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구나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맹렬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얼마나 처절하게 울던지 멀리서도 길을 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발을 멈추고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개월수까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대략 두 돌 가량 되지 않았을까 싶은 아기. 옷을 보고 여자아이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빠는 아이를 달래려 애쓰지 않고 그냥 걷고 있었는데, 아이는 목청을 높여 점점 더 심하게 울었다. 그 몇 발짝 뒤로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고개를 뒤로 돌린 채, 손을 뒤로 뻗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몇 발짝 뒤에 대여섯살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킥보드를 밀고 엄마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 그 네 가족의 모습이 마치 사진처럼 내 머리 속에 저장되었다. 그 가족을 스쳐지나가면서 보니 아빠도, 엄마도, 오빠도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굳은 표정으로 이동했다. 오직 아빠 팔에 안긴 아기만이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아직 말을 할 수 없는 아기의 울음은 생존을 위한 것이다. 혼자 아기를 돌보던 밤, 이유도 모르고 계속 울기만 하는 아기를 달래려 애썼던 밤, 아기가 말만 할 줄 알아도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곤 했다. 분명 기저귀도 갈았고, 분유도 먹였고, 트림도 시켰는데, 안아서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기를 보며 아빠로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말이 통하는 아기가 우는 이유는 조금 다를 것이다. 그건 생존의 문제라기 보다는 고집의 문제라 여겨진다. 내 경우에는 이럴 때는 인내심의 한계까지는 어떻게든 달래고 참지만, 한계에 닿으면 단호하게 대했던 것 같다. 아까 길에서 마주친 가족이 했듯이 더는 달래려 애쓰지 않고, 들어주지 않고, 울던 말던 그냥 무시하는 것. 그럼 아이는 지칠 때까지 울다가 스스로 지쳐 울기를 포기한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무척 마음 아픈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론 아이마다 상황마다 대처는 다를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그랬다. 최후의 방법이었다. 다른 오만가지 방법을 다 써봐도 안 되는 경우,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경험을 쌓는다. 다음에 같은 일이 반복되면 처음보다는 훨씬 더 일찍 울음을 그친다. 아무리 목이 터져라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한 번 겪었기 때문이다.


길에서 우는 아기를 보고 이제 사춘기를 벗어나는 아이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이가 고만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큰 아이는 뭐든 처음 경험이라 다 서투르고 힘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둘째를 키우면서 훨씬 수월했던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작은 아이는 고집이 너무 쎘다. 한번 울면 울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애들 엄마가 장기 해외 출장을 가고 없었던 기간 동안 매일 밤마다 작은 아이는 잠투정을 심하게 했다. 그게 잠투정이었다는 건 한참 후에야 짐작했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아무 이유도 모르고 애가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서 걱정도 많이 했다. 다음날 아침 반차를 쓰고 병원에 데려갔다가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그날 밤에 또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동네가 떠나가라 우는 모습을 보고는 다시 어디가 아프지 않으면 이렇게 울까 생각하기도 했다. 목이 터져라 우는 아이 때문에 내가 넋이 나가 있을 때, 큰 아이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혼자 놀던 장난감을 치우고, 양치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내 곁으로 와 내 다리를 안았다. 큰 아이가 무척 대견했지만, 한 편으로 미안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울음을 그칠 생각이 없는 작은 아이도 미우면서도 미안했다. 


당시로서는 끔찍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빨리 아이들을 재우고 천기저귀를 빨고 삶아야 하고, 분유병도 씻어서 삶아야 하고, 어린이집에 가져갈 물품들도 챙겨야 하고 할 일도 많았는데, 아이를 재우는데 그렇게 한 두 시간을 써버리면 다른 일을 할 체력도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도 안 할 수는 없으니 억지로 몸을 움직이고 새벽 늦게 기절하듯이 뻗었다가 다시 피로가 덜 풀린 상태로 아이 둘을 깨워서 준비를 시켜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들이 크고 난 후엔 문득 그리운 시간처럼 느껴진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겠지. 만약 다시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면 여전히 끔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지나갔다. 한때 같은 단체에 있었던 후배 활동가 한 명이 sns에 전쟁 같은 한 주를 지냈다고 적었더라. 특히 어버이날은 하루 밖에 없는데, 부모님 댁은 두 곳이라 어쩔수 없이 이번에도 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적은 부분을 읽으면서 여전히 여성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체감했다. 그 친구는 당당하고 똑똑한 활동가였다. 그런 친구도 결국 여성이라는 한계를 깨닫고 올해에도 지는 쪽을 선택했다고 적었다. 여기서 약간 이혼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의 여유를 느꼈다. 나 역시도 아직 부부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면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몰론 내 경우에는 부모님이 아주 멀리 계시니 명절이나 연휴가 아니면 방문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니 양가 부모님이 모두 서울에 있는 그 친구의 경우와는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이혼한 후로 해마다 5월이 되면 확실히 마음이 가벼움을 느낀다. 더는 처가댁에는 방문하지 않아도 되고, 우리 집은 너무 멀리 있어서 방문을 못한다고 핑계를 댈 수 있으니, 몸이 편했고, 몸이 편하니 마음도 편했다. 대신 아이들이 없는 우리 집은 너무 쓸쓸했다.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혼자라서 편한 것이 있다면 혼자라서 힘든 일도 있는 법이다.


