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 입소를 앞두고 거닐던 해질녘의 부둣가 어느 전봇대에 원양어선 선원을 모집하는 전단지가 나부끼고 있었다. 1년 반의 선원 생활이면 남은 3,4학년의 학비/생활비 걱정도 없고, 잘하면 짧은 한달간의 유럽 여행도 가능한 금액이었다. 어촌에서 상경한 고학생에게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4년의 대학 생활동안 7개월 정도의 막노동을 하였다. 곰방,비계공,배관공,미장공,시다,잡부,철근공,콘크리트,황태덕장 상덕,정원사...땅의 많은 일을 경험한 나에게 바다의 소식은 나름 매력있는 제안이었다. 어차피 돈이 가장 큰 매력이었지만. 그당시의 난 어쩌면 졸업후 나의 삶이 지금처럼 사무직으로 굳어질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것 같다. 그래서 졸업전에 세상의 다양한 일들을 접하고 싶어했다. 사실 이것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하나의 자기 최면의 일종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평발, 신검시 평발 판정을 받은것이 생각났다. 훈련소에서 최종 재검이 있다고 하기에 병원에서 다시 X-RAY와 진단서를 끊고 돌아서는 나의 뒷통수를 향해 의사는 "50만원 정도면 면제 가능하겠는데요"라고 말했다. 젊기에 가능한 결정을 하고 돌아섰다."흥". 이런 저런 정의니 논리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왠지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게 젊음인거다.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김훈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p20-



재검에서 떨어진후 돌아가던 봄밤은 조용조용 봄비가 내렸다. 훈련소를 끌려가던 버스는 암울하고 적막했다. 내 인생 절대 잊지 못할 노래가 되어버린 김건모의 "잠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는 왜 그리 처량한던지. 가슴과 옆구리로 날아들 군화발과 배신의 이미지로 낙인찍힐 치욕보다도 뒷주머니에 고이 접혀있던 원양어선 선원 모집 전단서는 또 왜 그리 눈에 밟히던지. 자정이 되기전 도착한 훈련소에서 숱한 군화발과 치욕속에서 이를 갈며 생각했다.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그러나, 얼마전 다시 평발을 내밀었다. 회사 통합후 새로 부임한 부회장이 마라톤과 등산 매니아였다. 천성이 뒷통수에 반골이 있는지라 강압적인 마라톤에 참여를 거부하고 평발을 내밀었다. 몇번의 강압에도 버티었다. 총무팀에서 이 문구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라톤 불참 사유 - " OO본부 OOOO팀 잉과장 - 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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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08-21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마노아 2007-08-21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눈물을 앞세우며 추천! 크흑...;;;;

Mephistopheles 2007-08-21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과장님과 메차장의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는 페이퍼였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1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발이 많으시구나.. 아무개님에 메차장님에 잉크님까지..
강압적인 건 뭐든 싫어요, 그죠? ^^

비로그인 2007-08-21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발만 아니면 내 이상형인데;;; 아쉽 잉과장님 :)

잉크냄새 2007-08-21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아무개님 / 무엇에 동감하시는지요. 평발? ㅎㅎ

비연님 / 김훈이 평발이었다면 아들에게 저러지 못할겁니다.

마노아님 / 눈물이 훈련소 때인지 총무팀에 걸린 치욕 때문인지...ㅎㅎ

메차장님 / 그럼 메차장님도 아시겠네요. 박지성이로 인하여 평발이 더 구박받음을...평발도 다 "사랑해요 지성"이 처럼 뛸수 있다고 생각하나봐요.

혜경님 / 설마, 혜경님도 평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든것을 싫어라 합니다.

체셔냥 / 평발에 대한 편견을 버리세요. 우리 지성이도 있잖아요.

비로그인 2007-08-21 12:27   좋아요 0 | URL
ㅎㅎ 지성군은 원래 좀 좋아했어요.

프레이야 2007-08-21 12:42   좋아요 0 | URL
저 말고 옆지기요.ㅎㅎ
그래서 오래전 군에서 훈련 받을 때 참 불편했다고 하더군요.^^

잉크냄새 2007-08-23 12:35   좋아요 0 | URL
체셔냥 / 그럼 지성이를 버리세요.

혜경님 / 아마 행군이 가장 어려웠을 겁니다.

비로그인 2007-08-21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과장님~ 페더러랑 샘프라스랑 11월에 테니스 매치 있답니다
것도 한국, 잠실에서요! 캬오-

은비뫼 2007-08-22 0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발의 슬픔이네요. 글이 참 좋아요, 잉크냄새님. :)
제가 아는 친구와 언니도 평발인데 많이 걸으면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쉬엄쉬엄 내미세요~

잉크냄새 2007-08-2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냥 / 진짜 세기의 대결이라 할만하네요. 개인적으로 샘프라스의 우승을 바라지만 나이를 속일수는 없을것도 같네요.

은비뫼님 / 슬픔이라고 까지야...ㅎㅎ 지성이 때문에 자주 내밀수가 없어요. 요즘은 "지성이도 평발인데.." 이 말이 통용되기 때문에 내밀기 무안해요.

2007-08-23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07-08-2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발이신분은 인라인 못타시려나요?^^
아들아 평발을..은 지금 상병으로 복무중인 남동생이 첫 휴가나온 마지막날밤. 누나인 제가 읽어준 글이랍니다.. 눈물을 감추려 기어코 돌린 옆모습 그러나 조금씩 들썩이던 어깨. 그래서 잊지 못하는글이지요.^^

가시장미 2007-08-27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화발과 치욕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늘 우리 주위에.. 으흑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드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무서운 것이던 드러운 것이던,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겠죠.
전 그 대처에 대해 많이 미숙한 사람인 것 같은데, 잉크님은 안 그러신 것 같네요. ^^

잉크냄새 2007-08-2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인생님 / 일단 불편한 신발을 신고 하는 운동은 다 별로입니다. 누나가 읽어주는 김훈의 저 문구들,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가시장미님 / 하하, 어리숙한 평발 대처법을 읽으시면 아시듯이 저도 참 미숙합니다. 다만 그 미숙함을 부끄러워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2007-08-29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9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