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오스의 손길을 피해 달아나다 "  


밤은 끝없이 이어졌다. 벌써 훤히 동이 틀 시간이었지만 밤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손길을 외면하고 자꾸만 달아나고 있었다. 비행기 꼬리에 살짝 얹혀질 아침 햇살을 피해 어둠은 서쪽으로 줄행랑치고 있었다. 벌써 깨어난 몸의 감각기관들은 기지개를 켜고 있었지만 어둠을 응시하는 마음 한구석은 아직 꿈이었다. 아니 진짜 꿈이었을지 모른다. 비행기 날개를 따라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고개 들어 바라보던 전설마냥 아득한 별의 속삭임이 아니라 내 귓가에 살며시 잦아드는 그런 속삭임이었다. 어깨 높이에 매달린 별은 그 눈높이 만큼이나 정겨웠다. 허리를 구부리고 자세히 보아야만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풀꽃처럼 손에 잡힐 듯 어깨에 내려앉는 별은 아득한 그리움으로 바라보던 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인도 델리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는 별을 보지 못했다. 첫 여행의 가벼운 흥분으로 저 아래 반짝이는 인간의 꿈을 보았다. 저 곳이 캘커타일까? 바라나시일까? 내가 곧 발디딜 땅에 대한 호기심에 하늘을 보지 못했다. 지금의 밤은 우편을 싣고 밤하늘을 비행하던 생떽쥐베리가 바라본 하늘이 그대로 펼쳐진 듯 싶었다. 그 별들 사이를 유영하던 그를 살며시 품어버린 지중해를 떠올리곤 그가 불시착한 별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후 도착한 이스탄불은 아직 어두웠다. 밤은 한참이나 더 계속되었다.  



<술탄 아흐멧의 블루 모스크>

비 오는 새벽 거리는 을씬년스러웠다. 술탄 아흐멧의 고풍스런 건물 사이 골목을 돌아 나온 택시가 공원의 어느 한 곳에 멈추어 섰을 때도 그곳의 풍경은 어둠에 쌓여 있었다. 숙소를 찾아 한 바퀴 빙 돌았지만 허탕을 치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비 내리는 벤치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새벽녘의 푸르름을 배경삼아 환영처럼 떠오르는 블루 모스크가 보였다. 아! 짧은 감탄 속에 담배마저 떨어뜨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저 푸르름, 어딘가 낯익다 싶더니 모든 세상의 새벽의 푸르름이 떠올랐다. 각각의 지역마다 그 채색을 달리하지만 그가 품어 안는 세상의 빛은 똑 같은 것이었다. 맥그로드 간즈의 안개빛 새벽도, 바라나시의 주황빛 새벽도, 포카라의 황금빛 새벽도 그 푸르름이 나를 감싸고 돌 때 깊은 바다 속으로 침전하는 아늑함에 빠져들곤 했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는 술탄 아흐멧의 한쪽 편은 아야소피아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 비에 젖은 벤치에 쭈그리고 앉아 새벽을 맞이한 그 곳은 묘하게도 블루 모스크와 아야소피아 성당의 중간쯤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이번 여행은 이슬람과 천주교 두 신의 축복 속에 시작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술탄 아흐멧의 아야소피아 성당>

윗통을 벗어 제끼고 트럭에 올라타 터키 국기를 휘날리며 큰 소리를 외치던 젊은이들을 보았을때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 줄 알았다. 가슴속 깊은 울분을 토해내듯 터져 나오는 함성과 그것에 화답하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는 분명 시위였다. 이스탄불의 버스 정류장은 온통 그런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잠시 후 사람들로 빙 둘러 만들어진 원 속에서 젊은이들이 부모님들을 모시고 나와 춤을 추었다. 나도 낯선 손에 이끌려 원 안으로 끌려가 잠시 몸을 흔들다 뻘쯤하게 나왔버렸다. 이 시위 같기도 하고 축제 같기도 한 행위가 무엇인지를 안 것은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였다.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기며 버스에 올라타던, 방금 전까지 웃고 떠들던 젊은이들의 촉촉히 젖어드는 눈빛, 까치발을 세워 겨우 버스 창문에 손바닥을 보이며 유리창 두께만큼의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끝내 울어버린 어머니의 눈물, 그 어머니의 눈물 뒤로 말없이 울음을 삼키던 아버지의 서먹한 눈동자. 굳이 한국의 군입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세상의 모든 부모 자식의 이별을 대변하던 눈들이었다. ‘그래, 터키도 징병제였지.’ 다음 목적지인 샤프란볼루로 떠나는 버스에는 훈련소로 향하던 수많은 젊은이와 이미 그 눈물을 경험한 여행자 한 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다 울컥해버린 슬픔의 전이, 서로 맞잡지 못한 어머니와 아들의 유리창 두께만큼의 그리움이 오늘 만큼은 그 어느 그리움보다 아득했다.  