아, 대통령이 바뀌는 날이구나. 5월도 금방 휙 하고 지나가 버리겠지. 내일이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두 활동가의 단식이 30일차가 된다. 오늘은 저녁 문화제 이후 철야 농성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더 늦기 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오늘은 늦게까지 할 일이 많았다는 걸 뒤늦게 생각해낸다. 에휴!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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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다가 문득


시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시를 쓸 줄 모르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시를 음미할 줄 모르지만, 꾸준히 읽기는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아는 시인들이 제법 있어서 그 분들이 새 시집을 내면 예의상 읽어줘야 할 것 같아서는 아니다. 새 시집 소식을 접하면 궁금해서 사서 읽는 편이다. 소식을 접하지 못하면 몰라서 못 읽겠지. 나중에 우연히 시집을 발견하고 어! 이런 시집도 냈어? 왜 몰랐을까? 라고 생각하겠지.


요즘은 시 공부를 하는 아이 덕분에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시집을 구매한다. 아이는 종종 학교 과제를 이유로 서너권씩 시집을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사줄수 밖에 없겠지. 시집 제목을 부르라고 하고 주문한다. 그리고 시집들이 도착하면 아이보다 먼저 주르륵 훑어보고, 각 시집마다 한 두 개 가량 마음에 드는 시를 여러 차례 읽어 본 후에 아이에게 준다. 

















이번에 아이가 사달라고 한 시집들 중 한 권이다. 첫 번째 시와 두 번째 시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내가 출판사에 있을 때, 우리 출판사에서 낸 시집은 전부 표제작을 시집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게 옛날 방식이고 이젠 그러지 않는 방식이 점점 늘어나는 것인지 몰라도 이 시집의 경우 저 제목 [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이라는 시는 이 시집에 없었다. 즉 표제작을 제목으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제목은 이 시집에 실린 두 번째 시의 첫 부분이었다. 암튼 앞의 두 시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주르륵 넘기며 몇 개의 시를 빠르게 훑어보고 아이에게 넘겼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야금야금 더 읽어야지.


시집 제목과 표제작 이야기를 꺼낸 김에 언젠가 이 서재에 쓴 적이 있는 이야기를 다시 재활용해보자. 박영희 시인의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의 경우 표제작을 어떤 시로 정하느냐에 대해 시인과 출판사의 의견이 갈린 경우인데, 나중에 박영희 시인은 이를 두고 많이 아쉬웠다고 말씀하셨다. 처음 본인이 표제작으로 생각해둔 시는 오래 전에 이 서재에 소개한 적이 있는 [아내의 브레지어]였다. 제목이 아내의 속옷이라서 출판사에서 반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출판사는 다른 제목(출간된 시집의 제목)의 시를 표제작으로 고집했고, 출판사의 고집을 꺾지 못한 시인이 그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서재에 시를 소개하고, 그 시에 대한 짧은 글을 엮은 글을 열개 남짓 적었었다. 더 부지런했다면 계속 적었을텐데, 바쁘다는 핑계로 결국 조금밖에 못 적었네. 암튼 그 열개 가량의 글 중에서 알라딘 이웃들이 가장 뜨거운 관심과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준 글이 바로 저 [아내의 브레지어]라는 시를 소개한 글이었다. 박영희 시인은 아내의 브레지어를 빨았던 이야기를 시로 적었지만, 나는 아내의 브레지어 뿐 아니라 팬티 그리고 면생리대 까지 빨곤 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적었더니 여성 이웃분들께서 한마디씩 적어주셨던 것이다.


비슷한 소재로 그 다음으로 많은 알라딘 이웃들이 관심을 주신 글은 서정홍 시인의 [작업복 팬티]라는 시를 소개하고 과거 내 작업복 팬티 이야기와 군대에서 훈련 나갔을 때 팬티가 모자라서 겪었던 이야기를 쓴 것이었다. 


암튼 이 글을 쓰면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저 '시와 함께 읽는 추억' 카테고리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여유가 생긴다면 또 다른 시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 봐야지.



밥 맛 떨어지게 만드는 식당


저녁 8시에 온라인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집에서 접속하면 주위가 산만해 집중이 잘 되지 않아서 야근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회의 시간을 기다렸다. 7시가 되어 배가 고파져서 회의 전까지 간단히 뭘 먹고 들어와야지 생각했는데,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별로 없어서 딱히 뭘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무 생각없이 사무실 근처 김밥 집에 들어갔다. 김밥과 라면을 주문했다. 평소 점심 때는 빈 자리가 없고, 가끔 저녁때 지나가면서 보면 김밥을 포장해가는 손님들로 꽉 차곤 했는데, 오늘 따라 웬인일지 식당에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나처럼 김밥과 라면을 드시고 계신 여성 한 분 밖에 손님이 없었다. 김밥을 포장하는 손님은 끊길 듯 이어지는 듯 했으나, 매장의 빈 자리가 많은 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음식이 나와서 먹기 시작할 무렵 주방 쪽 맨 앞자리에 삐딱한 자세로 앉은, 방금까지 자전거 라이딩을 하다 오신 듯한 민망한 옷차림의 남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주방에 계신 제일 연세가 많은 여성 분에게 반말로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고, 짜증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암튼 뭔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뭐라고 하고 있었다. 대화가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는 그 두 사람이 이 가게 사장 부부인 것처럼 보였다. 오늘 따라 저녁 시간인데도 유난히 손님이 없어서 그렇게 짜증을 내고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그 짜증인지, 투정인지, 시비인지 모를 남자의 기분 나쁜 태도가 너무 거슬렸다. 손님을 앞에 두고 대체 뭐하는 짓인거지. 나는 음식을 입에 집어넣다가 기분이 나빠져서 탁 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확 젓가락을 던져서 그 남자 입을 다물게 만들고 싶었으나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서 간신히 참았다. 빨리 먹고 나가야지 싶었다. 


