 부럽네요. 마지막 망우리에 대한 부분 마음에 남아요. 오늘 달을 한 번 보아야겠어요. 멋진 글 잘 읽었어요.

겨울 2005-02-23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산나무에 새끼줄을 걸고, 의식처럼 집집마다 가장의 이름을 부르며 소지를 태우고, 아이들은 길게 줄을 서서 백설기를 얻어먹고, 청년들은 꽹가리와 장구, 징을 치며 동네를 한바뀌 돌고, 쥐불놀이에도 지친 이슥한 밤에는 바가지와 양동이를 동원하여 밥과 나물을 얻어다가 정체불명의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던 아스라한 기억..... 그립네요.

icaru 2005-02-23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은 어데서 구하셨대요...? 글과 그림이 잘 어울립니다~ 님은 참 유년 시절 여러 가지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하고 계시네요...
저는 쥐불놀이는 직접 해보지 않고, 구경만 했었거든요...실제로 해보기엔...헉..좀 무서워보이기도 하고 그랬어요.
작년 이맘 때 쯤에 님께 귀밝이술 드셨냐고 물었던 게 생각나네요...우아..벌써 일년이 지난 거 있죠~

파란여우 2005-02-23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서범의 '불놀이야'를 떠올리는 저와 주요한의 불놀이야를 떠올리는 님은 확실히 정서의 차이가 나는군요.마지막 망우리에 오늘은 무엇을 올려 보내셨을까나요?^^

내가없는 이 안 2005-02-24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보름이 언제지, 하면서 지나갔군요. 잉크냄새님, 유년시절에 관한 소설 쓰시면 멋진 거 하나 나올 듯해요. 전 아스팔트 위에서만 살아와서 이런 이야기 나오면 무조건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꼬마 셈이 빠른걸요. 하나에 천 원을 흥정하다니, 예전의 님이라면 그냥 돌리세요, 그러셨을 듯한데. ^^

잉크냄새 2005-02-2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역시 여장은 저의 동네에서 잠시동안 행해졌던 행위였나 보군요. 대보름날은 밤새워 놀다 들어가곤 했죠. 그때는 전기가 별로 보급되지 않아서 보름달빛이 정말 대낮같다는 생각을 했었죠.
호밀밭님 / 보름에 먹거리를 빼면 좀 썰렁하죠. 오곡밥, 나물...그저 두가지 만으로도 풍족한 하루였죠.
우울과 몽상님 / 님은 분명 그런 추억을 간직하신 분일거라는 생각을 진작부터 해오고 있었죠. 정체불명의 비빔밥...그립네요.
복순이언니님 / 저도 그 코멘트가 기억나네요. 벌써 일년이라니. 세월 빠르네요. 이 페이퍼의 세번째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두번 울궈먹다 딱 걸렸네요. 아~ 기억력 좋아요.
여우님 / 때가 때인만큼 주요한의 불놀이가 떠올랐죠. 보통때라면 어리버리 홍서범쪽으로 기울었을겁니다.
이안님 / 글 솜씨가 있다면 좀더 눈에 잡힐듯이 쓸텐데 말그대로 주절주절 넋두리랍니다. 제가 소재 제공하고 이안님이 쓰시는 것을 어떨런지요.^^아, 그리고 그 꼬마, 그당시는 얼마나 얄밉던지...ㅎ^^

미네르바 2005-02-24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뭔 정신으로 사나 싶어요. 대보름도 이렇게 지나가 버렸네요. 오곡밥도 못 먹고, 나물도 못 먹고... 제가 사는 동네도 지금이야 신도시가 되었지만 제 어린 시절은 시골이어서 쥐불놀이도 하고, 밤에는 커다란 양푼에다(결코 세숫대야가 아님-아무리 깨끗한 것이라도^^) 오곡밥과 나물을 얻어와서 비벼서 먹었죠. 아~ 그 맛이란... 동네 꼬마들 모두 모여 밤새고 먹으며 놀며 했는데... 너무 아득한 시간이에요. 요즘도 시골에서 그런 것 하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은 아이들이 이런 맛도 모르고 지내니, 아이들이 불쌍해요^^ 기껏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사니...

잉크냄새 2005-02-25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저도 양푼이었나? 아리송하네요. 하여간 양푼은 크기가 작아서 왠지 환영받지 못했을것 같아요. 머스마 열명 정도면 세숫대야 정도는 되야죠. 지금은 이런 놀이들이 모두 사라졌죠. 어차피 시대따라 변하는 거지만 나중에 추억으로 말할수 있는 꺼리는 옛날이 훨씬 풍요로왔던것 같아요.

Laika 2005-02-26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차분하게 어린시절의 활기찬 추억을 잘 표현하셔서 읽는 저도 얼굴에 희미한 미소와 함께 옛추억이 떠올라요.. 참, 더위는 파셨나요? 전 그날 새벽에 큰언니에게 전화로 모닝콜해주면서 팔았다죠...^^

잉크냄새 2005-02-27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카님 / 제 더위 사세요. 시간이 좀 지났어도 사실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