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색 연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7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품절


"이상과 정상은 간단히 구분 지을 수 없어. 저야말로 정상의 표본입니다, 하고 말하는 녀석이 있다면 꼭 좀 보고 싶군." -17쪽

나는 히무라의 필드워크에 함께하고 싶었다. 예리한 두뇌와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이 친구는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꿋꿋이 서 있을 터인데, 때때로 몹시 불안정한 일면을 드러낸다. 피비린내 나는 범죄의 바다에 연구자로서 출항한 이유에 대해, '나도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라고 말한 그를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발적으로 범죄라는 필드에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자발적으로 지옥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뜻 같기도 했다. 주제넘은 생각이겠지만 그가 끝자락에서 발을 헛디뎌 저편으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나는 그 팔을 붙잡아 끌어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인지도 모른다. -88~9쪽

내 뇌리에도 다양한 정경이 떠올랐다. 마치 방금 전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선명하게.
주홍색으로 물든 바다. 파도. 하늘.
주홍색으로 물든 해변. 시체. 수사관.
주홍색을 담아내려는 나카무라 미쓰루.
주홍색을 두려워하며 떠는 기지마 아케미.
끔찍할 정도로, 질척하고 진한 주홍색. -162쪽

프로이트에 니체, 푸코, 무슨 말이 적혀 있는지 제대로 이해 못해도 상관없었어요. 도서관에서 빌려서 정신없이 읽었죠. 정말 즐거웠어요.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책만은 저와 차분히 대화를 나누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구원받았는지 몰라요. -207쪽

"살인사건이야말로 최대의 중죄이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에 둠으로써 진상을 해명하고 싶다는 독자의 절실한 욕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소박하게 설명한 작가가 있지만, 독자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살인의 진상이야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제 생각에…… 살인사건이 테마라면 시체가 등장하잖아요. 시체란 '당신을 살해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질문에 대답할 능력을 잃은 존재입니다. 절도사건이나 사기 피해자라면 어떠한 정보를 스스로 제공해주겠지만 살인사건의 경우 그건 기대할 수 없어요. 시체, 죽은 자는 우리가 아무리 질문을 던져도 절대로 대답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 불가능성이 열쇠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불가능성이 강한 만큼 이야기가 긴장감을 띠고 재미있어진다는 말씀이군요?"-210~1쪽

"네. 그렇긴 하지만, 추리소설이 갖는 특유의 애달픈 흥취가 있는데 그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겠지요. 아니, 이건 주관적으로 떠드는 소리니 너무 고민하지 마세요. 살인사건을 다루는 추리소설의 불가능성이란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 자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게 아닐까 싶어요.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는 상대에게, 대답해주지 않을 줄 확신하면서도 거듭 묻는다는 건 안타까운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211쪽

"그래서 추리소설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건가요? 말씀을 듣기 전까지 추리소설이 그런 건 줄 몰랐어요. 탐정은 무녀가 되어 신의 목소리로 말하고, 상징적으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로군요." -212쪽

"사념의 잔재라. 향수의 잔향처럼 인간의 상념이 실제처럼 남는 일은 없겠지. 사념이나 감정이란 뇌내의 전기신호니까. 내가 범인의 속삭임을 듣는다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비유적 표현이야. 꿈이 없는 표현으로 바꾸자면, 범인은 종종 현장에서 실수를 해서 자기 소행이라고 자백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나 흔적을 남긴다는 뜻이야."
"……지금 본 곶에도 그런 게 있었나요?"
"물론 있었지. 모두들 거기에서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 점이 범인의 속삭임이야. 범죄의 목소리라고 바꿔 말해도 좋아. 그 녀석은 떠들고 싶어 좀이 쑤시지." -230~1쪽

"그래서 유우코 씨한테 '선생님처럼 인기 많은 분이 남자 복이 없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하고 불평했더니, '난 누가 치켜세워주면 싫지는 않지만, 여자에게 아양을 떠는 남자한테는 경의를 표할 수 없어. 경의를 표할 수 없는 남자는 절대 사랑할 수 없잖아?'라고 했어요. '그건 그렇죠.' 하고 크게 공감하긴 했지만." -302쪽

"어째서 다들 석양이 아름답다고 하는 걸까요? 어두운 밤이 다가오는 전조인데."
아케미는 빛이 강해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석양은 몰락의 상징이기도 하고, 분명 어둠의 전조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히무라가 말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무는 거니까." -3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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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2-0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홈즈의 주홍색 연구인 줄알았네요.;;; 이매지님이 그걸 안 읽으셨을리는 없는데.ㅎㅎ

이매지 2012-02-04 23:17   좋아요 0 | URL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홈스에게 바치는 오마주라고 할까요. ㅎㅎㅎ
주홍색 연구 하면 사실 홈스가 맨 먼저 떠오르니까요^^

재는재로 2012-02-09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홈즈에 대한 오마주라기 보다 도전 같은데 솔직히 실망한 겹치는것은 과거의 범죄때문에 그리고 여자
마지막 반전이라는것도 동기또한 확실하지 않는 히무라의 추리뿐 증거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