그 남자는 쉴새없이 입을 놀리며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었고, 나는 옆 테이블에서 나와 같은 메뉴를 드시고 계신 여자 분은 어떤지 눈치를 살폈다. 혹시 나처럼 기분 나빠하시는 눈치가 보이면 한 마디 할까 싶었는데, 그 분은 묵묵히 식사를 하고 계실 뿐, 불편해 하는 낌새가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있다가 그 남자가 뭔가 명령조로 언성을 높였다. 주방에 계신 두 명 중에 한 분과는 아까부터 계속 반말로 대화하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은 어쩔줄 몰라하면서 가만히 계셨다. 그 남자는 같은 명령을 반복하면서 조금씩 언성을 높였고, 급기야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때리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던졌다.(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화가 났다. 세상에서 제일 못난 인간이 약자를 괴롭히는 인간이고, 약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삐딱한 자세로 건들건들 몸을 움직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이내 고개를 돌려 내 눈길을 피했다.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는데, 그 말을 들었던 여성 분은 딱히 겁먹거나 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게 장난인지 그냥 입버릇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분위기는 아니건가 싶었다.


그 남자는 이후에도 계속 건들거리며 이런 저런 말들을 내뱉았고, 나는 계속 신경이 쓰여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도 모를 정도로 기분 나쁜 상태로 억지로 그릇을 비웠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계산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는 시선을 주방으로 향한 채로 계속 건들거리고 있었다.


8시에 시작한 온라인 회의는 9시 반이 되기 전에 끝났다. 나는 일을 마무리하고 이 글을 후다닥 두드렸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다. 얼른 퇴근하고 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며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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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5-05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온 시만 알았어요 다른 시나 책은 거의 안 봤네요 감은빛 님 따님은 벌써 글을 쓰고 싶어하고 시나 다른 책을 봐서 좋겠습니다 어릴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부럽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이 말 했던 것 같네요

식당 사람이 손님이 있는 데서 안 좋은 말을 하다니, 그런 건 예의가 아닐 듯하네요 거기에서 밥 먹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곳은 안 좋은 식당이군요 집에 가시고는 기분이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희선

감은빛 2022-05-09 19:26   좋아요 1 | URL
이 글에도 썼지만, 시를 잘 모릅니다. 즐겨 읽는 편도 아니예요.
그런데 계속 손에서 놓지 못하고 꾸준히 읽기는 하네요.
뭔가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는 간사한 의도가 저도 모르게 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젠 그 식당 안 가려구요.
같이 일하는 후배 활동가에게도 얘기했더니,
그 친구도 다음날부터 다른 식당을 간다고 하더라구요.
이렇게 단골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분이 알아야 할텐데요.

바람돌이 2022-05-05 0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공부하는 딸 좋네요. 부러워요. ㅎㅎ
가끔 저렇게 가까운 사람을 함부로 대하면서 그걸 폭력으로 인지조차 못하는 사람을 보면 진짜 화나요. 그러면서 강해보이는 사람한테는 또 비겁해지겠죠.
어째쓴 집에 가셔서는 맛난것도 드시고 책도 영화도 보셨길 바랍니다.

감은빛 2022-05-09 19:29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님. 그날 엄청 과식하고 책 읽다가 잠들었어요.
예전에는 가끔 제가 아는 시인들의 시집을 중심으로 시를 읽었는데,
아이 덕분에 굉장히 폭 넓은 시인들의 시집을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런 것도 재미구나 싶긴 합니다.

서니데이 2022-05-0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까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시집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인 것 같아요.
그러니 학교 과제 등 그 시기에 많이 읽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고, 좋은 시간 되세요.^^

감은빛 2022-05-09 19:29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어린이날 잘 보내셨나요?
오늘은 또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네요.
일기예보 느낌이 드는 서니데이님의 글을 찾으러 가봐야겠네요. ^^
 

