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추석의 고향은 오징어가 풍년이다. 고향 동네 집 옥상마다 새끼줄에 널린 오징어가 가을 바람과 햇살에 산들산들 움직이고 있었다. 가을 들판이 노란 풍요로움을 준비한다면 오징어는 하얀 풍요로움을 준비하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의 벌판은 온통 새끼줄에 널린 오징어 천지였다. 그래서 비릿한 바다내음보다는 오히려 오징어 말리는 냄새가 더 진동하던 곳, 그곳이 고향이었다.
동해 어촌의 특성상 농업과 어업이 공존한다. 농촌에서 자란 아이들이 농사일 거드는 것이 일이었다면 어촌의 아이들은 오징어나 명태 덕장에서 일을 거들었다. 오징어나 명태를 널기 위해 넓은 공간에 고랑대를 설치하고 새끼줄을 이어 만든 곳을 '덕장' 이라고 불렀다. 동네 공터마다 넓은 오징어 덕장과 명태 덕장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은 거의 공장형으로 바뀌어 자연 햇살이 아닌 환풍기에 의존하는 터라 더 이상 볼수 없는 풍경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 오징어를 널기에 키가 작은지라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오징어 다리가 둘러붙기 전에 벌리는 것이었다. 특히나 비가 오는 날은 비를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덮은 비닐속에서 눅눅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워대는 연탄불의 가스 냄새, 까치발로 선 얼굴 위로 눅눅한 오징어 다리에서 떨어지던 오징어물 특유의 냄새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도둑 고양이와 개가 창궐했던 시절, 덕장 밑에는 쥐약을 바른 꽁치며 명태가 유난히 많았고 곳곳에는 쥐약에 취한 고양이나 개들이 비실비실 죽어가고 있었다. 집에서 기르는 개의 경우는 곧잘 동네 어른들의 싸움의 빌미가 되곤 했다.

대학교 시절 타지에서 생활하던 나는 오징어를 팔아 용돈을 마련했다. 고향에 다녀갈때면 10축 ( 1축이 20마리 ) 정도를 들고 돌아가 팔아서 생활비로 사용했다. 91년도 가을, 누군가는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첫사랑을 만난 기쁨과 아쉬움을 노래할 무렵, 난 지하철 역에서 들고 가던 오징어를 몽창 쏟았다. 밀폐된 공간에서 퍼져나가는 오징어 특유의 냄새와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던 얼굴을 주체할길이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한후 '에라 모르겠다 ' 그냥 지하철 역에 퍼질러 앉아서 다리가 끈어져 쏟아진 오징어 축을 다시 재었다. 일부러 오징어 다리 하나 질근 물고 잘근잘근 씹어가면서 어색함을 포장했다. 그 당시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 진한 마른 오징어의 냄새를 맡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와 같은 시공간에 있었으리라.
올해 추석 노을 속에서 아들과 나란히 오징어를 걷는 부모님의 옆모습만으로도 괜히 울컥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늙어가는 아들과 나란히 노을을 바라보며 오징어를 말릴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