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서랍장 모서리에 새끼발가락을 꽝 찧었을 때를 떠올려보세요. 몸이 움츠러들고, 목소리도 안 나오고, 노래방에서 잘 부르는 노래가사조차 떠올릴 수 없을 겁니다. 칼로 가슴을 찔리거나 머리를 세게 얻어맞으면 그보다 몇 배는 아프다고요. 그런 상황에서 글자를 쓸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암호 같은 교묘한 방법으로요. 만약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다면 먼저 살려달라고 소리칠 겁니다. 아니면 엉금엉금 기어서 방을 나오든가요. 그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13쪽
현실이란 그런 법입니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말했듯이 탐정이란 직업은 범죄사건의 수수께끼 풀이와는 무관합니다. 현실에서는 바람피우는 유부남 뒷조사나 야반도주한 책임자를 추적하는 일이나 하죠. 뭐, 제 경우에는 조금 특수한 케이스라서 경찰을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래봤자 알아낸 비밀을 슬쩍 찔러주는 수준이죠. 보통 이야기하는 '명탐정'이란 어디까지나 공상 속의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린이나 용과 마찬가지로 공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생물이란 말씀이지요. -14쪽
나는 명탐정이야. 그러나 정의의 사자는 아니야. 개런티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어. 울트라맨이 아니란 말일세. 경찰관도 그렇잖아? 그 사람들은 정의감 때문에 범죄조사에 임하나? 아니지? 매월 21일에 월급이 나오니까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서 잠복수사를 하거나 하루 200건의 탐문수사를 할 수 있는 거야. 그게 직업이란 거라고. -50쪽
명탐정은 청렴해야 한다. 세속의 명예와 이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진실의 추구를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명탐정이다. 탐정은 직업이지만 명탐정은 다르다. 삶의 방식인 것이다. -107쪽
제가 탐정소설을 좋아한 이유는 아마추어 탐정의 화려한 활약에 가슴이 두근거렸기 때문이고, 정교하고 치밀한 밀실 트릭에 숨을 삼켰기 때문이고, 전대미문의 살해동기에 전율했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런 것들 이상으로 '관館'이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218~9쪽
다 큰 어른의 놀이는 시조를 읊는 것입니까? 바둑입니까? 골프입니까? 낚시입니까? 어른이 된 뒤에 저택의 방 하나를 철도 모형 디오라마로 메우는 부자도 있는데, 그것도 애들 같은 행위라고 비난하시겠습니까? 연어낚시와 가재낚시를 하며 사냥감을 기다릴 때의 마음에 차이가 있습니까? 당신은 놀이다, 놀이다, 하고 폄하하지만, 애초에 이 세상은 놀이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원가 이십 엔의 종잇조각에 만 엔에 가치를 부여하는 화폐제도, 이것이 놀이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266쪽
원래 탐정이란 인종은 변죽만 울려대는 경우가 많아서, 관계자 일동을 모아놓고 수수께끼 풀이를 시작해놓고도 자질구레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늘 진짜 마지막이 되어서야 경악스런 트릭을 밝힙니다. 쇼트케이크의 딸기를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어린애와 다를 것이 없죠. -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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