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맥주니 스파게티니 온갖 먹을 것들의 유혹에 빠져드는데, 모리미 토미히코의 <밤을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읽으며 머리 속에 온통 '술, 술, 술'이라는 단어가 떠돌았다. 애주가는 아니고 가끔 맥주가 땡길 때 한 캔 정도 마시는 편인데, 이 책을 읽고 있던 12시 무렵에 나는 정말 심각하게 맥주를 사러 밖에 나가야 하는 건가 고민을 했다. (결국 고민만 하다가 다음 날 마트에 갔을 때는 영 끌리지 않아 내려놨다. 결국 이 책은 술을 마시며 읽어야 했던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주된 줄거리라면 한 남자가 짝사랑하는 자신의 후배인 검은 머리 여학생을 쫓아다니는 것 뿐.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선배는 우연을 빙자한 만남을 통해 후배와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해자를 조금씩 메워간다. 과감하게 후배에게 고백하기를 택하기보다는 '최눈알(최대한 그녀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기)' 작전을 통해 후배가 자신을 친근하게 생각하게 하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선배의 최눈알 작전은 생각보다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결혼식 날 피로연 2차 때 몰래 빠져나가는 후배를 따라갔다가 바지를 뺏기는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헌책시장에 갔다가 책을 얻기 위해 불냄비 요리를 먹기도 하며, 대학 축제 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그녀를 만나기까지 하는 등의 고난이 뒤따른다. 선배는 후배의 뒤를 쫓으며 "어쩌다 지나가던 길이었어"라는 그 한마디를 건내기 위해 죽을 고생을 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후배는 그저 "아, 선배, 또 만났네요!"라고 할 뿐. 하지만 선배의 해자 메우기가 유효했는지 둘은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하는데...

   사실 기본 스토리만 봐서는 이 책은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하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캐릭터와 유머러스한 서술,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설정이 이 책을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엽게 만든다. 운명의 그녀를 만날 그 날까지 팬티를 벗지 않는 '빤스총반장'을 비롯하여, 자칭 텐구 히구치, 술을 좋아해 어느 모임에도 끼어들어 공짜 술을 즐기는 하누키, 고리대금업자이면서 가짜 전기부랑 등으로 향락을 즐기는 이백씨, 궤변춤을 함께 추는 궤변본부 동아리의 사람들 등등. 이 책은 현실이라 하기엔 말도 안 되게 보이지만, 책을 읽다보면 뭐 이런 캐릭터들이 없으라는 법은 없지라는 생각까지 들게한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캐릭터들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어떤 인연"이라는 후배의 말처럼, 모리미 토미히코와 만난 것도 하나의 인연 같이 느껴진다. 온통 복잡함으로 꽉 찬 머리에 잠시나마 새로운 공기를 불어넣기 위해 읽은 책이었는데,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던 것 같다. 조만간 이 책 속에 나온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다다미 넉장 반 세계일주>도 읽어야겠다. 한 번도 교토에 가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교토에 가고 싶게, 그리고 교토에 온 것 같이 만드는 책. 역시 교토 작가라 불릴 만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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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1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모리미 토미히코의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어요. 신간으로, 중고샵에서 하나 둘씩 모았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한 권도 제대로 안 읽었더라구요 ㅠㅠㅠㅠ

이매지 2010-03-14 11:42   좋아요 0 | URL
저는 이게 두번짼데, <유정천 가족>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 작품이 더 좋네요 :) 아, 정말 새벽에 어찌나 술이 땡겼는지!

stella.K 2010-03-1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림이 이쁘장 하다는 것 외엔 책이 그다지 끌리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것에 속지 말고 읽어보면 의외의 재미를 볼 수 있는 책인가 봅니다.^^

이매지 2010-03-14 11:58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표지가 너무 말랑해보여서 그랬는데요, 읽다보니 표지와 내용의 싱크로율이 거의 100%더라구요 ㅎㅎㅎ

2010-03-1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4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14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tty 2010-03-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브리핑에서 음주유발도서라는 제목을 보고 궁금해하면서 클릭했는데
책 보고 바로 동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음주유발도서 맞아요 ㅋㅋㅋ

이매지 2010-03-14 18:13   좋아요 0 | URL
책 보고 바로 동감하셨으면 추천이라도 한 방 ㅎㅎ
왜케 다들 추천에 박하신지 ㅎㅎ

다락방 2010-03-1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읽어봐야겠군요. 굳이 음주 유발을 하지 않아도 음주를 즐기기는 하지만. 물론 일년뒤에 주문할겁니다. 저 일년간 책 주문 보류에요. ㅎㅎ

이매지 2010-03-14 18:56   좋아요 0 | URL
일년간 책 주문 보류 ㅋㅋㅋ일년 뒤에 꼭 읽으세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