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2012년 7월 14일(토) 오전 8시 30분 삼척으로 떠나는 ‘탈핵 희망버스’ 안에서 책을 펼쳐들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 서너 달쯤 전에 3분의 2정도 읽다가 다른 일들 때문에 끝까지 읽지 못하고 책상 한쪽 구석에 밀어두었다가 지금껏 잊고 있었다. 전날 밤 오랜만에 아이들도 없이 홀가분하게 버스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책이라도 읽어야지 생각하면서 짐이 많을 테니 얇은 책을 위주로 살피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탈핵 희망버스’와 ‘체르노빌의 아이들’ 딱 어울리는 조합이다.

 

1986년 4월 26일(토) 새벽 1시 30분 우크라이나의 프리피야트에서 3km 떨어진 ‘블라디미르 리치 레닌 핵발전소 4호기’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 소설은 프리피야트(책에는 ‘프리프야트’로 나온다.)에 사는 열다섯 살 소년 이반이 폭발장면을 아파트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이후 이반의 가족들이 프리피야트를 탈출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소설에서는 핵발전소의 폭발 순간을 프리피야트 주민들이 목격하고 곧바로 피난을 떠날 준비를 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상황은 달랐다. 체르노빌 사고 20년 후에 제작된 [체르노빌 전투 The Battle of Chernobyl]에 따르면 사고가 일어난 다음날 4만3천여 명의 프리피야트 주민들은 모두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했다. 소련 정부에서 보낸 피난을 위한 버스가 도착한 것은 폭발 30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버스가 도착하고 7시간이 지난 27일 오후 2시 경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대피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책에는 저자인 히로세 다카시가 책을 쓴 정확한 시간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일본에서의 책 발행 연도가 1990년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그는 1988년에서 1989년 즈음에 이 소설을 썼을 것이다. 당시에 그는 체르노빌 폭발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폭발과 동시에 주민들이 피난을 떠난 과정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실제로는 훨씬 더 황당하게도 폭발이 일어나고 아침을 두 번 맞을 때까지도 주민들은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으며 피난명령조차 내려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 소설의 첫 장면은 아마 달라졌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또한 방사능 전파 속도가 무척 빠르고 그만큼 방사능에 의한 피해가 드러나는 속도도 빠르다. 피난민들이 군인들의 통제 때문에 붙들려 있던 농장에서 생후 8개월 된 아기가 숨지는 장면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슬픈 장면인데, 이때가 폭발 후 아직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반면 [체르노빌 전투]에 의하면 폭발 이틀째인 27일 오전에도 주민들은 평소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당시 5살이었던 유리 마첸코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발전소 직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탁아소에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반면에 소설 속 이반의 아버지인 안드레이도 발전소의 직원으로 나온다. 소설에서 안드레이는 이 상황에 대해 가장 빠르게 이해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인물로 나온다. 현실과는 무척 다른 장면이다.

 

이 작품은 소설적 재미나 문학적 완성도를 기대할 수는 없는 글이다. 어디까지나 핵폭발의 위험성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 그 가치를 매겨볼 수 있다. 글 자체는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지만, 소설의 묘미라고 볼 수 있는 묘사가 무척 부족하고 글의 전체적인 구성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물론 나 역시 재미나 완성도를 기대하고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불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문학적인 가치를 고려했다면 훨씬 더 널리 알려지고 읽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을 뿐이다.

 

2012년 7월 14일 오후 2시경 버스에서 책을 덮으며 이 정부가 핵발전을 계속 고집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바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곧이어 ‘탈핵 희망버스’는 삼척에 도착했다.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원전백지화 기념탑’에서 간단한 행사를 갖고 이어서 시내에 도착하여 거리행진과 탈핵 문화제를 펼쳤다. 놀랍게도 많은 삼척 시민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솔직히 싸늘하고 냉담한 반응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었다.) 많은 삼척 시민들과 전국에서 모인 탈핵 희망버스 참가자들은 비가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탈핵의 의지를 뜨겁게 불태우며 즐거운 마음으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공연자들과 참가자들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진 문화제 덕분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추억 하나가 가슴에 새겨졌다.