사진, 추억, 기억


오늘도 또 새벽에 잠에서 깼다. 늘 악몽을 꾸다가 깨곤 했는데, 이번에는 악몽은 아니었다. 살짝 슬픈 이야기이긴 했는데, 악몽이라 부를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언젠가 소설 소재로 써먹으려고 폰을 들어 메모장을 열었다가 귀찮아서 다시 닫고 누웠다.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가고,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다가오는 어린이날에 생각이 멈췄다. 동네에서 어린이날 행사를 하는데, 이제 6학년인 작은 아이를 데리고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 때문에 잠시라도 들러야 하는데, 혼자 가서 일만 하기에는 좀 억울한 느낌이다. 아니 사실 꼭 가야하는 건 아닌데, 도의적으로 얼굴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아이에게 같이 가자고 꼬셨는데, 안 넘어온다. 어렸을 때는 이런저런 행사들, 회의와 토론회와 집회 따위에 아이들을 정말 많이 데리고 다녔다. 작은 아이의 책상에는 우리나라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사진과 간단한 설명으로 담은 연대표가 붙어 있었는데, 가장 마지막 사건이 박근혜 탄핵 촉구 촛불집회였다. 작은 아이에게 저 사진 속 어딘가에 우리도 있었다고 말하자. 안그래도 학교 수업 시간에 친구에게 자신이 저 자리에 있었다고 말을 했단다. 사실 작은 아이는 이런저런 잡다한 행사에 많이 데려갔지만, 집회나 행진에는 별로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큰 아이를 키울 때는 내가 그런 집회나 행진의 주최를 맡은 담당자인 경우가 많아서 많이 데리고 다녔다. 암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던 온갖 집회 현장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이들도 고생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아이들이 나를 따라 다녔어도 잘 놀고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점점 자라면서 아빠는 자주 자기들을 어딘가에 데려다놓고 본인 일을 하느라 바빴고, 챙겨주지 않았다고 말을 허더라. 아이들이 이미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그 다음부터는 어지간하면 일을 해야 하는 장소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않으려고 했다고 표현한 것은 이후로도 가끔은 데리고 다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구글 포토 사진첩에 들어가 옛날 사진들을 찾아봤다. 사진과 친하지 않아서 찍은 사진이 많지 않은데, 아이들이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은 꽤 많더라. 죄다 아이들 사진만 있었다. 하나씩 살펴보는데, 그 가운데 몇 개의 동영상들이 보였다. 눌러보니 당시 애들 엄마가 찍은 것들이 몇 있었다. 저 때 저런 걸 찍었었구나. 갑자기 새벽에 애들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해졌다. 한때 저런 목소리로, 저런 눈빛으로, 저렇게 잘 지냈던 시절이 있었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기 때문에 더 슬프게 느껴졌다.


사진들을 쭉 넘겨보면서 사진으로 남은 장면과 남지 않았으나 머리 속에 사진처럼 찍혀있는 추억과 그리고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기억들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들 사진을 제외하고 간혹 발견할 수 있는 애들 엄마나 가족들의 사진은 낯설었다. 저 시절에 저런 모습이었구나.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가끔 발견할 수 있는 내 모습은 더욱 낯설었다. 살면서 유일하게 딱 한 번 파마를 했는데, 뽀글뽀글 아줌마 파마가 되어버려서 엄청 속상했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줄 알았는데, 유일하게 찍힌 내 사진이 있더라. 시간이 조금 흘러 파마가 많이 풀렸고, 끝 부분을 좀 잘라서 그래도 제법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였다. 그제서야 약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못난 얼굴이라도 그래도 시기 별로 내 모습을 좀 남겨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었다.


사람에게 상처 받고, 사람에게 위안을 얻고


주말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부분 좋아하는 사람들. 나를 인정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시간을 보내며 많이 떠들고 많이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하면서 겪는 스트레스는 대부분 사람들 때문이다. 그만큼 대인관계라는 것, 사회생활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해소한다. 그들이 공감해주고, 위로해주고, 묵묵히 들어주는 것으로 나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가끔 나란 인간 왜 인생을 이렇게 밖에 못 살았나 절망하는 날이 많지만, 그래도 가끔은 운이 참 좋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직도 내 주변에는 이렇게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는 사람들이 많구나 싶어서다.



어떤 감정


작년 가을에 어떤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사고 후유증으로 통증이 심해져 나는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려주고 실무를 일터 후배 활동가가 다 맡았었다. 그때 그의 여자친구가 많이 도와줬다고 했다. 그 분은 준비만 도운 것이 아니라 행사 당일에도 현장에서 진행을 도왔다. 나로서는 말로만 듣던 분을 그날 현장에서 처음 마주쳤는데, 후배 활동가가 미리 말을 해주지 않아서(아마 정신이 없어서 말할 여유가 없었겠지만) 처음엔 그의 여자친구일 거라고 생각을 못 했는데,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보면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 도와줘서 고맙다고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더니, 두 사람 모두 회를 좋아한다고 회를 사달라고 했다. 그런데 서로 바쁜 삶을 살다 보니 계속 시간이 안 맞았고, 차일피일 미뤄오다 최근에서야 두 사람과 회를 먹으러 갔다. 젊디 젊은 청춘 남녀가 티격태격 하기도 하고, 꽁냥꽁냥 거리기도 하면서 회를 먹는 모습을 앞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나도 언젠가는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생각하다가 문득 떠올랐다. 애들 엄마와 연애할 때, 당시 40대 중반의 농민회 형님이 우리 둘을 불러 밥을 사줬던 날이 있었다. 그때 형님도 거의 드시지 않고 우리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셨던 기억이 났다. 그때 형님은 우리를 보며 어떤 기분이셨을까? 며칠 전에 내가 후배 활동가 커플을 보며 느꼈던 것과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그건 분명 젊음에 대한 부러움과는 달랐다. 회한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까?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어떤 사건과 감정에 대한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방점이 찍히는 부분이 평생 다시는 겪지 못할 거라는 것에 있었다.
















토요일에 철가면을 읽다가 끊고 일요일부터는 이 책을 시작했다. 이 책도 구매하자마자 조금 훑어보고 책장에 꽂혔던 걸 오랜만에 꺼내 들었다. 철가면을 아주 재밌게 잘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sf가 읽고 싶어졌다. 그때 바로 눈에 들어온 책이 이 책이었다. 읽으려고 책상 위에 올려두긴 했는데, 두꺼운 철가면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진득하게 오래 읽을 여유가 별로 없어서 먼저 다 읽고 시작하기에는 너무 오래 걸릴 것이 뻔했다. 뭐 늘 그랬듯이 조금씩 나눠서 읽어야 할 상황이었다. 찔끔 찔끔 번갈아가며 읽어야겠다.


