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늬가 생겼어요 비룡소의 그림동화 21
데이빗 섀논 글.그림, 조세현 옮김 / 비룡소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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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갓 학교에 가게 된 주인공 카밀라는 학교 가는 첫 날 친구들에게 잘 보이려고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해서 마흔두번이나 옷을 갈아입는 다소 남의 눈을 신경 쓰는 아이다. 하지만 기껏 학교에 가기도 전에 카밀라는 몸에 줄무늬가 생기는 병에 걸리게 되고, 병을 고치기 위해 의사선생님과 과학자, 심리학자 등 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되려 증세는 더 악화되고 만다. 결국 병이 낫지 않은 채 학교에 가게 된 카밀라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게 되고, 친구들이 하는 말처럼 몸이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카밀라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온 한 할머니. 할머니는 카밀라에게 사실 아욱콩을 좋아하지 않느냐며 아욱콩을 먹으면 병이 나을 거라고 얘기한다. 친구들이 모두 좋아하지 않았기에 차마 아욱콩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카밀라. 결국 아욱콩을 맛있게 먹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우리는 살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다 뿐이지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이 옷을 입으면 남들이 어떻게 볼까? 다들 재미있게 본 영화를 재미없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등등. 나이가 들어갈 수록 자신의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을 맞춰가려고 한다. 이 책 속의 카밀라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결국 마음의 병을 얻어 몸이 줄무늬로 변하기에 이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 혹은 이 책을 읽는 어른들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자신답게 살 수 있는 주관이 아닐까 싶었다.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 표지가 독특해서 읽어보게 된 책이었는데 읽고나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해하기엔 다소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서 이왕이면 어른들이 보면 느끼는 바가 많을 것 같지만, 칼라풀해서 의외로 아이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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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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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문학상의 수상작을 고작 2권 읽어봤을 뿐이지만(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나의 아름다운 정원), 어느 정도 가벼움을 유지하면서도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작품들인 것 같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수상작인 <무중력 증후군>의 표지와 제목을 보고 이 작품도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의외로 쏠쏠한 재미를 안겨줬다. 80년생 작가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라 '너무 깊이감이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젊기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너무 깊이감이 없고 가볍기만 한 소설은 아니었다.)

  어느 날 달이 번식을 하기 시작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달리 하나 더 생기고, 15일을 주기로 하나씩 달이 번식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달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중력이 약해진 것처럼 점점 무중력 상태로 향해간다. 주인공 노시보의 엄마는 어느 날 달구경을 간다는 쪽지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가버리고, 고시원에서 사는 형은 우렁각시처럼 찾아와 아버지가 기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요리를 해놓고 떠난다. 전화로 땅을 파는 주인공는 이런 세상의 무중력 상태를 한발짝 멀리서 바라보며 관찰자의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 역시 무중력 증후군을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 무중력자들이 점차 늘어나는 지구의 운명은 대체 어떻게 되는건지...

  공상 과학 소설같은 제목을 갖고 있지만, 이 책은 공상은 모르겠지만, 과학과는 거리가 있다. 달이 늘어난 사건을 두고 언론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토론들, 그리고 마치 종교처럼 퍼져가는 무중력자들, 달의 번식을 기회삼아 무중력을 아이템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마치 달이 더 생기지 않았더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달의 번식에 한 편으로는 충격을, 한 편으로는 재미를 느낀다. 일종의 얄팍한 대중 심리랄까,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병명까지 만들어내자 사람들은 유행병처럼 무중력 증후군을 앓고, 심지어 돈을 주고서라도 무중력 증후군을 앓기를 희망한다. 무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뭐든 팔리고, 무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인 채 생산되는 많은 UCC들. 이것은 굳이 '무중력'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익숙한 것이라 왠지 모르게 씁쓸한 웃음을 남겼다. 

  달이 더 생겨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란 사실 달이 없는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건들이었고, 처음에는 달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이 문자로 올만큼 중요한 뉴스였지만, 달이 6개가 되었을 때는 더이상 뉴스가 아니게 된다는 점들을 보며 뉴스에서 떠들고 있지만 않는다 뿐이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주위에 달이 몇 개씩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력의 작용이 없는 무중력 상태로 나아가고 싶지만, 차마 중력을 끊어버릴 수 없기에 무중력을 꿈꾸는 현대인들. 어쩌면 우리는 달이 하나 더 생기는 것처럼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혹은 해방시켜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것이 음모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 하여도, 무중력자들은 무중력의 그 순간만큼은 해방감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다 읽은 나도 책을 읽었던 순간만큼은 왠지 즐거운 일탈을 한 기분이 들었다. 