 

다음날인 15일에는 영덕으로 건너가서 신규원전 건설예정지를 걸었다. 안타깝게도 신규원전이 들어설 자리는 ‘영덕블루로드’라는 이름의 관광지였다. ‘제주 올레’, ‘지리산 둘레길’ 등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걸으며 스스로 마음의 안정을 얻는 걷는 길이 요즘 유행이라던데, 여기 영덕에도 아름다운 길이 있었다. 잠시 걸었음에도 그 해안의 아름다움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울퉁불퉁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바윗길을 따라 해안을 걸으며 발밑에서 부서지는 새하얀 파도를 내려다보면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그 에메랄드 빛 바다 색깔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부디 삼척과 영덕의 신규 원전이 취소되어 그 아름다운 해안 길을 아이들과 함께 다시 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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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무 2012-07-1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저는 <핵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어요. 참 잘쓴 작품이더라구요. 열심히 사시는군요!! 저도 지켜보며 지지할게요 감은빛님 홧팅!!

감은빛 2012-07-18 16:17   좋아요 0 | URL
봄나무님께서 잘 쓴 작품이라 하시니 저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좋은 책도 권해주시고, 응원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12-07-18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대규모 반핵시위를 벌였다지요. 이웃나라인 우리나라도 이 소식을 보고 무언가 느꼈으면 좋겠는데 여론이나 대중들의 반응은 좀 썰렁하네요 ^^;;

감은빛 2012-07-18 16:19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에서 정보를 접했는데 17만명이 모였다고 하더군요.
여기엔 유명한 가수나, 소설가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구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311때 대대적으로 집회를 했는데,
전국에서 다 모아도 채 1천명이 안되었지요.

이번에 삼척에서는 대략 3백여명 모였던 것 같아요.

2012-07-18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18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18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한겨레21에서던가요. 삼척과 한수원 관련한 기사들을 보았었는데, 참 어찌되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쿠시마를 보고서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으니..전적으로 탈핵, 탈원전 지지합니다. 저번 총선때 녹색당 지지했어야 했는데, 죄송한 마음 뿐이네요.

감은빛 2012-07-19 15:38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탈핵 지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함께 힘을 모아 핵발전 없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선거에서의 선택이야 전적으로 유권자 본인의 몫이므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들으면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지요.
녹색당이 앞으로 좀 더 잘해서 탈핵을 위한 힘을 모으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7-1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로세 다카시는 저 책 외에 원폭실험한 곳에서 영화촬영한 배우들이 모두 이상한 병에 걸려 시름시름 죽었다는 내용의 책도 썼죠.그게 <위험한 이야기>일 겁니다.

감은빛 2012-07-19 15:39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책도 있군요.
찾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 그랬다. 비가 내리면 어떤 기억들이 떠올랐다. 빗소리는 저절로 내 주의를 빼앗아 하던 일을 멈추게 만들었고,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머리속에서 리플레이 되곤 했다. 비에 대한 기억들이었다. 리플레이되는 기억에 따라 내 기분이 바뀌어 간다. 쓸쓸하고 외로웠던 기억들, 아프고 슬펐던 순간들, 기뻤던 기억들이 나를 그때 그 순간의 감정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가 생각난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다.

 