아! 북플에 확인해보니 오늘(5월 3일)은 과거의 오늘 쓴 글이 없더라. 즉, 지금 쓰는 이 글이 2004년 서재를 시작한 이후 18년 만에 처음으로 5월 3일에 쓰는 글이라는 뜻이다. 뭐든 처음은 이유 없이 기분이 좋기 마련이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끄적인 이 글 덕분에 오후부터는 기분 좋게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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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5-03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해 5월 3일엔 이 글을 썼다고 알려주겠네요 잊고 있다가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어떨지, 한해 동안 큰일 없이 지내시기 바랍니다 바란다고 그렇게 될지 모르겠지만...


희선

감은빛 2022-05-04 19:52   좋아요 1 | URL
아마도 잊고 있다가 북플이 알려줘서 발견하겠죠.
그날 따라 바빠서 북플에 접속할 여유가 없다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겠네요.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과연 큰 일이 없을 수 있을까 싶어요.
대통령이 바뀌면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일이 많아질 것 같아요.
이래저래 큰 일이 없을 수 없는 조건인 것 같습니다.
 

동안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앱에서 알림이 떴다. 스무살의 터키 여성이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인들은 왜 다 이렇게 어려보이는 것이냐? 이게 유전자의 영향인가? 아니면 라이프 스타일의 영향인가? 처음 말을 걸면서 인사도 한 마디도 이렇게 다짜고짜로. 좀 황당했다. 이 앱은 생년월일을 필수적으로 입력하게 되어있고, 대화 상대방의 나이와 네이티브 언어와 공부 중인 언어를 공개한다. 나는 40대 중반에(앱에서는 만 나이로 정확한 숫자가 나온다.)한국어 네이티브이고 영어를 조금 할 줄 알고, 터키어와 힌디어와 중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나온다. 그리고 사진도 필수적으로 공개하게 되어 있다. 내가 프로필에 등록한 사진은 아마 3년쯤 전에 여행지에서 찍은 셀카였다. 그 사진을 보고 한국인은 왜 다 어려보이냐고 내게 따지듯이 말을 걸었던 것이다. 물론 따지듯이 라는 느낌은 그냥 내 기분 탓이고, 그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조금 고민하다가 한국인이 다 어려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아시아 인들의 얼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느끼는 편견이라고 먼저 답했다. 이어서 내 나이 또래 중에 나와 비슷한 얼굴이 많으며, 나는 딱히 어려보이는 편은 아니라고도 답했다. 사실 그 사진을 찍었을 무렵이면 오히려 내 나이에 비해 더 나이가 들어보인다는 평을 늘 듣고 다닐 때였다.


그래 나도 한때는 동안으로 불린 적이 있었다. 아니 30대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늘 그런 소리를 듣고 살았다. 심지어 30대 중반에도 술이나 담배를 사러 가면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험을 겪기도 했고, 택시 기사님이 학생이라 여기고 반말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30대 중반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으며 급격하게 늙어버렸다. 그리고 최근 2년 사이 나는 다시 또 한번 급격하게 늙었다. 이젠 더이상 그 누구도 어려보인다는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암튼 그가 마치 따지듯이 묻는 그 말들 때문에 새삼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급격하게 늙기 전의 나에게 꼭 주의하라고 말을 해주고 싶다.


그는 그제서야 인사도 없이 이렇게 질문을 던져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몇 가지 인사말과 서로의 신상을 묻는 대화를 이어갔다. 출근 시간이라 길게 이야기는 못 했고, 대화는 짧게 끊겼다.


출근길에 그 앱으로 대화를 나눴던 여러 외국인 여성들을 찾아봤다. 대부분 길게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건 내 성향이나 외국어 실력 때문인지, 이 앱의 불편함 때문인지 모르겠다. 제일 오래 대화를 나눴던 몇몇 여성들은 한 2년 이상 대화를 이어간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내가 흥미를 잃으면서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가 다시 복귀해서 한참 대화를 하다가 또 둘 중 하나가 흥미를 잃어서 긴 시간 대화가 끊기기를 반복했는데, 그럼에도 다시 말을 걸면 또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들이었다.


그냥 재미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건 나쁘지 않은데, 딱 거기까지가 한계다. 더 깊은 얘기를 나누기엔 내 영어가 짧고, 영어 네이티브가 아닌 경우 상대방도 대체로 영어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더라. 무엇보다 흥미를 떨어뜨린 원인은 시도때도 없이 엄청나게 많은 중국 젊은 여성들이 말을 걸어왔던 것 때문이었다. 그들 대다수는 대화를 나눈지 얼마되지도 않아서 위챗으로 대화하기를 요구했다. 한국에서는 위챗을 사용할 수 없다고 답하면 그렇지 않다고 우기며 계속 위챗만을 고집했다. 간혹 라인이나 왓츠앱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 두 앱도 다 깔아뒀는데, 그 경우에는 제법 오래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암튼 너무도 똑같은 패턴이 너무나도 자주 또 많이 생겨서 질려버렸고, 그래서 그 앱을 지워버렸다. 한동안 잊고 살다가 문득 오래 대화했던 다른 사람들이 생각나서 다시 앱을 깔면 또 중국 여성들의 대시가 시작되었고, 또 앱을 지웠다. 그렇게 지우고 깔기를 반복하고 있다.


