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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외인종 잔혹사 -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주원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혀 기대치도 않았다가 잡은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심윤경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후 급호감을 느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몇 번 다른 작품도 접해봤지만 그 때마다 뭔가 2% 부족한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올해도 또 다시 한편으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혹 보석과 같은 멋진 작품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품고 올해 당선작인 <열외인종 잔혹사>를 읽어가기 시작했다.
어찌보면 막장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었으니, 작가는 이들을 '열외인종'이라 부른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고 살아가는 4명의 인물이 이 책에 등장한다. 퇴역군인으로 허구헌날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시국연설을 하는 칠십대의 장영달, 한 때는 용역회사에서 일했지만 아내가 바람나서 헤어지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회사까지 부도나는 바람에 졸지에 일을 그만두고 노숙자의 길을 걷게 된 김중혁, 몇 달째 무급으로 외국계 제약회사 인턴신분으로 살아가는, 지갑에 돈이 없어도 짝퉁 명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르고 다니는 윤마리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피씨방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기무까지. 그저 '조금 특별하다'기에는 부족한 이 열외인종들은 정상적인 삶과 어느 정도 떨어져 지낸다는 점 외에는 사는 곳도, 주요 활동무대도 다르다. 그런 이들이 온갖 우연(혹은 필연)에 의해 11월 24일에 코엑스몰로 모인다. 그리고 4시가 되자, 갑자기 코엑스몰의 가득 채웠던 모든 불빛이 사라지고, 양머리를 하고 연미복을 입은 괴상한 사람들이 등장해 총질을 하며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과연 4명의 주인공들은 이 난국을 무사히 헤쳐갈 수 있을까?
'가끔 소설과 만화책을 탐독하거나 또 가끔은 희랍어나 히브리어로 된 성서를 읽으며 종교적 경외감에 사로잡힌다'는 저자의 이중적인(?) 프로필처럼 이 책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엑스몰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도 4명의 인물은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도 다양한 해석의 바탕이 되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신자본주의라는 경쟁체제하에서 도태되어버린 인간들이 코엑스몰에서 겪는 '십헤드 카니발'을 통해 궁지에 몰리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자본주의와 나 아니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하는 보수주의자, 대안도 없이 비판만 하는 진보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나름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어서인지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굉장히 복잡하게 느껴지고, 뭔가 심오한 메시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메시지에 관계없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코엑스몰이라는 상업성이 극대화된 공간에서 네 명의 주인공은 저마다 자신이 약점(?)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장영달의 경우는 단지 '예순이 넘었다'는 이유로 "어르신들은 끊임없는 변화를 촉구하는 우리의 메시지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아주 파렴치한 인생으로 일관해오셨"다고 "장렬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셔서 이 참에 역사의 죄인노릇도 청산하고 이제껏 버텨온 추한 인생도 마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고 그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20대의 펄펄한 젊은이들과 이종 격투기 게임을 해서 이기는 것 뿐.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20대 청년들을 이겨도 주위의 다른 인질들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한다.) 한편, 윤마리아의 경우에는 70키로그램이 넘는다는 이유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 그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맥도날드에 냉장보관되어 있던 하루치 재료를 20분이라는 시간 동안 먹어 모두 없애는 것. 살기 위해서 젊은 사람과 싸워야 하는 장영달도, 살기 위해서 더이상 음식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음식물을 입에 쑤셔넣어야 하는 윤마리아도, 그리고 총을 들고 양머리를 쏴죽이는 것이 자신을 위한 이벤트라고 생각하는 기무도, 한때 코엑스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전기를 복구하려고 자신만의 작전을 펼치는 김중혁도,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저 무기력하게 살아갔던 이들은 십헤드 카니발을 통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신의 인생을 모처럼만에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게 비록 일시적이라 할 지라도)
저자가 이 책의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머리를 한 사람들이 등장해 무자비하게 총질을 해대는 '십헤드 카니발'이라는 극단적인 형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누군가를 이겨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은(그것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현실이나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현실을 뒤틀어 블랙유머를 구사하는 저자는 유쾌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이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등장인물들을 희화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모습이 느껴졌다. 그동안 억울한 일이 있어도, 사회가 자신을 부당하게 대해도 그저 참고 억눌려 지냈던 이들이 십헤드 카니발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억압했던 사람들, 자신을 억압했던 세계와 맞서 싸우는 것이 (비록 그 방법이 잔혹했지만) 이해가 갔다. 하지만 우습게도 결국 그들의 소동(혹은 반란)은 그저 그들만의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것이 허무했다.
앞으로는 소설쓰기에 전념하겠다는 저자의 포부처럼 좀더 주원규라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데뷔작이라 그런지 몇몇 아쉬운 부분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이번에도 뭔가 2%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한겨레문학상이라는 네임벨류는 아직까지는 믿을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내년 수상작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