대략 2년쯤 전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야근을 하고 돌아와 설겆이와 손빨래 등의 집안 일을 조금 하고나서 자려고 누웠는데, 어떤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 새벽에 폭우를 뚫고 먼 거리의 편의점까지 다녀오기가 망설여졌다. 술에 대한 욕구가 좀 더 강했다면 그래도 집을 나섰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나보다. 나는 그냥 창가에 앉아 멍하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슬프고 안타까운 기분에 휩싸여 자꾸만 같은 장면을 되새기고 있었다. 어차피 잠들지 못할거라면 뭐라도 하자 싶어서 컴퓨터를 켜고 트위터에 짧막하게 그 기분을 남겼다. 그런데 잠시 후에 김보일 선생님으로 부터 답이 왔다. 비가 오고, 어떤 기억 때문에 술이 땡기지만 자신은 지금 멀리 강원도 어딘가에 연수를 와 있어서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말씀이었다. 그날 밤 바로 그 순간에 선생님도 나처럼 비와 어떤 추억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고, 술 생각이 간절하지만 술을 마시기는 어려운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어제 밤에도 폭우가 내렸다. 가볍게 마시고 일어서야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술자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조금씩 길어졌고, 누군가 반가운 이가 근처에 있다는 소식에 딱 한잔만 더 하기로 마음먹고 반가운 얼굴을 보러 갔다. 오랫만에 만난 만큼이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고,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밤을 새워 회포를 풀고 싶지만, 몸이 너무 피곤햇다. 아침에 출근해야 할 일이 걱정되어 일어선 것이 대략 2시 반이 넘어서였다. 아마 그때쯤 시작된 것 같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하필 집에 가려고 나서는데 비가 미친듯이 쏟아진다고 투덜투덜 화를 내며 택시를 기다렸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씻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나서 의자에 털썩 앉았는데, 몸의 피곤함과는 상관없이 잠이 오지 않았다. 비가 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법 마신 술도 소용이 없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2년 전의 그날 밤이 생각났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같은 기분에 빠져있던 나와 김보일 선생님은 그날 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나는 아마 음악을 들었거나 다운받아놓은 영화를 보았을거다. 선생님은 연수원 숙소에서 무얼 하셨을까? 다음에 만나게 되면 묻고 싶었으나, 여태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새벽 3시 반,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이시간 피곤한 몸과 취한 정신은 휴식을 원하건만, 빗소리는 자꾸만 나를 붙잡고 있었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지쳐 잠들 것인가? 읽다만 책들 중에 하나를 꺼내려고 책장을 살피다가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가방에서 퇴근 길에 사온 [빅이슈]를 펼쳐 책장을 넘기다가 곧 다시 덮어버렸다. 그래도 2년 전 그날 밤에 비해 다행인 것은 내가 이미 어느정도 술을 마시고 돌아온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술의 힘을 빌어 잠이 올거라고 확신하고 누워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왕이면 슬프고 아픈 기억보다는 즐거웠던 기억을 꺼내보려고 애쓰며 빗소리와 어둠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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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7-1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늦게 주무신건 아니예요?
정말 잠들기 싫은 날 있어요.
근데 딱히 할 건 없는데 잠 자기는 싫은...
술 한 잔 걸치고, 누군가는 마음 속에 기억나고, 세상은 적막하고...^^
잘 지내시죠? 여전히 그곳은 비가 오나요?

감은빛 2012-07-17 15:45   좋아요 0 | URL
저는 어렸을 때부터 밤에 활동하는 체질이었어요.
부모님께서는 늘 저를 '올빼미'라고 불렀죠.
요즘도 술과 관계없이 새벽 2,3시가 기본입니다.

'잘'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저냥 지내기는 합니다.
안부 말씀 고맙습니다!
 

 

나에게는 병이 하나 있다.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는 병.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키지 못하는 병. 이것은 머리가 나쁘다거나 기억력이 안좋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조금 다르다. 다른 기억력에는 문제가 없으나, 유독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니 그런 듯하다. 내가 이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중학교 때였던 듯 하다. 당시 유행하던 최진실, 왕조현, 소피 마르소 등의 책받침을 보면서 같은 사람의 다른 사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장법이 바뀌거나 머리 모양이 바뀌면 도무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자꾸만 같은 사람의 다른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들을 모아와서는 질문하곤 했다. "이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 같은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야?", "다른 사람!" 그러면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나는 그게 왜 우스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저 녀석들 눈에는 이게 같은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야! 나는 오히려 그게 궁금했다.

 