  책날개에 있는 사진만 보면 천상 여자같이 생겼지만, 여자 작가라면 떠올리기 쉬운 부드럽고 섬세한 문체가 아니라 더 의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이또한 결국 중력처럼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힘인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식상할 지 모르겠지만, 윤고은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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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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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같이 산 부부가 왜 이제 와서 헤어진다는 건지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3년도 아니고 30년인데."
"지치신 거지. 봐. 지금 이 밥은 약간 꼬들거리는 편이야. 나랑 넌 모두 고두밥을 좋아하니까 문제될 게 없지. 알다시피 아버지도 고두밥을 좋아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꼬들꼬들한 밥 말이야. 그런가 하면 엄마는."
"진밥을 좋아하시지."
"그래서 문제야. 부부라는 건 각자의 솥을 갖고 있는 게 아니거든. 한 이불, 한 솥을 이고지고 살아가는 거야. 이 솥 하나에서 진밥과 고두밥을 동시에 해낼 수는 없어. 한쪽이 양보하든가, 아니면 반씩 양보해서 중간 정도로 먹든가."
"그런데 엄마는 매일 고두밥을 드셨지."
"그래. 돌처럼 단단한 밥. 엄마는 지금 단지 깨달으셨을 뿐이야. 진밥과 고두밥은 한 솥에서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39~40쪽

나는 늘 아프다. 아무래도 질긴 바이러스가 신체 부위별로 혹은 장기별로 떠돌면서 증상을 보이는 것 같은데, 원인이 확실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나만 아픈 것은 아니다. 사무실은 병균 덩어리였다. 본인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장은 '추함'을 앓고 있고, 조 부장은 '무모증'과 '외로움'을, 그리고 이 과장은 '외로움'과 '숙취'를 앓았다. 앙숙인 조 부장과 이 과장이 같은 병을 앓는다는 사실은 참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홍 과장은 '엉덩이 처짐'과 '교통 체증으로 인한 짜증'이란 병을 앓고 있다. 젊은 피를 자랑하는 김 과장 역시 '노동'이라는 병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유 과장은 '눈 밑 주름 강박증'을, 송 과장은 '신경질적 무릎 관절염'을 앓았다. 내가 지금 나열한 것들은 모두 과거에는 없었으나 현대에 와서 생긴 비질병성 사례 상위 20위 안에 드는 것이다. -47쪽

내 나이는 스물다섯이었지만, 형의 스물다섯과 나의 스물다섯은 달랐다. 아무리 경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고 해도, 그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나는 형의 청춘에 비해 폭삭 늙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탓도 형의 탓도 아니었고, 내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형처럼 공부를 잘했다면, 아버지가 이름을 알 만한 대학에 들어갔더라면, 이도 저도 아니면 다른 특기라도 있었다면 내 인생도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특기도 없었고, 꿈도 없었다. 다만 장사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면 아이의 가정환경평가서에 '회사원'이라고 쓸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긴 했다. 그게 내 유일한 목표였다. 그 꿈에 아버지의 '소속주의'가 결합되어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던 것이다.
대학 졸업식은 어떤 의미에서 낙인과 같았다. 다시 무소속이 될 수 없다는 낙인. 나는 여러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어놓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그런 모호한 상태로 졸업식을 맞았다. -67쪽

"요즘의 평균 지적 수준을 고려해서 대학 졸업 때까지는 내가 너를 키우기로 했다. 졸업 후에는 사회인이 될 테니 말이야. 그때는 네 스스로 커야 해."
"그땐 더 클 것도 없을걸요?"
그럴 줄 알았다. 대학까지 졸업한 나이에서 뭘 더 클 것이 있을까. 그러나 달랐다. 나는 마치 조로증(早老症)을 앓고 있는 것처럼, 아이의 모습 그대로 늙어버린 것 같았다. 아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벌써 이런 예감을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69쪽

어찌 보면 인생은 졸업과 졸업의 연속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니까 중학교가 기다렸고, 중학교를 졸업하니까 고등학교가 기다렸다. 대학교까지 졸업하니 사회가 블랙홀처럼 나를 덮쳤다. 아버지는 늘 '사람은 소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나는 그 말에 떠밀리듯 아무 구멍이나 찾아 들어갔다. 그 결과 직장을 일곱 번이나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졸업 이후 나를 설명할 만한 소속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가장 심각한 것은 영혼의 영양실조였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영혼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는 여러모로 노력해야 했다. 50개가 넘는 온라인 동호회에 가입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부였다.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나를 막지 않았다. 동호회가 많아지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소속된 모임의 수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지구 밖으로 내팽겨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 소외감이었다. -72쪽

