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라캉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정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품절


도둑으로 의심받은 노동자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상기해보자. 매일 저녁 퇴근할 때 그가 끌고 가던 운반 수레를 꼼꼼하게 조사했지만 감독관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 안은 항상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감독관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그 노동자가 훔친 것은 바로 수레였던 것이다. 이 반성적 역전은 커뮤니케이션 자체에 내재해 있다. 우리는 소통 행위의 내용 속에 소통 행위 자체를 포함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소통 행위의 의미는 그것이 하나의 소통 행위라는 사실을 반성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의식의 작동 방식에 대해 잊지 말야아 할 첫 번째 사항이다. 그것은 수레 안에 숨어 있지 않다. 그것은 수레 자체다. -36~7쪽

라캉이 "상징적 거세"라고 부른 것(여기서는 무시할 수 있는 복합적인 근거로)이 바로 즉각적인 심리적 정체성과 상징적 정체성(대타자 안에서 혹은 대타자에 대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내가 쓰고 있는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 사이의 간극이다. 그리고 남근은 이 상징적 거세의 기표다. 라캉에게는 왜 남근이 단순한 생식기관이 아니라 기표일까? 전통적인 임관식에서 권력의 상징물은 그것을 획득한 주체를 권력 실행자의 위치에 놓는다. 만약 왕이 손에 홀을 쥐고 왕관을 쓰고 있다면 그의 말은 왕의 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런 상징물은 내 본성의 일부가 아니라 외재적인 것이다. 나는 외부의 그것을 착용하는 것이다. 나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것을 입는다. 즉자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내가 행사하는 기능 사이의 간극을 도입함으로써(즉 나는 결코 완벽하게 내가 행사하는 기능의 차원일 수 없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나를 "거세한다." 이것이 그 악명 높은 '상징적 거세'의 의미다. 거세는 내가 상징적 질서에 포획되어 있다는 사실과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을 받아들이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거세는 직접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나에게 어떤 지위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 타이틀 사이의 간극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거세는 권력의 반대가 아니라 권력과 동의어다. 그것은 나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남근은, 내 존재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징물, 즉 왕이나 판사가 자신의 표장을 착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쓰는 가면이나 상징 같은 것이다. 남근은 내가 달게 된 일종의 신체 없는 기관으로, 그것은 결코 신체 일부가 되지 않은 채 내 몸에 달라붙어 비일관성과 과도한 보충성으로 삐쳐 나오는 것이다.
이 간극 때문에 주체는 결코 완전하게 자신의 상징적 가면이나 타이틀과 직접 동일화될 수 없다. -55~6쪽

우리는 타자의 욕망과 대면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안(anxiety)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라캉에 따르면, 환상이 타자의 수수께끼 같은 욕망에 대한 대답을 제공한다. 환상에 대해 기억해야 할 점은 환상은 우리에게 어떻게 욕망할 것인지를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환상이란 내가 딸기 케이크를 원하지만 현실에서 구할 수 없을 때 딸기 케이크를 먹는 환상을 꿈꾸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어떻게 나는 다른 무엇보다 딸기 케이크를 원하는지 아는 것이다. 환상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이 것이다. -76쪽

하지만 이와 동시에 덧붙여야 할 것은 환상에서 상연되는 욕망은 주체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 내 주위에서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의 욕망이라는 점이다. 환상, 혹은 환상적 장면 내지 시나리오는 "너는 그것을 말하고 있지.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하면서 실제로 원하는 것은 뭐지?"에 대한 대답이다. 욕망의 근원적 질문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그들이 내 안에서 보는 것은 무엇이지?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지?"다. 어린아이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 끼워져 있다.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아이를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는 아버지, 어머니, 형이나 누나, 삼촌, 숙모 등. 가령, 어머니는아들을 보살핌으로써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의 전쟁터 내지 촉매 같은 역할을 한다. 아이는 자신의 이런 역할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가 타인들에게 정확히 어떤 대상인지, 그들이 자신을 가지고 벌이는 게임의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 헤아릴 수 없다.
환상은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환상은 내가 타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다. 환상의 상호 주관적 성격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어린 딸이 딸기 케이크를 먹는 환상에 대해 말한 것처럼 지극히 간단한 상황에서도 파악될 수 있다. 이 상황은 결코 욕망의 환각적 작용(어린 딸은 케이크를 원한다. 하지만 케이크는 없다. 그래서 아이는 케이크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의 상황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딸기 케이크를 게걸스럽게 먹는 동안 그 어린 소녀는 자기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걸 엄마 아빠가 만족스럽게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점이다. 딸기 케이크를 먹는 환상은 실제로는 이와 같은(부모가 준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아이와의) 동일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부모를 만족시켜서 자신을 그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만들어준다. -77~8쪽

'이상적 자아'는 주체의 이상화된 자기 이미지(내가 되고 싶은 모습, 타인이 그렇게 봐주기를 원하는 모습)다. 자아 이상은 내가 내 자아 이미지 속에 새겨 넣고자 하는 응시의 작인으로, 나를 감시하고 나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촉구하는 대타자이자 내가 따르고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이다. 초자아는 그와 같은 작인의 가혹하고 잔인하며 징벌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 세항을 기초 짓는 구조화 원리는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다. 이상적 자아는 상상계로, 라캉이 "소문자 타자"라고 부른 내 자아의 이상화된 분신 이미지이다. 자아 이상은 상징계로, 내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 그러부터 나 자신을 관찰(판단)하는 대타자 내부의 지점이다. 초자아는 실재계로, 내게 불가능한 요구들을 퍼붓고 그것을 해내지 못하는 내 실패를 조롱하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작인이자, 내 '죄스러운' 분투를 억누르고 그 요구들에 응하려 하면 할수록 그 시선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유죄가 되는 그런 작인이다. 스탈린 시대 공개 재판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에 대한 냉소적인 모토 '그들이 결백하면 할수록 그들은 총살당할 만하다'는 가장 순수한 모습의 초자아다. -124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06-1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책 좋아요? 아직 실물을 못봤는데

이매지 2007-06-1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내용은 200페이지 남짓이구요, 종이도 페이퍼백 타입이라 가벼워요. 전에 서점에서 봤는데 이 시리즈가 두께는 다 비슷비슷하더라구요. 아직 라캉밖에 읽지 않아서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내용도 괜찮은 듯 싶네요^^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서 좋네요^^

가넷 2007-06-11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던데요. 안내하고있는 내용의 어려움 여부를 떠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