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의 일이다. 집에 갔다 학교로 올라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난리가 났다. 잠결에 죽여버린다 는 말이 계속해서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맨 앞자리에 앉은 한 청년이 부엌칼을 들고 혼자서 계속 누군가를 죽여버릴꺼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가씨 한분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승객 모두가 안좋은 사태에 휘말릴까봐 애써 외면하는 눈치였다. 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아가씨에게 다가가서 나와 자리를 바꿔주었다. 아마도 젊음의 객기가 아니었나 싶다.

자리를 바꾸는 나를 계속 쳐다보며 그 청년은 칼을 만지면서 누군가를 죽여버린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자리에 앉아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술에 취했을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몽롱한 눈동자에서 술이 아닌 마약류일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아 이거 완전히 똥 밟았구나! ' 하는 생각이 들었고, 신기하게도 그 당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 옆에서 칼로 찌르면 왼손을 내어주고 오른손으로 어떻게 제압을 한다느니,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제압을 한다느니 ' 하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영화계를 강타한 홍콩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이리라. 일단 두꺼운 책을 꺼내 상의 안쪽에 품고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왼쪽 어깨에 무엇이 느껴진다. 눈을 떠보니 옆자리 청년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는 것이다. 칼까지 내 발앞에 떨어뜨리고... 물론 나도 둘이 머리를 맞대고 잠이 들었었나 보다. 얼른 칼을 치우고 보니 침까지 흘리면서 잔다. '아 더러운 놈' 하는 생각을 하다 피식 웃을뻔 했다.

 '인간아! 너나 나나 참 둔하다. 그 순간에 잠이 오더냐?'

다시 잠들었다. 터미널까지. 그리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헤어졌다. 이런! 용감한건지 둔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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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05-2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보면 볼수록 차~암 괜찮은 분 같아요!
'책 좋아하는 사람치고 휴머니스트 아닌 사람이 없다니까...'

icaru 2004-05-28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섬찟하네요..하지만 마지막엔 휴머니즘이...
근데 잉크냄새님은...참...인생의 쓰디쓰고 달디달은...에피소드가 많네요...아르바이트 하다가...죽을 뻔 한 경험이나...이 경험이나...

icaru 2004-05-2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스텔라 님 코멘트와...내 코멘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올라갔어요... 우린 또...무슨 인연일까요 ㅋ

stella.K 2004-05-28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

갈대 2004-05-2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용감한거 맞아요. 멋지기까지..-_-b

미네르바 2004-05-28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감성적이시고, 조금은 여리실 것 같은데... 저런 용감무쌍한 용기(?-아님, 객기)까지...
숨겨진 스토리, 계속 계속 뿜어내 주세요. 기다립니다.

잉크냄새 2004-05-2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즘이 아니고 코미디 같지 않나요? ㅎ

Laika 2004-05-2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멋지군요....역시 우리의 뱃사공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