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구판절판


"30년 넘게 같이 산 부부가 왜 이제 와서 헤어진다는 건지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3년도 아니고 30년인데."
"지치신 거지. 봐. 지금 이 밥은 약간 꼬들거리는 편이야. 나랑 넌 모두 고두밥을 좋아하니까 문제될 게 없지. 알다시피 아버지도 고두밥을 좋아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꼬들꼬들한 밥 말이야. 그런가 하면 엄마는."
"진밥을 좋아하시지."
"그래서 문제야. 부부라는 건 각자의 솥을 갖고 있는 게 아니거든. 한 이불, 한 솥을 이고지고 살아가는 거야. 이 솥 하나에서 진밥과 고두밥을 동시에 해낼 수는 없어. 한쪽이 양보하든가, 아니면 반씩 양보해서 중간 정도로 먹든가."
"그런데 엄마는 매일 고두밥을 드셨지."
"그래. 돌처럼 단단한 밥. 엄마는 지금 단지 깨달으셨을 뿐이야. 진밥과 고두밥은 한 솥에서 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39~40쪽

나는 늘 아프다. 아무래도 질긴 바이러스가 신체 부위별로 혹은 장기별로 떠돌면서 증상을 보이는 것 같은데, 원인이 확실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나만 아픈 것은 아니다. 사무실은 병균 덩어리였다. 본인들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사장은 '추함'을 앓고 있고, 조 부장은 '무모증'과 '외로움'을, 그리고 이 과장은 '외로움'과 '숙취'를 앓았다. 앙숙인 조 부장과 이 과장이 같은 병을 앓는다는 사실은 참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홍 과장은 '엉덩이 처짐'과 '교통 체증으로 인한 짜증'이란 병을 앓고 있다. 젊은 피를 자랑하는 김 과장 역시 '노동'이라는 병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유 과장은 '눈 밑 주름 강박증'을, 송 과장은 '신경질적 무릎 관절염'을 앓았다. 내가 지금 나열한 것들은 모두 과거에는 없었으나 현대에 와서 생긴 비질병성 사례 상위 20위 안에 드는 것이다. -47쪽

내 나이는 스물다섯이었지만, 형의 스물다섯과 나의 스물다섯은 달랐다. 아무리 경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고 해도, 그 정도로 설명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었다. 나는 형의 청춘에 비해 폭삭 늙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탓도 형의 탓도 아니었고, 내 탓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형처럼 공부를 잘했다면, 아버지가 이름을 알 만한 대학에 들어갔더라면, 이도 저도 아니면 다른 특기라도 있었다면 내 인생도 달랐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특기도 없었고, 꿈도 없었다. 다만 장사는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면 아이의 가정환경평가서에 '회사원'이라고 쓸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긴 했다. 그게 내 유일한 목표였다. 그 꿈에 아버지의 '소속주의'가 결합되어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했던 것이다.
대학 졸업식은 어떤 의미에서 낙인과 같았다. 다시 무소속이 될 수 없다는 낙인. 나는 여러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어놓았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그런 모호한 상태로 졸업식을 맞았다. -67쪽

"요즘의 평균 지적 수준을 고려해서 대학 졸업 때까지는 내가 너를 키우기로 했다. 졸업 후에는 사회인이 될 테니 말이야. 그때는 네 스스로 커야 해."
"그땐 더 클 것도 없을걸요?"
그럴 줄 알았다. 대학까지 졸업한 나이에서 뭘 더 클 것이 있을까. 그러나 달랐다. 나는 마치 조로증(早老症)을 앓고 있는 것처럼, 아이의 모습 그대로 늙어버린 것 같았다. 아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벌써 이런 예감을 해버렸는지도 모른다. -69쪽

