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 없이 꼼꼼한 트릭.

고층의 사각지대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47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김수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문득 '일본 추리소설이 읽고 싶다!'라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책장을 뒤져서 아직 읽지 않고 쌓아둔 『고층의 사각지대』를 발견했다. 이전에 『인간의 증명』을 꽤 재미있게 봤던 터라 모리무라 세이치의 작품을 다시 만나봐야겠다고 쟁겨놓았던 것 같은데, 따끈따끈한 현대 일본 추리소설들을 읽느라 방치해놨던 것. 요새 새삼 인기를 끌고 있는 마츠모토 세이초, 요코미조 세이시에 비해서는 많은 작품이 소개된 편은 아니지만, 이번 작품 『고층의 사각지대』를 통해 다시 한 번 모리무라 세이치의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도쿄의 한 호텔의 거물인 구주 마사노스케가 밀실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외국계 호텔과의 제휴를 앞두고 있던 터라 대내외적으로 긴장감이 흐르긴 했지만, 마땅히 살해당할 이유도 없는 상황. 동기도, 수법도 모두 모호한 상황 속에서 제1용의자였던 후유코가 담당 형사인 히라가와 함께 밤을 보내고 있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알리바이가 드러난다. 딱히 용의자도, 증거도 없어 수사가 지지부진하게 계속되던 중 용의자 후유코가 후쿠오카에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이 현장 역시 처음 사건처럼 딱히 증거는 남아 있지 않은 상황.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음모와 약간의 정액, 그리고 갈기갈기 찢긴 채 변기에 버려진, 미처 내려가지 못하고 남은 종이 몇 조각. 후유코가 첫 번째 사건의 공범에게 처리됐다고 생각한 경찰은 종이조각을 통해 후유코에게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가 있었음을 알게 되고, 조사 끝에 다른 호텔의 직원이 수사망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이중삼중의 철옹성 같은 알리바이가 있는 상황. 후유코를 죽인 범인을 잡겠다는 히라가와 그의 동료들은 진범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집념의 수사를 시작한다.

  과학수사가 발달한 오늘날 만약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사건은 너무나 쉽게 해결됐을 것이다. 형사들이 애써 범인이 잔꾀를 써 정교하게 만든 트릭을 머리를 싸매고 풀지 않아도 용의자의 DNA만 있었으면 두 번째 현장에서 나온 정액과 대조해 쉽게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수사는커녕 일반인에게는 해외여행이나 여권 같은 개념도 익숙지 않은 시대에 일어난 사건인지라 독자로서는 오히려 치밀하게 짜여진 사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과학수사가 발달하면서 추리소설을 퇴보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였다.

  사실 범인이 만들어낸 알리바이는 꽤나 복잡하다. 시간표 트릭은 다른 작품에서도 만난 적이 있지만, 이 책처럼 복잡한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예를 들어 『점과 선』의 경우에는 시간표 트릭이 사용되기는 했지만 이해를 못할 정도로 꼬여 있지는 않았는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좀더 치밀함이 더해져서 그런지 이해를 시도했다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마음을 접고 보니 오히려 트릭이 명료하게 느껴졌다. 

  1960년대에 나온 소설이지만 약간의 시대차를 고려하더라도 충분히 현대의 독자에게도 매력이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오랜 세월을 호텔맨으로 일했던 저자의 경험이 녹아 있어서 그런지 생동감이 돌았다. (출간 당시에는 다른 호텔맨들에게 항의도 많이 받았다고) 초반에는 과연 진범이 누구냐를 추적하는 과정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면, 중반 이후에는 공고하게 짜여진 알리바이를 조금씩 무너뜨려가는 과정이 일품이었던 책. 시간표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긴했지만,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로 찍어내다시피 소설을 쓰는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보다는 훨씬 내용이 깊은 작가가 아닐까 싶다. 조만간 아직 읽지 못한 『야성의 증명』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