아무래도 중국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체크한 항목을 지워버려야겠다. 아, 그 터키 여성이 왜 터키어를 배우고 싶냐고 물었을 때, 뭐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배워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사실 손을 뗀지 오래되었다. 터키어 항목도 그냥 지워버려야겠다. 


주말은 독서와 함께


토요일이다. 아침부터 4시 즈음까지 행사 하나를 진행했다. 참가자들이 만족하는 반응을 보여서 준비하고 진행한 입장에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걸 준비하느라 나름 고생했던 나에게 스스로 칭찬해줬다. 


이제 친한 선후배들과 어울리러 갈건데, 맛난 걸 먹고 나서는 책을 좀 읽어야겠다.
















어렸을 때 학급문고로 읽었던 책은 축약판이었다. 너무 재밌어서 어러번 읽었었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떠올려보니 후반부터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시 읽어보고 싶어서 샀는데, 구매한 직후에 조금 읽다가 흐름이 끊겼다.


며칠전부타 다시 읽어보니 너무너무 재밌었다. 이번 주말 다시 책의 세계로 빠져야겠다.


아, 4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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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2-05-01 14: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앱도 있군요. 저는 나중에 스페인어 다시 공부해보게 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ㅎ

감은빛 2022-05-03 16:13   좋아요 1 | URL
원래는 서로 배울 수 있도록 학습을 도와주는 앱이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그렇게 기능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유료 결제를 해보지 않아서 어떤 기능이 더 있을지 저도 궁금하네요.
암튼 여러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건 장점입니다.
다만 대화를 주로 나누기 위한 메신저 앱으로서는 또 불편함이 있어요.

얄라알라 2022-05-01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가면, 복수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초딩 때 읽었으니 가물거립니다..

감은빛 2022-05-03 16:15   좋아요 0 | URL
알라님도 초딩때 읽으셨군요. 저도 기억이 잘 안나서 다시 읽어요. ^^

꼬마요정 2022-05-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마의 철가면이 아니네요. 우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ㅎㅎ

감은빛 2022-05-03 16:16   좋아요 1 | URL
뒤마의 철가면도 축약판 밖에 읽어보지 않아서 장담할 순 없지만,
소년소녀문학전집 축약판 기준으로는 뒤마의 철가면보다는 훨씬 재밌었습니다.
순전히 제 기준이기는 하네요. ^^
 

또 악몽

요즘은 거의 매일 악몽을 꾸는 것 같다. 장소는 어린시절에 오래 살았고 대학시절에도 잠깐 살았던 작은 아파트였다. 꿈 속의 시기는 아마 제대한 후에 대학에 복학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난 당시에 학교 앞에 작은 방을 얻어 살고 있었고, 그 집엔 부모님과 동생만 살고 있었는데, 주말이나 가끔 본가에 가야할 일이 생기면 난 안방에서 부모님과 같이 잘 수 밖에 없었다. 그 좁은 집에는 방이 둘 밖에 없었고, 작은 방은 여동생이 썼다. 군대 가기 전에는 주방을 뒷베란다로 옮기고 원래 주방이었다가 이젠 주방으로 가는 통로가 되어버린, 다른 집이었다면 거실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는 좁은 공간에 자바라 칸막이를 치고 임시로 내 방으로 썼다. 평생 침대를 써 본 적이 두 번 있는데, 그때와 고시원 생활할 때였다. 그 통로 공간은 원래 싱크대가 있던 자리 밖에 내가 잘 곳이 없었는데,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아 바닥에서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침대 생활을 몇 달간 했고, 내가 군대 간 후에 그 침대는 여동생이 썼다.

암튼 가끔이지만 그 집에서 자고 돌아와야하는 날엔 부모님과 한 방에서 지내야 하는 일이 무척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꿈 속에서 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다. 구체적인 사건은 기억나지 않지만, 여러모로 심리적인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괴로워하다가 문득 잠에서 깼다.

정신이 든 후에 그 공간과 그 시절이었다면 충분히 괴롭고 힘든 시기였으니 악몽일 수 밖에 없겠다고 납득했다.

집 이야기

그 아파트는 임대 아파트였다. 그 임대 아파트에 당첨되기 전에 우리집은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이었다. 내 기억속에 가장 오랜된 우리집은 넓은 2층 주택 중 구석진 곳에 있는 방 한칸에 부뚜막이 달린 곳이었다. 사람 얼굴 높이에 작은 간유리 창문이 있는 낡은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부뚜막이 나오고 그 옆에 아주 높은 계단 두 단을 밟고 미닫이 문(나무창살에 창호지를 붙인)을 열면 작은 방이 나왔다. 그 방에 제대로 된 가구도 없이 네 식구가 살았다. 욕실이 따로 없어서 그 부뚜막에서 아침 저녁으로 씻었고, 화장실은 밖에(그러니까 마당 구석에) 여러 가구가 함께 쓰는 공동 화장실이 세 칸(혹은 두 칸이었으지도)있었다. 그 2층 주택은 주인집이 2층 전체를 쓰고 1층은 우리 집 같은 집들이 대여섯 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집에 살았던 또래 친구가 적어도 너댓명은 있었다. 여름이면 마당에 커다란 (뻘건) 고무 다라이에 물을 받아놓고 아이들이 빨개벗고 놀았다. 남녀 구분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한 게. 그때 우리집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나오는 방에 살았던 동갑내기 여자 아이랑은 같이 다 벗고 노는 일이 자연스러웠는데, 동네 목욕탕 여탕에 엄마 따라갔다가 같은 반 여자아이와 마주쳤을 때에는 너무 부끄러워서 견딜수 없었던 것. 뜨거운 탕안에 쏙 들어가서 버티고 있었던 일이 기억난다.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시절 그 열악한 주거현실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이시백 선생의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 덕분이었다. 이시백 선생의 실감나는 묘사 덕분에 그때 그 집이 생각났다.

