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뼈가 주는 정겨움 – 중국 홍콩 -
홍콩은 실제 여행계획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환율상승에 따른 엄청난 비행기표 값에 대한 보상 심리로 1박 2일의 스탑 오버를 신청한 곳이 홍콩이었다. 새벽 5시경의 홍콩은 아직 어두웠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찾아간 무간도의 배경이 되었다는 “침사추이”는 아직 어둠에 휩싸여 황량했다. 몇몇 24시 편의점과 거리 청소를 시작한 청소부들의 부산함 사이로 골목을 거닐다 문득 이번 여행 중 여명도 밝지 않은 새벽 골목길을 걸어본 일이 처음임을 느꼈다. 도망치듯 빠져나간 델리 공항의 새벽과는 비교도 안되는 여유로움이라니. 인도인들이 종종 파키스탄인이나 네팔인이 아니냐고 묻곤 했다. 그 즈음 자전거 일주를 마치고 떠난 뒤라 얼굴이 검게 탄 상황을 인정하더라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파키스탄인 이냐고 묻는 그들의 저의는 아주 저열하고 비겁한 행위였다. 인도에서 가장 치욕적인 욕이 “짤루 파키스탄(꺼져, 파키스탄 놈아)”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에게 웃으며 파키스탄인이냐고 묻던 그들의 엷은 미소 뒤에 깔려있던 비굴한 저의와 입가로 흐르던 저열한 히죽거림이 다시금 느껴져 서글펐다. 인종과 국적과 정치적 견해로 한 인간을 판단하고 모욕하는 비열한 행위라니.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다시 한번 그 입을 놀리는 놈을 만나면 멱살을 잡고 패대기를 쳐야지 하는 마음을 가진 후로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네팔인이냐고 묻던 물음, 인도-네팔의 소나울리 국경을 넘으면서 “아, 그렇구나” 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입국 사무소로 안내하여 하나 하나 꼼꼼히 알려주던 작은 키의 나이든 직원의 친절함은 인도에서 겪지 못한 행동이라 다소 당황스러웠는데 호기심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 발견한 것은 넓은 얼굴과 광대뼈였다. 그 얼굴이, 그 광대뼈가 주는 평안함과 정겨움이라니. 네팔 곳곳에서 마주치는 광대뼈들은 그 누구보다 정겨웠다. 비슷한 얼굴이 비슷한 마음을 가졌으리라는 알수없는 연대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 여명이 다가오지 않은 홍콩의 황량한 골목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홍콩 야경 >
첫날 홍콩의 야경은 환성적이라 할만했다. 소리와 빛의 향연은 30분 정도 진행된 걸로 기억한다. 침사추이와 반대편 선착장을 왕복하는 유람선에 몸을 싣고 물결의 일렁임에 몸을 맡겼다. 건물 사이를 흐르는 빛의 순간적인 소멸 뒤로 살며시 떠오르는 지난 여행의 추억은 여행 막바지의 감흥을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흔들리는 배 난간에서 마시는 한잔의 맥주는 다소 아쉬워지는 마음을 충분히 달래주었다. 둘째 날은 공항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시금 찾아 든 길이었다. 다시 유람선을 타고 물길을 거스르다 거대한 장벽에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빛의 향연 한쪽에 자리잡은 “SAMSUNG”이라는 거대한 간판은 그 감흥을 완전히 깨뜨렸다. 인도 다람살라의 산골 마을에 자리잡은 핸드폰 대리점을 보고 그저 헛웃음이 나왔다면 홍콩 야경의 한쪽을 차지한 거대한 간판 앞에서는 막막한 서글픔이 느껴졌다. 자본주의 총아라 할 수 있는 홍콩의 당연한 모습이라 여겨지면서도 저 부도덕한 기업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떠올릴 이곳의 많은 이들의 모습이 서글펐다. 첫날의 풍경만 담고 떠났어야 했거늘, 홍콩의 야경은 그렇게 씁쓸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아있다.
<홍콩 침사추이 거리에서>
홍콩이 명품 쇼핑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약간의 발품을 팔면 정겨운 재래식 시장 풍경을 만나게 된다. 특히, 관상어들이 비닐 봉지 한 움큼의 물에 담겨 가게 문마다 걸려있던 관상어 시장, 길 모르는 이방인을 인도하는 향기로움과 회색빛 도시를 감싸고 도는 색감의 다채로움이 거리를 수놓던 꽃 시장, 그 꽃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간 길에 아무도 살지 않는 숲에 누워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지저귀던 새 시장이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의 시장은 시장 골목 양 옆을 차지한 난전 형태의 골동품 시장인데 옛 것에 대한 안목이 있다면 꽤나 값어치 있는 골동품을 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 물건들이 많다. 그 시장에서 19세기 후반대의 1달러짜리 동전을 구했는데 안목은 없지만 꽤나 값어치 나가는 물건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보관 중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선 것은 범선 시절에나 사용했을 법한 나침반이었다. 그저 북극성만으로 길을 찾아 떠나고 싶은 열망을 마구 헤집어 놓았지만 왠지 여행 막바지의 여흥과는 맞지 않아 손에서 놓아버렸다. 아마도 그 길이 떠나는 길이였다면 나침반을 샀을 것이다. 떠남과 돌아옴, 그 길이 같은 선상에 놓여있더라도 발이 내딪는 방향이 다르듯 가슴이 내딪는 방향도 다르다. 잠시나마 돌아오고 싶은 길이었다.
<유람선 선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