달과 관련된 모든 것은 여전히 인기 검색어였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궁금해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각자 다른 생각들을 품고 있다는 것만큼 소외감을 느끼는 일도 없다. 그것이 내가 자주 인터넷 검색 순위를 살펴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순위에 내가 아는 것이 올라오면 안심이 되었고, 모르는 검색어가 등장하면 부리나케 정보를 찾아보았다. -82쪽

"어떤 질문의 답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뉴스가 되느냐 덜 되느냐. 그뿐이죠."
"너무 단순해요."
"그게 보도할 때는 효율적인 걸요. 생각해봐요. 달과 관련된 미신들을 믿는 건, 달이 정말 초인적인 힘을 가져서가 아니라구요. 대중매체나 소문으로 달의 어떤 능력에 대해 반복해서 떠들면, 사람들은 우선 그 이야기에 익숙해지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강화 현상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보게 될 자료를 선택하게 된다구요. 그 선택 기준이 뭐겠어요? 바로 우리가 제공한 뉴스죠!"-131쪽

모든 사건에는 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연쇄 살인은 한 1년 주기로 사회를 뒤흔든다. 2년에 한 번씩은 식품에 이상이 생겨 파동을 만들어낸다. 4년 2개월에 한 번씩 경제가 휘청거린다는 기사가 각광받고, 6개월에 한 번씩 정치인들의 로비 사건이 생긴다.
이것을 형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모든 음식에는 주기가 있어. 대중의 선호도라고 하는 것. 즉 유행이라고 하는 것은 흐름을 탄다고. 이를테면 닭고기만 봐도, 그래. 페리카나 치킨이 언제 처음 나왔는줄 알아? 난 생생히 기억해.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야. 그때 최양락이 페리페리~페리카나~하면서 광고를 했었지.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니까 닭갈비가 유행하게 된 거야. 대대적으로. 그 다음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찜닭이 유행하더군. 닭갈비집은 다 찜닭으로 이름을 바꿨어.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되니까 불닭이 유행한거야."-201쪽

물론 사건은 늘 일어나지만, 이 주기라는 것은 사회를 뒤흔들만한 '이슈'가 됨을 말한다. 이슈가 되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신문에 실려야 한다. 일주일 내내 신문 1면을 차지할 수 있다면 명예의 전당에 들어야 한다. 50일 이상 그것이 지속된다면 타임캡슐에 넣을 만한데, 아직까지 그런 사건은 없었다. -20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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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8-08-0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딴 소리 하나..)
우리동네 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했지요.(검색할때까지 책이 도서관에 없는 상태였거든요)
신청해서 구입 도서로 선정이 되면 신청자에게 제일먼저 대여를 해줘요. 그런데 그 기간이 신청일로부터 약 3주가 걸리거든요. (성질급한 사람은 이 짓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문자가 왔네요. 책 도착했으니 일요일 안으로 '꼭' 대여해 가라고요..
내일부터는 집에 없어서 오늘 '꼭' 대여하러 가야하는데 이 날씨에 죽을것 같아요.. ㅠ_ㅠ
그래도 보고 싶었던 책, 빤딱빤딱하는 상태로 '무료'로 본다는 기쁨이 하늘을 찌릅니다 ^^