대학시절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그 동네에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알고보니 국민학교 한 해 선배였던 그는 대학시절까지도 그 동네에 계속 살고 있었다. 그 친구 집에 놀러갔던 어느날 어린시절 살았던 그 집을 찾아보고 싶었다. 자주 놀았던 골목길과 공터 등이 여전히 기억 속에서는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찾을 수 없었다. 아직 남아있는 학교를 비롯해 길을 유추해보면 여기쯤이 맞을 것 같은데, 그 집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 단칸방에 제법 오래 살다가 국민학교 2학년때 앞서 언급한 임대아파트로 이사갔다. 그 아파트는 내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그 좁은 집이 당시엔 엄청 넓어보였다. 나와 동생에겐 방이 새로 생겼다. 집엔 각종 가구들도 새로 생겼다. 동생은 잠버릇이 험해서 같이 자기에는 좋은 룸메이트는 아니었지만, 좁은 방에 네 식구가 자던 시절에 비하면 뭐 말이 필요없었다. 그리고 그 시절부터 내 독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었고, 학급문고를 읽었고 이웃이나 친구들 책을 빌려 읽었다.

이 아파트에 오래 살았던만큼 기억나는 일화가 많은데, 겨울이 오면 뒷베란다 연탄광에 연탄을 쌓아두었던 일과 그 연탄광 옆에 쓰레기 투척구가 있어서 쓰레기를 던지면 아파트 뒤쪽 쓰레기장에 쓰레기가 모였던 것 등이 기억난다. 우리 집은 4층이었는데 연탄이 들어오는 날엔 난리가 났다. 1층부터 4층까지 부직포 같은 걸로 계단에 연탄 가루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깔개를 깔아두고 여러 명의 아저씨들이 양손에 연탄 2개씩 총 4개를 쥐고 4층까지 계단을 올랐다. 그 깔개는 집안에도 깔아둬야 하는데, 아저씨들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가 다시 뒷베란다에서 신발을 신고 할 수 없으니 신발을 그냥 신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연탄광에 연탄 200장을 채우고 나면 집안 청소가 큰 일이다. 아무리 깔개를 깔아뒀어도 집안엔 신발자국이 남게 마련이고, 연탄 가루가 날리기 마련이다.

4층까지 올라야하는 계단은 좁아서 오르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들은 도중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했다. 몇 살때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연탄을 같이 날랐는데, 양손에 연탄 집게를 쥐고 연탄을 4개를 들어올리면 손아귀 힘만으로 버티며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나중에는 손에 힘이 빠져서 연탄을 놓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실수로 연탄을 떨어뜨리면 비싼 연탄을 못쓰게 되고 바닥이나 벽에도 시꺼먼 얼룩이 묻는다.

그 아파트에 제법 오래 살다가 청소년기에 그 근처 주차장 옆 반지하 집에 또 몇 년을 살았다. 그 아파트가 방이 두 개 밖에 없고 좁았는데 반해, 주차장 옆 반지하 집은 엄청 넓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시절 사춘기였던 나와 동생은 넓은 방에 자바라 라고 부르는 접었다 펼쳤다 하는 간이 벽을 치고 한 방에 지냈다. 내가 입구 쪽에 지내서 동생은 화장실만 가려고 해도 자석으로 닫힌 자바라를 열고 내 자리를 지나가야 했다. 사춘기의 예민했던 남녀가 그 방에서 참 많이 싸웠으리라.

그 집엔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단칸방 시절에도 화장실이 밖에 있었지만, 그건 재래식이었고 여러 집 가족들이 같이 써야해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이 집 화장실은 밖에 있었어도 수세식이었고, 우리 가족만 쓰는 것이라 나쁘지 않았다. 다만 한겨울에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추위가 제일 힘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 반지하 집에 살았었다. 그 집 바로 뒤엔 독서실이 있었고, 동네 친구들 중 그 독서실에 다니는 애들이 좀 있었다. 그 독서실 베란다에서 아이들이 음료를 마시며 수다를 떨며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그 베란다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우리 집이 바로 보였다.

그해 여름은 지독하게 더웠고, 난 반팔 셔츠에 사각팬티만 입고 밖에 나와 있었다. 집안은 열기로 가득차 있었고, 선풍기도 여동생한테 뺏겼고, 밖은 그래도 해가 떨어지면 좀 견딜만 했으니. 독서실 쪽에서 여자 아이들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어쩌다 알게된 이웃 여고 아이들이었다. 난 그렇게 속옷바람으로 여자아이들을 만나 한참을 놀다가 돌아왔다. 속으로 제발 그 아이들이 이게 속옷이란 걸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는데, 그럴 리는 없었다. 그 아이들 집에도 다들 그런 사각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아빠들이 있었을테니까. 다음날부터 어울리던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 동네에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누군가가 있다고.

쓰려다보니 학교 앞 자취방에 대해서도 쓸 말이 많은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아래 내용은 벌써 며칠 전에 쓰다 만 것인데, 그냥 버리기 아까우니 일단 뒤에 붙여둔다.

