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한동안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많이 보던 때가 있었다. 일요일 점심무렵의 그 프로그램들에서 무슨 영화인지 모른채 인상깊은 장면으로 만난 영화가 있었다. 왠 해골분장을 한 사람이 케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 장면에 매혹되어 찾아보게 된 영화가 바로 이 영화 <파니핑크>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29살의 노처녀 파니 핑크. 그녀는 직장도 집도 친구도 모두 가지고 있지만 딱 하나 자신과 인생을 함께 할 남자가 없다.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녀에게 어느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심령술사가 등장한다. 그녀에게 한 남자가 그녀 앞에 나타날 것이고 23이라는 숫자가 그 남자의 징표라고 알려준다. 과연 머잖아 그녀 앞에 2323이라는 차번호판을 가진 남자가 나타나게 되고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인 행동을 시작하는데...

  영화 속에서 "겁내지마. 과거는 죽음 뒤의 뼈 같은 거야. 미래가 네 앞에 있어. 과거와 미래가 함께 하며 가끔 너와 대화할거야. 너를 보고 좀 앉아 쉬라고 할거야. 휴식을 취하라고 할 거야. 네게는 무엇인가 마실 것을 주며 무슨 이야기를 할거야. 그러나 믿지마. 계속 앞으로만 가. 시계는 보지마 항상 '지금'이라는 시간만 가져"라는 말을 남겨놓는 심령술사 오르페오의 대사는 내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29살 노처녀 파니핑크의 모습도 꽤 재미있게 다가왔고 그녀의 행동들도 너무도 귀엽게만 느껴졌다. (특히나 사랑하는 남자를 덮치겠다고 속옷차림으로 차 트렁크 뒤에 숨어있었던 장면이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파니 핑크의 모습을 보며 그녀 앞에 진정한 '한 남자'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앞으로 그녀의 삶을 좀 더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이 될 것이고 그녀 자신도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것도. 

  독일 영화는 많이 접해보지는 않아서 사실 보기 전에는 다소 철학적인 내용이 아닐까하는 우려를 했었다. 하지만 정작 접해보니 헐리우드식의 감상에 치우친 영화도 아니었고, 지극히 철학적이라 따분한 영화도 아닌 꽤 흥미로운 영화였던 것 같다. 특히나 영화의 후반부에 몇 번이고 흐르는 non, Je ne regrette rien이라는 곡은 인상깊게 남았다.  

덧) 영화에 심령술사로 등장하는 오르페오의 이름에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 원래 오르페오는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뮤지컬의 제목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오르페오는 오르페우스와 같은 삶의 절차를 밟아가고 있었던 것일까?! 흠. 별게 다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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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4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인 오르페 라는 영화도 있답니다..^^

이매지 2006-06-24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영화는 예전에 <신화와 예술>이라는 수업할 때 오르페우스 부분에서 봤었어요^^

프레이야 2006-07-06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이매지 2006-07-06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쑥쓰럽군요^^;

비로그인 2007-10-14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덕분에 어제 EBS에서 이걸 봤어요. 중간에 보다가 하박으로 가버렸지만, 차트렁트에서 나와서 충격먹고서 집에 돌아와 사진을 자른 스프를 먹는 장면까지 봤어요. 조금 아쉽네요. 다시 봐야겠어요. 근데 29살의 파니가 왜그러고 사는지 전 정말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이쁘고 귀엽기만 하더만.

...겁내지마. 과거는 죽음 뒤의 뼈 같은 거야. 미래가 네 앞에 있어. 과거와 미래가 함께 하며 가끔 너와 대화할거야. 너를 보고 좀 앉아 쉬라고 할거야. 휴식을 취하라고 할 거야. 네게는 무엇인가 마실 것을 주며 무슨 이야기를 할거야. 그러나 믿지마. 계속 앞으로만 가. 시계는 보지마 항상 '지금'이라는 시간만 가져...란 대사는 너무 좋네요.

이매지 2007-10-14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ebs에서 했군요 :)
몇 번을 봐도 좋은 영화인 것 같아요 :)
도리스 레싱의 다른 영화들도 괜찮더라구요~
새초롬너구리님은 벌써 보셨을 것 같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