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대화


하늘이 낮게 드리운 늦은 오후였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어딘가를 걷고 있었다. 누구를 찾기 위해서였는지, 어디를 걷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기억나는 건 옆에 같이 걷던 일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일행과 나는 무언가 대화를 나눴다. 한참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중에 그는 내게 X세대를 구별짓는 특징과 세대론의 일반적인 내용과 그 한계에 대해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으며 대학 1학년 때 썼던 과제를 떠올렸다. 과제의 주제가 X세대였다. 뭐라 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머리에 떠오르는대로 사회학자와 이론을 언급하며 길게 대답을 했다. 그래 내가 엄연히 사회학을 전공한 사회학도란 말이야. 졸업하고 사회학 서적을 읽지 않은 게 벌써 이십년이 훌쩍 넘었지만, 이렇게 설명을 잘 하잖아. 라고 생각하며 우쭐해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영어로 트럼프 시대의 미국 이민자의 삶을 출신 지역 별로 예측해보자고 했다. 남미와 아시아를 중심으로. 나는 영어로 뭐라고 답을 하기 시작했는데, 계속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내가 지금 제대로 문장을 만들었는지, 말이 되는 말을 떠들고 있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의심이 들기는 했지만, 답을 하기는 했다. 그가 내 대답에 공감의 몸짓과 눈빛을 전해왔다. 저렇게 열심히 경청하는 자세를 보이면 아무리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라도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어서 구체적으로 얘기하기 어려웠지만, 아시아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범주를 나눠 얘기할 수 있었다. 그는 이번에는 미국 내 중국계, 일본계, 한국계 이민자의 생활 양식을 거칠게라도 일반화 할 수 있을지 물었다. 음, 중국계와 일본계에 대해서는 몇몇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아주 전형적인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았고, 한국계도 그다지 아는 것이 없지만, 딱 떠오른 영화가 [미나리], [패스트 라이브즈], [서치]였다. 이 영화들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중 [미나리]를 통해 한국계 이민자들이 미국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이번에는 일본어로 재일 한국인 문제, 그 중에서도 무국적 재일 조선인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주제를 바꿨다. 어떻게 그의 일본어를 잘 알아듣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의심의 여지 없이 잘 알아듣고 있다고 여겼다. 다만, 이제 일본어로 답을 하려고 하니 말문이 막혔다.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 주제라 적절한 답을 우리말로 하라고 해도 어려울텐데, 일본어로는 단어를 단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다. 스미마셍, 와타시와 니혼고가 데키마셍. 겨우 이 말을 떠올리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아니 데키마셍이 아니라 하나시마셍이라고 해야 하나?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말했다. 아나타와 이마 니혼고데 하나시테이마스. 아니 그건. 간신히 그 말 정도만 떠올린 거라고.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이거 현실이 아니구나. 그래 내가 영어와 일본어를 이렇게 잘 할 리가 없지. 어쩐지 막힘없이 다 알아듣고 있더라.


꿈이라 깨닫는 순간 우리가 걷고 있던 길 주위의 묘한 풍경들도 눈에 들어왔다. 왼쪽은 넓은 초원이었고, 저 멀리 낮은 산들이 있고, 그 너머로 해가 넘어갈 듯 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림으로 그려서 간직하고 싶을 만큼. 오른쪽은 바다였다. 어둠이 깔려가는 바다에서 주기적으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이 길을 한참 걷고 있었던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양 옆의 초원과 바다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내 왼쪽에 서있었고, 그의 뒤로 붉은 노을이 펼쳐져 있어서 아주 조금 눈이 부셨다. 몇 발짝 앞서 걸은 후 뒤돌아 그를 보았다. 그의 왼쪽 얼굴과 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긴 어디죠? 우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내가 묻자 그는 웃는 듯 찡그린 듯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고, 갑자기 그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뭔가 날카로운 통증을 느끼는 순간 잠에서 깼다.