어찌 보면 인생은 졸업과 졸업의 연속이다. 나는 지극히 평범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니까 중학교가 기다렸고, 중학교를 졸업하니까 고등학교가 기다렸다. 대학교까지 졸업하니 사회가 블랙홀처럼 나를 덮쳤다. 아버지는 늘 '사람은 소속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나는 그 말에 떠밀리듯 아무 구멍이나 찾아 들어갔다. 그 결과 직장을 일곱 번이나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졸업 이후 나를 설명할 만한 소속을 잃어버린 느낌이 든다. 가장 심각한 것은 영혼의 영양실조였다. 바삭바삭 말라가는 영혼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나는 여러모로 노력해야 했다. 50개가 넘는 온라인 동호회에 가입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부였다.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나를 막지 않았다. 동호회가 많아지다 보니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소속된 모임의 수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지구 밖으로 내팽겨쳐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 소외감이었다. -72쪽

달과 관련된 모든 것은 여전히 인기 검색어였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궁금해 한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각자 다른 생각들을 품고 있다는 것만큼 소외감을 느끼는 일도 없다. 그것이 내가 자주 인터넷 검색 순위를 살펴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순위에 내가 아는 것이 올라오면 안심이 되었고, 모르는 검색어가 등장하면 부리나케 정보를 찾아보았다. -82쪽

"어떤 질문의 답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뉴스가 되느냐 덜 되느냐. 그뿐이죠."
"너무 단순해요."
"그게 보도할 때는 효율적인 걸요. 생각해봐요. 달과 관련된 미신들을 믿는 건, 달이 정말 초인적인 힘을 가져서가 아니라구요. 대중매체나 소문으로 달의 어떤 능력에 대해 반복해서 떠들면, 사람들은 우선 그 이야기에 익숙해지죠.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강화 현상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보게 될 자료를 선택하게 된다구요. 그 선택 기준이 뭐겠어요? 바로 우리가 제공한 뉴스죠!"-131쪽

모든 사건에는 주기가 있다. 예를 들면 연쇄 살인은 한 1년 주기로 사회를 뒤흔든다. 2년에 한 번씩은 식품에 이상이 생겨 파동을 만들어낸다. 4년 2개월에 한 번씩 경제가 휘청거린다는 기사가 각광받고, 6개월에 한 번씩 정치인들의 로비 사건이 생긴다.
이것을 형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모든 음식에는 주기가 있어. 대중의 선호도라고 하는 것. 즉 유행이라고 하는 것은 흐름을 탄다고. 이를테면 닭고기만 봐도, 그래. 페리카나 치킨이 언제 처음 나왔는줄 알아? 난 생생히 기억해.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야. 그때 최양락이 페리페리~페리카나~하면서 광고를 했었지.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 되니까 닭갈비가 유행하게 된 거야. 대대적으로. 그 다음 대학에 들어오고 나니 찜닭이 유행하더군. 닭갈비집은 다 찜닭으로 이름을 바꿨어. 대학을 졸업할 때쯤 되니까 불닭이 유행한거야."-201쪽

물론 사건은 늘 일어나지만, 이 주기라는 것은 사회를 뒤흔들만한 '이슈'가 됨을 말한다. 이슈가 되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신문에 실려야 한다. 일주일 내내 신문 1면을 차지할 수 있다면 명예의 전당에 들어야 한다. 50일 이상 그것이 지속된다면 타임캡슐에 넣을 만한데, 아직까지 그런 사건은 없었다. -20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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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8-08-08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딴 소리 하나..)
우리동네 도서관에 이 책을 신청했지요.(검색할때까지 책이 도서관에 없는 상태였거든요)
신청해서 구입 도서로 선정이 되면 신청자에게 제일먼저 대여를 해줘요. 그런데 그 기간이 신청일로부터 약 3주가 걸리거든요. (성질급한 사람은 이 짓도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문자가 왔네요. 책 도착했으니 일요일 안으로 '꼭' 대여해 가라고요..
내일부터는 집에 없어서 오늘 '꼭' 대여하러 가야하는데 이 날씨에 죽을것 같아요.. ㅠ_ㅠ
그래도 보고 싶었던 책, 빤딱빤딱하는 상태로 '무료'로 본다는 기쁨이 하늘을 찌릅니다 ^^

이매지 2008-08-08 11:17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 학교 도서관에 그 맛에 신청했어요 ㅎㅎ
오늘도 햇빛이 완전 사람 지지는군요 -_-;;
선크림에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무장하고 나가세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