이매지 2008-08-08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학교 도서관에 그 맛에 신청했어요 ㅎㅎ
오늘도 햇빛이 완전 사람 지지는군요 -_-;;
선크림에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무장하고 나가세욧!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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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박민규라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를 해서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인지 최근의 박민규의 작품은 그저 그렇고, 그냥 그런 수준이다. 이 책이 나올 때만 해도 한국 문학에서 이런 스타일의 글을 쓰는 사람은 박민규밖에 없었기에 그에게 거는 기대가 더 컸을 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굳이 박민규가 아니더라도 가벼우면서 정곡을 찌르는 한국 소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그에게 거는 기대도 그만큼 덜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어깨에 힘을 빼고 근 4년 만에 다시 읽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여전히 박민규라는 브랜드가 헛방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프로야구의 열기가 찾아온다.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해도 주변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둘 있기 마련이고, 그들이 해주는 야구 이야기를 좋거나 싫거나 듣게 마련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야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야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모두 읽을 수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통해 성장해간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을 연고지로 정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생기게 되고 야구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주인공. 하지만 유니폼에는 슈퍼맨이 새겨져 있고, 선수들의 이름도 외우기 쉽다는 과학적인 분석에도 불구하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야말로 지기 위해 지구에 내려왔다고 할 정도로 오늘 지고, 내일도 지고, 두 번 졌으니까 잠깐 쉬었다가 또 지는 팀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삼미 슈퍼스타즈. 그들과 함께 중학생이었던 주인공은 늙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83년 삼미는 6위가 아닌 2위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내놓는다. 이에 달라지는 주변의 태도. 하지만 84년 이후 다시 삼미는 꼴찌로 전락하고, 주위의 시선도 다시 달라진다. 이후 주인공은 삼미의 고별전을 보고, 결국 '소속'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깨닫고 미친듯이 공부를 해서 일류대에 들어가 프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IMF 한파로 구조조정을 당하고 나앉은 그에게 친구인 조성훈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는데...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인생을 야구에 비유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이 아웃이라고 포기하려는 주인공에게 조성훈은 니 인생은 아웃된 게 아니라 포볼이라고, 1루로 진루하라고 이야기한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처럼 적당히 잡을 수 있는 공만 잡고, 칠 수 있는 공만 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프로의 세계를 아마추어처럼 살아가는 것은 주위로부터 비아냥을 받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아무렴 어떠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를 통해 모두가 프로로 살아가려는 현실을 비판하는 이 책을 읽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약 1년 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내 인생이 투아웃에 투스트라이크 정도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인생이 정말 그렇게 절망적이라는 생각일까라는 생각이 들며 왠지 위로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볼이라 1루에 나가서 쉬는 주인공처럼 빈둥거리며 쉴 수는 없겠지만 그랬거나말거나, 경기는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플레이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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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8-07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가장 고마웠던 것은, 9회말 투아웃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서일 거예요. 이렇게 신나게 웃으면서 또 통렬하게 아파하기. 전 박민규가 너무 좋아요^^

이매지 2008-08-07 22:34   좋아요 0 | URL
최근 작품들은 너무 가볍기만한 것 같아서 아쉬워요.
박민규식의 화법은 좋은데 말이죠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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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고, 다만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편이었던 나는 그저 자식 된 도리로서 습관처럼 알파벳을 외웠던 게 아닐까 싶다. 지금에 와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당시의 자식 된 도리란- 확실히 뭔가를 외우는 일에서 시작해 뭔가를 외우는 일로 끝을 맺곤 했다. 예컨대 구구단을 외우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우고, 국민체조의 순서를 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애국가의 1,2,3,4절 가사를 외우고, 교과서를 외우고, 공책을 외우고, 전과를 외우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압권은 단연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실로 지극한 효성의 자식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그 도리를 다할 수 없을 만큼이나 그것은 길고, 까다로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8쪽

꿈과 낭만이라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나 야구에 있어서나 적어도 5할대 이상의 승률을 유지하고 있을 때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3할대 정도의 승률로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거야' 따위의 개똥 같은 대사를 읊으며 웃고 떠들 수 있겠지만, 도무지 1할 2푼의 승률로 꿈과 낭만을 간직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생이라면, 대부분 4할에서 5할 정도의 승률을 유지할 것이며, 운이 좋은 인생이라면 6할에서 7할 정도의 승률을 유지할 것이고, 비록 운이 없는 인생이라 해도 아무튼 3할에서 4할 정도의 승률은 유지하기 마련인 것이다. 더군다나 소년이라면, 하늘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쉽게 꿈과 낭만에 젖어들 수 있는 소년이라면 - 그 승률은 좀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1할 2푼의 승률을 숙명처럼 끌어안고 사는 소년들이 있었다. -60쪽

야구를 좋아하는 이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선수와 팀을 가지고 있다. 60년 동안 야구를 사랑해온 늙은이에게도, 바로 어젯밤부터 야구가 좋아진 중학생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을 뽑거나 국회의원을 뽑을 때와는 달리, 적어도 야구에선 '다 똑같은 놈들이야'라거나 '전부 도둑놈들이야'와 같은 태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야구에 관심이 없는 이라 해도, 경기를 죽 지켜보다 보면 어쨌든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거나 어떤 팀의 선전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마련이다. 야구란 그런 것이다. -80쪽

잘 관찰해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본래 위치로 돌아온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결코 사라지거나, 떠나거나, 달라질 리 없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 질량 보존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물론 '운명'과 같은 것에도 질량이 있으며, 그것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코?
진정코! -104쪽

생각해보니, 내 인생은 과연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외동아들이었고, 거의 이대로 평범하고 평범한 가문의 아버지가 될 확률이 높은 인생이었다. 타율로 치면 2할 2푼 7리 정도이고, 뚜렷한 안타를 친 적도, 그렇다고 모두의 기억에 남을 만한 홈런을 친 적도 없다. 발이 빠른 것도 아니다. 도루를 하거나 심판을 폭행해 퇴장을 당할 만큼의 배짱도 없다. 이대로 간다면.... 맙소사, 이건 흡사 삼미 슈퍼스타즈가 아닌가. -124쪽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볌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 원년의 종합 팀 순위로 그것을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126쪽