<돌마바르체궁 내부>

여행지에는 아쉬운 그 무언가를 남겨두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한다. 특히 그 여행지가 다시 돌아와야 할 길 위에 있을 때에는 더욱 간절하다. 갈라타 타워에 올라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볼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왠지 저 해협을 유람선으로 건너 아시아를 밟는 것은 여행의 마지막으로 미루고 싶었다. 어차피 다음 목적지가 터키 북부인지라 아시아 지역이었지만 해협을 직접 건너는 일만은 마지막으로 미루고 싶었다. 지중해 해변을 거쳐 올라오려던 계획이 변경되어 이집트에서 비행기로 지중해를 통과하여 돌아온 다음 날 보스포러스를 건넜다. 터키는 떠날 때처럼 여전히 우기인지라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인도-네팔 소나울리 국경을 넘던 일이 생각났다. 국경에 양발을 걸치고 대지의 어머니에게 인위적으로 그어버린 선을 쓱쓱 문지르며 느꼈던 아쉬움, 인간의 오만함이 인위적으로 만든 틀이 그 땅에 살아가는 이들을 규정한다는 씁쓸함. 가깝게 마주보는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서양의 문명이 얼마나 많은 반목과 충돌을 거듭하였을까. 빗방울이 굵어지는 사이 유람선은 어느덧 아시아 선착장을 찍고 유럽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보스포러스 해협, 맞은편이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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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10-06-24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사진 잘 읽고, 보고 내려오다가 맨 아래에서 열불!!!

잉크냄새 2010-06-24 18:40   좋아요 0 | URL
저 연인의 모습 때문인가요?
그리 부러운 모습이 아니거늘...ㅎㅎ

털짱 2010-07-14 22:0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언니 우리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잉크냄새 2010-07-15 09:48   좋아요 0 | URL
두 분 사이에 그런 협약이 있었군요.

blanca 2010-06-24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터키에 가셨군요...저한테 터키에서 온 파란 눈동자(행운을 준다고 했던가?)가 있는데...똑같은 곳을 가도 잉크냄새님은 더 크고 깊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 가 보지 못했지만 사진이랑 글이랑 보며 마치 가 본 듯한 느낌을 가져 봅니다. 이젠 유럽인가요?

잉크냄새 2010-06-24 18:41   좋아요 0 | URL
네, 그 행운의 터키석. 터키 곳곳에 팔고 있죠. 하지만 터키뿐 아니라 중동 모든 나라에 팔고 있더군요.
유람선을 타고 아시아 대륙을 찍고 유럽 대륙으로 넘어오는 길입니다. 실제 여행은 아시아 쪽으로 이어졌습니다.

2010-06-24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5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5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6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4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5 1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2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여행서를 내신 적이 있나요? 글이며 사진이며 예사롭지 않네요. 다들 알고 있는데 혹시 저만 엉뚱한 소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담 용서하세요.

"어깨 높이에 매달린 별은 그 눈높이 만큼이나 정겨웠다."

이런 문장을 보면 누구든 잉크님이 다녀오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어질 겁니다^^

잉크냄새 2010-06-25 11:05   좋아요 0 | URL
전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일반 직장인입니다. 벌써 시간이 지난 여행이지만 그때의 기록과 사진과 기억을 추스려 저만의 여행기를 하나하나 적어나가는 중입니다.
다행이네요. 제 글을 읽고 누군가 제가 걸어간 그 길을 떠올려본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양철나무꾼 2010-06-3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잉크냄새님.
현대인들님 블로그에서 꼬리 잡고 들어왔어요~^^
글이 참 정겹네요.

시간을 두고 쬐금씩 아껴 읽어야 겠어요~

잉크냄새 2010-06-30 11:54   좋아요 0 | URL
네, 안녕하세요. 저도 현대인들님 서재에서 뵈었었는데 인사를 못드렸네요.
제 서재는 그저 넋두리나 푸는 서재인지라 편하게 오시면 됩니다.
저도 종종 뵙지요.

전호인 2010-06-30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이맘때쯤 옆지기와 아이들을 문화체험 삼아 터키를 보냈었습니다.
동서양과의 문화(문명?)이 교차되는 지점, 터키.
여러가지 체험을 하고 온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각인시킨 듯 하여 기분도 좋았어요.

잉크냄새 2010-06-30 18:51   좋아요 0 | URL
작년 이맘때쯤이면 제가 귀국하고나서군요.
인도에서 어린 두 아들딸을 데리고 여행하는 제 나이 또래의 여성분을 만났습니다. 대학때부터 배낭여행을 시작한 그 분은 지금도 아이들의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더불어 여행을 하고 있더군요. 아마도 여행이 그 아이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주리라 느꼈던 것이 문득 떠오릅니다.
참, 반갑습니다.

양철나무꾼 2010-07-22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관탐정 미스터 야심>이라는 장르소설을 읽느라고 한동안 터키에 대해서 엄청 공부하며 머리 아파했던 게 떠올라요.

이 글을 3년쯤 전에 봤음...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돼서,좀 수월했을텐데...

책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경험을 앞지를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잉크냄새 2010-07-23 13:08   좋아요 0 | URL
네, 경험이 지식보다 오래 남죠.
책을 통한 지식과 경험의 획득은 한계가 있죠. 지금은 중국에서 중국인을 경험중인데...어렵네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