꿈에서 깨자마자 나와 함께 걷던 그가 누구인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함께 걸으며 내 이야기에 집중하던 그 얼굴. 바람에 긴 머리를 나부끼며 왼쪽 뺨이 노을에 물들었던 그 얼굴. 웃는 것인지 찡그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달려들기 직전의 그 얼굴. 분명 아름답다고 느낀 그 얼굴은 내 기억 속의 누구와도 맞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는 분명 익숙한 느낌이었다. 딱 누구라고 떠오르지는 않지만, 분명 들은 기억이 있는 조금은 독특한 목소리였다. 마지막 순간 그는 나를 무언가로, 어쩌면 칼로 찌른 것이었을까? 어쩌면 잠에서 깨는 순간 내 무의식이 그 얼굴을 떠올리기 싫어서 왜곡한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아서 일본어와 영어 그리고 중국어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처럼 여러 언어를 바꿔가며 말하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어떤 꿈에서는 아예 모르는 불어를 유창하게 말하기도 했고, 어떤 꿈에서는 힌디어로 좋아하는 인도 영화와 배우들에 대해 떠들기도 했다. 어떤 날엔 현실의 나처럼 떠듬떠듬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상태로 답답하게 대화를 하기도 했었다. 아무리 꿈이지만, 아니 꿈이라서 더욱 말을 잘 못하는 것 보댜는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이 더 좋다. 시간이 아직 이른 편이라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누워서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꿈 속의 내용을 음미했다. 아마도 X세대 내용이 나왔던 것은 최근에 본 영화 [백 인 액션] 때문인 것 같다. 영화에서 카메론 디아즈와 남자 주인공(많이 본 배우였는데 이름을 못 외웠다.)이 술집에 큰 딸을 데리러 갔다가 싸움이 일어날 때, 시비를 건 젊은이가 '부머'라고 부르니, 카메론 디아지그 우리는 부머가 아니라 X세대라고 답한다. 그게 영어 대본도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막만 그런 것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분명 부머라는 단어는 들렸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우리나라와 연령대가 다를 수 있겠지만, 확실히 부머와 X제너레이션은 미국에도 있는 세대일 거라 생각한다. 나중에 찾아봐야지.


꿈에서 언급한 X세대를 주제로 한 과제는 실제로 대학 1학년 때 썼던 것이 맞다. 이 과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성적도 제법 괜찮게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회학이 재미있었던 것은 다양한 사회 현상을 여러 층위의 이론으로 분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즈음에 갑자기 유행했던 '엽기'라는 단어가 붙은 다양한 유행들에 대해서 조별과제로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정말 해괴한 사진이나 영상들을 많이 접했었다. 물론 그때 그 엽기라는 단어의 유행을 어떻게 분석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다만 기억나는 것은 우리 조가 복학생이었던 나를 빼고 모두 여학생이었다는 것, 우리가 각자 조사하거나 함께 찾아본 사진이나 영상들 중 상당수가 내용적인 측면에서 여성들과 함께 보기 곤란한 것들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 학생들 중 미모가 뛰어나서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한 학생이 그런 장면들이 나올 때 마다 내가 눈을 돌리고 외면하면, 쿨한 태도를 보이며, "선배, 지금 눈 돌릴 때가 아니에요. 과제 해야죠." 라고 말하며 내 양 볼을 잡고 얼굴을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돌렸다는 것. 아, 한 가지 더 있다. 그 발제를 내가 맡았고, 우리 조의 발제 점수는 만점을 받았으며, 그날 이후로 조별 과제 마다 여자 후배들이 복학생인 나와 같은 조에 들어오고 싶어하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


어떤 시절


문득 생각해보면 이게 다 꿈인가 싶은 시절을 지나고 있다.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가결. 현직 대통령의 체포 영장 집행과 구속영장 발부. 게다가 법원에 대한 테러 행위까지. 이게 다 현실인 거 맞아? 차라리 내가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더 현실인 것 같고 이게 다 꿈인 것 같은데, 장자와 나비 이야기처럼 어느 삶이 꿈이고 어느 삶이 현실인지 모르게 된 것인가? 아니면 영화 [매트릭스] 처럼 어느 삶이 가상 현실이고 어느 삶이 현실인지 모르는 것인가?