6위 삼미 슈퍼스타즈 : 평범한 삶
5위 롯데 자이언츠 : 꽤 노력한 삶
4위 해태 타이거즈 : 무진장 노력한 삶
3위 MBC 청룡 : 눈코 뜰 새 없이 노력한 삶
2위 삼성 라이온즈 : 지랄에 가까울 정도로 노력한 삶
1위 OB 베어스 : 결국 허리가 부러져 못 일어날 만큼 노력한 삶

아아, 실로 무서운 프로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고 16살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 평범한 삶보다 조금 못하거나 더 떨어지는 삶은 몇 위를 기록할 것인가? 몇 위라니? 그것은 야구로 치자면 방출이고, 삶으로 치자면 철거나 죽음이다. 그런 삶은 순위에 낄 자리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126쪽

시골 출신의 신입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가능한 한 자신의 촌티와 사투리를 숨기려는 스타일과, 자학을 하듯 그 오버액션을 연출하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물론 더 큰 상처를 받는 쪽은 후자지만, 클립턴 행성의 인간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행성인들은 술자리가 심심하다 싶으면 이들의 촌티와 사투리를 부추겼고, 이들은 이미 15:0이라는 심정으로 자학적인 희극과 코미디를 연출하곤 했다. '소속'의 슬픔이란 그런 것이다. 이른바 가장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 집단에서도 이 '소속'의 콤플렉스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사실 그래서, 인간은 절대 평등할 수 없다. -144~5쪽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적어도 패션과 외모에 관한 한, 나는 김치사발면 속의 동결건조김치와도 같은 존재였다. 아무리 물을 붓고, 불려도 그것은 절대 진짜 김치가 되지 않는다. -168쪽

청춘은 고장난 탱크와 같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누구나 그런 모습으로
내일의 문 앞에 서 있었다. -185쪽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도 버티고 있는, 그래서 아무 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삶은- 실은 그래서 기적이다. -199쪽

제대를 하면서, 나는 '소속'의 고민과 비슷한- 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그곳에서 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계급'이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소속 안에서, 또 다시 여러 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구가 위도와 경도로 나뉘어 있듯- 결국 인간은 그런 식으로 이 세계를 분할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위도 몇에 경도 몇... 결국 그곳에 한 인간의 좌표가 위치해 있고, 우리의 삶은 여간해서 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xx사단 xx연대 xx중대 xx소대 ooo상병이라든지, xxx주식회사 xx부 xx팀 ooo대리라든지, 그런 소속과 계급이 없는 듯 보여도 결국은 xxx주식회사 xx부 xx팀 ooo대리의 아내라든지. -203쪽

이 땅에서, 보편적인 결혼의 대부분은 <가정을 버려야 직장에서 살아남는다>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의 결합이다.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그래서 누구나 사는 게 고달프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의 하나였다.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아내의 외눈이 그 사각(死角)을 봐주기를, 자신의 사각 속에서 나는 늘 갈망했었다. 물고기는 끝끝내 그 사각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렵, 그 보편적인 인생 속으로 조성훈이 찾아왔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다소
신기한 것이었고,
이제 나는
그 '다소'나 '신기함'에 대해
그대에게 말하고자 한다.
즉 이것은, 그해에 펼쳐진
우리의 야구에 관한 이야기이다. -217쪽

자본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입사 시험을 치를 때 면접관이 던진 질문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라고 나는, 또렷하게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자본주의를 사랑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먹고 살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가진 것 없이도, 투자가 없이도 노력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누구에게나 사는 건 마찬가지다. 재미없고, 힘들다. 또 바보가 아니라면, 세상을 더 이상 재미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던 철부지들도, 물신 풍조를 우려하던 몽상가들도, 때가 되면 자신의 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좋은 습관, 그리고 사는 건 원래 힘들고 재미없다는 사실에 대한 빠른 인식이 필요하다. 그 세 가지만 제대로 갖춘다면 누구나 이 세계에서-먹고, 살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이다. -220~1쪽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225쪽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다. 이혼을 하고 실직을 당한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서서히 인생을 쉽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자 하나씩, 하나씩 할 일들이 생겨났다. 우선 그날 이후 나는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났고, 어느새 산보를 하며 하늘을 즐기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일과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하늘을 즐겨가면서 나는 점점 낙천적인 인간으로 변해갔다. -241쪽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2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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