화가 난다

아침에 페이스북을 보다가 너무 화가 나서, 출근을 위해 움직이던 걸 멈췄다. 상식 혹은 기본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 당사자는 일반인이 아닌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할 예정인 공인이었다. 4년전 지난 지방선거에서 바로 내 눈앞에 앉아서 내가 요구했던 재생에너지 정책을 당연히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던 그는 당선된 후에 전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약속을 이행하라고 찾아갔던 우리를 그는 매몰차게 문전박대했다. 만날수 없었다. 선거 운동 기간에 뭐든 수용하겠다고 직접 본인이 도장을 찍은 그 협약서를 지금도 내가 갖고 있는데. 그래놓고 다시 선거에 나오겠단다. 지난 4년 동안 만날 수도 없었는데, 이제 다시 시민의 발이니 머슴이니 하면서 떠들겠지.

하필이면 그 인간의 책을 낸 출판사가 내 친구가 운영하는 출판사였다. 그걸 알게 된 건 뉴스 기사를 통해서였다. 코로나 국면에서 공무원들을 비롯해 시민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요하는 국면에서 공무원들을 동원해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는 기사였다. 화가 났지만, 참았다. 그래 본인은 다시 선거를 준비해야 하니 출판기념회가 필요했겠지. 하지만 양심을 팔고 본인 잘난 척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눈이 돌아갔다.

하필 한때 엄청 친했던 친구가 그 인간의 책을 냈더라. 그리고 출판기념회 기사가 났고,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페이스북에 공유한 걸 봤다. 처음엔 그냥 무시했는데, 그렇게 자랑하는 듯한 게시물이 반복적으로 보여서 더 화가 났다.

그냥 넘어가려다가 결국 나도 모르게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사실 댓글로 그런 이야기를 다 설명하기는 어렵다. 뭔가를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했지만, 내 감정과 의도를 다 담기는 어려웠다. 결국 감정을 주로 담은 댓글을 쓰고 말았다. 만약 그 친구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그때 의도를 설명할 기회가 생기겠지 싶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각자의 입장은 다르니까 라는 투의 답글만 남기고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던 간에 내가 표현하려던 불쾌감은 전달이 됐으니 그걸로 충분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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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4-2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세대는 저놈의 집 얘기만 해도 한보따리의 얘기가 나올듯해요. 진짜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집들에서 참 잘도 살았다는.... ㅎㅎ 감은빛님의 악몽이라는 말이 공감가요. 그 시절 살았던 기억 자체가 악몽인것은 아니지만 다시 살라고 하면 진짜 악몽이 될것같으니 말이죠. ㅎㅎ
다음 이야기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은빛 2022-04-30 16:49   좋아요 0 | URL
그죠? 바람돌이님.
정말 집을 주제로 쓸 이야기가 엄청 많아요.
언젠가 제대로 써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재미없는 이야기에
늘 공감해주시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페크pek0501 2022-04-30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글 - 불쾌한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풀어 냈으니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고요, 되셨으리라 믿어요.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감은빛 님이 글을 쓰시는 분이고, 알라딘이라는 인터넷 공간이 있어 글을 읽는 이들이 있으니 말이에요. 생각 없이 사는 듯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날 때가 있지요. 그런 사람에겐 무엇이 잘못인지 말해도 아마 못 알아 듣고 화부터 낼 겁니다.

저도 어릴 적 연탄을 몇 백 장 쌓아 놓아야만 겨울을 지낼 수 있는 집에서 산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뜨거운 물도 안 나오고 세탁기도 없는 그런 집에서 어떻게 웃으며 살 수 있었을까 싶어요.

감은빛 2022-04-30 16:52   좋아요 0 | URL
네, 페크님. 말씀처럼 확실히 도움이 되었어요.
제 글이야 뭐 그냥 생각나는 걸 끄적이는 것 뿐인데,
이렇게 공감해주시니 너무 감사한 일이죠. 고맙습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정말 화장실도 욕실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살았었나 싶더라구요. 확실히 우리는 점점 더 편리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 때문에 지구가 위기에 처한다는 생각을 못 한다는 점이 안타깝긴 합니다.

꼬마요정 2022-04-3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때 연탄을 사용해야 하는 집에 살았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사시던 집도 그렇구요(친가, 외가 다요) 그 당시 저는 몰랐지만 일산화탄소 중독이 많았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잘 살아남은 것 같아요. 근데 또 연탄 보일러(?) 뚜껑 위에 쥐포 구워먹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더럽네요 ㅎㅎㅎ

저도 구의원 경선한다고 후보들 문자 오는데 보니까 한 분…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하고 딸이랑 싸우고 짜증 내던 분이더라구요. 몇 년전에 일 때문에 봤는데, 구의원 선거 나올 거라는 거 보고 화가 나더라구요. 진짜 아무나 정치 하는구나, 소명의식 같은 건 없는 사람 많겠구나 싶었어요. 감은빛 님이 얼마나 화가 나셨을지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감은빛 2022-04-30 16:58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안녕하세요.
정말 예전에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돌아가시는 분들도 꽤 많았어요.
제 먼 친척되시는 어르신은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숙직실에서 주무시다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돌아가셨어요.
연탄 난로를 켜놓고 환기를 제대로 못 하셨나봐요.

사실 거대 양당 체제에서는 공천만 받으면 당선이 된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전과자들도 많고 인간이 되지 못한 뭐 같은 xx들도 많죠.
전과 중에서도 음주운전 이런 건 정말 많구요.
제일 화가나는 건 성범죄자들도 제법 많더라구요.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