요즘 주위에 내란성 불면증과 내란성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건지 모르게 정신없이 살고 있다. 뉴스만 보면 꼴 보기 싫은 얼굴이 나와서 보고 싶지 않지만,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일들이 터지니 뉴스를 안 볼 수도 없고. 내란 수괴를 구속시킨 것은 백번 잘한 일이지만, 그 공범이나 다름없는 경호처의 범죄자들은 왜 또 그냥 석방 시킨 것인지? 검찰이란 집단에 대해 불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또 벌어진다. 게다가 내란에 동조하는 미친 인간들의 집단인 빨간당의 지지율은 왜 올라가는 것인지? 하긴 저들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내란에 동조하는, 정치적 자살에 가까운 짓을 기꺼이 저지르는 것이고, 그런 자들의 뒷배가 되어주는 자들이 분명히 존재하니, 극우 유튜버라는 미친 쓰레기들이 이렇게 설쳐대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초유의 법원 테러라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범죄 행위가 벌어진 것이겠지.
















한참 재미있었던 SF읽기 모임이 한동안 모임을 못 열고 있다. 다들 바빠졌기 때문이다. 벌써 두 달째 모임 날짜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와중에 이번에는 꼭 모임을 하자고, 소설이 아닌 책을 읽자는 제안이 나왔다. [섹스로봇과 자살기계]라는 아주 자극적인 제목이다. 뭐 우리가 꼭 SF 문학만을 읽자고 한 것은 아니기도 하고 내용이 SF 라는 우리 주제와 닿아있기도 하고. 문제는 모임 날짜다. 벌써 2월이 다 되어가는데 날짜는 정하지 못했고, 그 사이에 자꾸만 새로운 일정들이 달력에 기록되고 있다. 금방 또 2월의 달력이 다 채워질 듯.



오랜만에 밀린 일들을 좀 처리하려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야근을 하다가 잠시만 쉬어야지 하고 알라딘에 들어왔고, 이런 시국에 책이라도 사야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핑계로 몇 권의 책을 주문했고, 이웃들의 글을 조금 읽다가 자판이라도 두드려야지 하는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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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25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꿈을 어떻게 이리도 생생하게 기억하는지요. 어떤 작가는 꿈노트를 작성한다는데...전 눈을 뜨면 신기루처럼 사라집니다. 아쉬운 꿈은 옷자락이라도 잡고 싶지만 담배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집니다.
다만 오래도록 바라거나 그리워한 어떤 사건이나 사람에 대한 몇몇 꿈은 추억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아 있더군요. 고3때 친구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보름만에 꾼 꿈은 너무나 생생했는데, 30년이 훌쩍 지나 다른 기억은 다 희미해져도 그 꿈만은 사라지지 않더군요. 추억을 꿈이 대신한 경우랄까요.

감은빛 2025-02-02 21:59   좋아요 0 | URL
제가 이상하게 비슷한 패턴의 꿈을 반복해서 꾸거든요. 그렇게 자주 반복하면, 여러가지를 기억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가끔 꿈 속에서 이게 꿈이라고 느낀 경우에는 좀 더 잘 기억나기도 하구요.

또 일정 부분은 대략 이런 흐름이었다는 것만 기억한 것에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약간 기억을 덮어 쓴 것도 있을거예요.

그죠. 어떤 꿈은 꼭 실제 기억처럼 오래 기억나기도 하죠.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5-02-01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국어 공부를 하셨군요. 그러니까 꿈에서도 나오죠. 외국어 공부를 하시는 분들 보면 좋은 인생을 산다는 생각이 들어요. SF읽기 모임을 하셨었군요. 저도 가끔 그런 쪽으로 책을 읽어요.
감은빛 님은 글을 길게 쓸 줄 아는 능력, 이 있어요. 제가 부러워하는 점입니다. 저는 길게 쓰고 싶어도 그게 안 됩니다.마치 긴 대답을 할 줄 모르고 짧은 답변만 할 줄 하는 사람처럼 말이죠.ㅋㅋ

감은빛 2025-02-02 22:0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영어 학원에 다닐 때에는 자주 영어로 꿈을 꾸기도 했어요. 꿈에서는 참 유창하게 말을 잘 했는데, 깨고나면 아니어서 늘 아쉬웠었죠.

저는 짧은 글을 잘 못 써요. 가끔 청탁받은 원고도 늘 분량을 한창 초과해 써놓고 줄이느라 애를 먹어요. 그냥 아마도 할 말이 많아서 길게 쓰는 것이겠죠.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