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세계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무너진 댐에서 물이 쏟아지듯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는 온다 리쿠의 작품에 기가 눌려 꽤 오랫동안 온다 리쿠를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올봄에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만난 온다 리쿠의 입에서 이 작품을 두고 "내 작품의 집합체"라 평하는 것을 듣고 다른 건 몰라도 이 책만큼은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책에 밀리고 밀려 이제사 읽게 됐지만, 온다 리쿠답게 (역자의 말을 빌리자면) '문어 빨판급 흡입력'이라 하루만에 뚝딱 읽었다.

  세 개의 탑과 수로가 있는 한 마을에서 도쿄에서 실종된 이치가와 고로가 죽은 채 발견된다. 도쿄에서 회식자리에서 스스로 흔적을 감춘 지 몇 달만에 죽은 채 발견된 이치가와 고로. 그는 왜 이 마을에 왔을까, 이 마을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그는 누구에게 살해당한 것일까 등이 이치가와 고로와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진행된다. 

  흔히 온다 리쿠을 두고 '노스텔지어의 마법사'라고 부른다. 물론 그 표현도 잘 어울리지만, 온다 리쿠의 소설은 아련한 향수보다는 호기심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미스터리한 구석도 있고, 어딘지 신비스러운 느낌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 온다리쿠표 호기심이 극대화된 게 이 작품이다. 19장이 각각 하나의 사건을 이루고 있고 각각의 사건이 결국 이치가와 고로라는 남자와 엮인다는 구성도 그랬지만, 마을에 있는 세 개의 탑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호기심을 잔뜩 자극했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표적인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 어느 누구도 탑이 왜 세워진 것인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다. 게다가 이치가와 고로가 죽기 직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했던 기이한 행동 중에는 탑과 관련된 것들도 많아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이치가와 고로의 죽음보다는 세 개의 탑에 더 관심이 쏠린다. 세 개의 탑과 이치가와 고로에 대한 조각을 하나씩 맞춰가면서 마침내 커다란 그림이 나타나는 구성은 소재와 제법 잘 어울렸다.  

  <빛의 제국> 같은 작품이 판타지에, <유지니아>는 미스터리 쪽에, <밤의 피크닉>은 청춘 소설에 가깝다면 이 책은 분명 그 중간의 어디쯤에 있을 듯하다.(온다 리쿠 자체가 장르 혼합적인 글을 써서 별 의미는 없지만) '아, 온다 리쿠가 이런 소설도 썼네'라는 신선함보다는 지극히 온다 리쿠다운 소설이었다.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끌어갔지만 결말이 어쩐지 바람 빠져버린 느낌이었다는 점이 아쉬웠고, 내용을 알고 표지를 보니 흠칫했지만, 온다 리쿠가 자신의 장기를 마음껏 펼쳐보인 작품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고나니 슬며시 한동안 멀리했던 온다 리쿠를 다시 한 번 만나볼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온다 리쿠의 최고작이라고 하기엔 아쉬움이 들지만, 그 어떤 작품보다 온다 리쿠답다는 생각은 많이 들었다. 만약 온다 리쿠의 소설을 딱 한 권만 골라달라면 이 책을 고르지 않을까 싶다. (어디까지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이라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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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9-28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권만 골라달라면 밤의 피크닉이에요. (물론 어제의 세계는 안읽었지만요.)

이매지 2009-09-28 09:35   좋아요 0 | URL
저도 최고를 고르라면 밤의 피크닉이나 삼월을 고를 것 같아요.
어제의 세계는 어디까지 온다리쿠다움을 보여주는 책이라 ㅎㅎ

가넷 2009-09-28 11:51   좋아요 0 | URL
저도 한권이라면 밤의 피크닉입니다.


이매지 2009-09-28 19:27   좋아요 0 | URL
어험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