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와 헤어지고 - 고흥준

 

어느 골목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은새잎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그때가 유월이었는지, 칠월이었는지, 하루종일 비가 왔는지, 비가 오다 잠시 그쳤던 저녁이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네. 내가 기억하는 건, 당신의 창가에서 흘러나오던 작은 라디오 소리. 초승달이 낡은 지붕 위로 살금살금 걷던 소리.


때로는 어느 골목이었는지 모두 기억할 수 있네. 당신이 잠시 걸음을 멈춰 처음으로 나를 돌아본 길이었는데 그날은 고양이들이 낮은 담장에 나란히 앉아 낯선 이를 구경하던 밤, 아직 밤이기엔 너무 일러 낮잠을 실컷 잔 늙은 호박잎들이 옹종옹종 수군거리던 저녁이었네. 그때 사랑은 참 다정도 하여 반짝거리는 심장을 내게 주었지.


그 밤을 지나는 동안 젊었던 몸뚱이는 참으로 쉬이 늙어 흐느끼던 울음으로도 추억은 남질 않았네. 고양이들의 밤도, 호박잎들의 밤도, 은새잎 가벼이 지던 밤도, 당신이 안녕하며 뛰어갔던 골목에는 무엇 하나 남질 않았네. 그 길에 이리 늙은 몸만 홀로 남아 옛 소리를 듣던 귀는 자꾸 닫혀가고, 당신의 이름 석 자를 담벼락에 쓰다가 주저앉았던 그 골목에, 스물 몇이었던 세월만 고스란히 남았네.


 


*

 

제 서재보다는 잉크냄새님의 서재에 더 어울리는 시라서...

선물로 드립니다 :)

사진은 제가 몇년 전에 홍대 한 골목에서 찍은 거예요. 담벼락 그림이 하도 예뻐서 ^^

 

- 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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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7-07-1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에서 입체감도 느껴지는게 참 정겹네요 ^^

stella.K 2007-07-12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지금도 가면 볼수 있으려나? 잉크님이 부러워요!!

비로그인 2007-07-12 11:03   좋아요 0 | URL
2,3년전에 찍은 건데요, 아마 일부러 다른 그림으로 덧칠하지 않은 한은
있을법도 한데...^^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

잉크냄새 2007-07-12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냥 / 이거 황공무지로소이다. 이런 글을 만날때마다 예전의 펌 기능이 간절해요. 제 페이퍼의 "우물에서 퍼올린 낭만"이 펌글 전용이었는데...하여간 멋진 시 고맙소.

rainer 2007-07-1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정말 근사한 그림이군요 ^^

프레이야 2007-07-13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담벼락 그림이 행복한 기운을 팍팍 내뿜네요.
오,순,떡!! 저 아이 붉은 혓바닥 좀 보세요..^^

잉크냄새 2007-07-1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니어님 / 반가워요. 정말 근사한 그림이죠?
혜경님 / 하하, 오,순,떡이 뭔가 했네요. 오뎅,순대,떡뽁이. 저리 해맑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지는것 같네요.

누에 2007-07-2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란별 만들어갑니다.

잉크냄새 2007-08-07 12:54   좋아요 0 | URL
노란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