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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쐐기 ㅣ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셜록 홈스를 만난 이후부터 내 삶에서 미스터리는 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주변에 책, 더군다나 장르소설을 읽는 사람은 없었기에 누구의 소개나 추천을 받아서라기보다는 대개 엉겁결에 이런저런 작품들을 만났다. 세월이 흘러 인터넷서점에 둥지를 틀면서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책에 해박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다. 그들에게 많은 작가를 추천받았고, 많은 탐정 또한 소개받았다. 그렇게 알게 된 작가 중에 한 명이 바로 에드 맥베인이다. '87분서 시리즈'에 대한 찬양을 꾸준히 들어왔고, 경찰소설도 좋아하지만 이상하게도 에드 맥베인은 계속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경관혐오자>를 읽은 뒤에 '87분서 시리즈'에 열광하게 되도 그 욕구를 채울 다른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의의 쐐기>의 출간 소식을 듣고는 이제는 최소한 <경관혐오자>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테니까 하는 생각에 드디어 첫 발을 내뎠다. 오랫동안 미뤄온 만남이었기에 더 반갑고 즐거웠던 에드 멕베인, 그리고 87분서 형사들과의 첫만남.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오후, 87분서 형사실에 "마치 병상에서 막 걸어 나온 것처럼 창백해 보"이는, "검은 외투에 검은 구두를 신"고 "커다란 검은 가방을" 든 여자가 찾아온다. 여자는 스티브 카렐라 형사를 찾지만, 카렐라는 마침 개인적인 볼일과 순찰업무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황. 여자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다며 38구경과 니트로글리세린이 담긴 병을 무기로 87분서 형사들을 인질로 잡고 카렐라 형사를 기다린다.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카렐라를 기다리며 87분서 형사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각각 궁리하기 시작한다. 한편, 동료 형사들이 인질로 잡힌 것도 모른 채 카렐라는 한 부호의 자살을 조사하러 출동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살처럼 보이지만 살해동기와 적대감이 분명한 상황이라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인질극과 밀실극. 교차되는 두 이야기가 87분서 형사들의 캐릭터와 함께 어우러져 긴장감을 늦출 새 없이 빠르게 전개된다.
얼마 전 읽었던 <빅 클락>과 마찬가지로 <살의의 쐐기>도 분량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래서 더 매력이 빛난다. 에드 맥베인은 일단 독자를 바로 87분서 형사실로 데리고 가서 '인질극'의 목격자(또는 관찰자)로 만든다. 땅, 하고 총성이 울리면 결승점까지 쉴새없이 달리는 백 미터 달리기처럼 87분서에서 벌어지는 인질극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진행된다. 하지만 아무리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라도 독자를 너무 몰아세우면 숨이 가빠지게 마련. 영리하게도 에드 맥베인은 여기에 '밀실살인'이라는 중거리 코스를 하나 추가한다. 형사실과 현장의 긴장감의 대비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인물의 대비였다. 카렐라 때문에 남편을 잃었다고 폭주하는 버지니아 도지와 아내의 임신 소식을 갓 듣고 기쁨에 찬 카렐라, 니트로글리세린이 진짜일까 의문을 품기에 선뜻 나서지는 못하지만 자기 나름의 타개책을 찾는 87분서 형사들, 그런 동료 형사들의 괴로움도 모른 채 유유자적하게 복귀하는 카렐라의 모습 등이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을 꽉 채운다.
<살의의 쐐기>로 에드 맥베인을 처음 만나면서 물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에도 매력을 느꼈지만, 일반적으로 경찰소설에 기대하는 동료 경찰 간의 의리나 갈등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해나 태도가 눈에 들어왔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도" "그와 똑같은 기쁨으로 즐거워했고, 그가 겪어본 적도 없는 불행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거나 그들이 모두 "사랑과 존경을 원했고, 공동주택의 벽이 동물 우리의 철창과 같지 않다"는 식, 또는 "범죄는 범죄였고, 범죄의 악을 합리화하려는 87분서 형사들은 아무도 없었다"는 식의 서술이 눈에 들어왔다. 이 외에도 중간중간 용기, 참을성, 공정성 등 인간의 내면에 대해 살짝 짚고 넘어갈 때마다 통찰력이 보통이 아닌데 싶다가도 중간중간 던지는 유머에 낄낄거리면서 에드 맥베인을 더 알고 싶어졌다. 다행스럽게도 기존에 출간된 <경관혐오자>는 물론이고 <10 플러스 1>도 어찌저찌 구할 수 있고, 설을 전후해 다른 출판사에서 <아이스>도 출간될 예정인 듯하니 기다림이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듯하다. 50권이 넘는 87분서 시리즈의 모든 작품이 소개되는 것까지는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꾸준히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