대학 때였다. 학생회 활동 등으로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역시나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덕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일은(아마 평생 잊지 못할듯) 한동안 친하게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대화도 많이 나눴는데, 다시 한동안 못 만났다가 어느날 우연히 학생식당에서 딱 마주쳤을때의 일이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누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아는 사람일거야, 그런데 동기야? 선배야? 아님 후배야? 얼굴로 보아 후배는 아닌 것 같고, 동기 아님 선배일텐데, 말을 놓아야 해? 아님 높여야 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돌면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반가운 웃음이 아직 그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한 내게는 무섭게 느껴졌다. '아직 안돼! 니가 누군지 떠올리지 못했어! 다가오지마!' 그러나 그는 곧 내 앞에 서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전해왔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의 말투에서 말을 높일지 낮출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안녕, 잘 지냈어."라는 평범한 인사말만 갖고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어, 어" 라고 얼버무리듯 입을 열었고, 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읽은 그는 잠시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정말 쥐구멍이롣 있다면, 머리만이라도 숨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의외로 빨리 그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뭐야! 너 나 못알아보는거야? 참, 나. 어이없네!" 잠시 혼자말로 뭐라고 궁시렁거리던 그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더니 곧 떠나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남아 계속 그가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그 마지막 경멸을 담은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그 이후로도 가끔 학교에서 마주쳤는데, 이젠 그 쪽에서 아예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억은 어느날 갑자기 망치에 맞은 것처럼 떠올랐다. 그는 동기였다. 즉 말을 놓아도 되는 상대였다. 짧은 기간 여러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의 이름만은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대학때였다. 마지막 2년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서 호출이 와서 저녁 시간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여동생이 타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그 쪽을 쳐다보았으나, 여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 여동생은 당시에 거의 분장에 가까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그래도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다 와서 복잡하던 버스 안이 한적해졌을 때, 자리에 앉아있던 동생이 "오빠야!"하고 불렀을 때까지도 나는 동생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내 동생이랑 비슷하네. 누구를 부르는 거지?' 싶어서 주위를 돌아볼 뻔 했다. 다시 한번 동생이 "오빠야!"를 부른 다음에야 얼른 정신을 차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착각하거나 잘못 알아보고 실수한 일이 무척 많다. 도무지 셀 수도 없다. 거래처를 방문했다가 담당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젊은 여직원들의 얼굴들을 열심히 살폈는데, 바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그 사람인 줄 모르고 30분 넘게 기다렸던 적도 있었고, 다른 거래처에서는 담당자인줄 알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가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어서 엄청 무안했던 적도 있었다.

 

작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녹색당에서도 여러번 그런 일이 있었다. 한번은 당원들끼리 함께 FTA반대 집회에 나가기로 하고, 좀 늦게 집회장소에 도착했다. 전화로 위치를 확인해서 당원들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 자리에는 다른 당원들은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고 있던 한 여성당원이 있었다. 집회가 일단락되고 행진이 시작되면서 그 여성당원이 내게 다가와서 반갑게 말을 붙였는데, 이번에도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역시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이미 표정관리하기에는 늦어버린 상황. 그는 내가 적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그냥 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간 듯 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생각하느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가 "말을 걸었는데, 반응이 없길래, 아, 못알아보시는구나! 싶었어요"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의 그런 태도 덕분에 나는 더 부끄러워져서 여러번 사과를 거듭해야 했다.

 

며칠 전에는 광화문 원자력안전위원회 앞에서 탈핵파티가 열렸다. 그 유명한 '햄머링 맨' 근처 거리에서 집회 겸 문화제를 열어서 참석했는데, 거기서 낯익은 여성 활동가를 한 명 만났다.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길래, 나도 정중하게 "안녕하세요!"라고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아마 활동하다가 만난 사람들 중에 한 명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가 "아니, 왜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세요? 지금 나 못알아보시는거죠?"라고 정색을하면서 물었다. 그제야 뜨끔해진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살피면서 "아니예요. 기억나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메모리에서 '여성활동가' 항목을 뒤져서 나오는 얼굴과 이름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은 분명히 낯이 익었다. 내가 활동했던 몇 개의 교집합을 차례로 떠올리다가 마침내 맞는 항목을 골라냈다. 환경단체 활동할 당시에 같은 기수로 교육을 받았던 동기였다. 그가 나보다 어렸기에 아마 당시에는 말을 놓고 지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왜 깍듯하게 인사하냐?"를 물었던 거겠지.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남자 아이를 하나 발견했다. 그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중간쯤 되어 보이니 대략 대여섯살 쯤 된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새 우리가 다들 결혼하여 아이들이 자라고 있을만큼 시간이 흘렀구나. 새삼 지나간 시간을 느끼면서, 그와의 짧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역사가 워낙 오래되다보니, 주위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상담도 많이 받았다. 어떤 이는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관심을 좀 가지라는 요구를 했고, 어떤 이는 그냥 포기하라는 주문을 했다.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을 하다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많고, 앞으로도 활동을 중단할 생각은 없으므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이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망신을 당하게 될까 싶어서 늘 불안하다. 그러나 며칠 전에 마주쳤던 동기와 헤어져서 돌아오면서 이건 난치병이 아니라 불치병이구나 싶었다. 그냥 포기하라는 조언을 했던 친구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 하다. 다만 사람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라는 친구의 조언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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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1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감은빛님. 저도 언젠가 같은 내용으로 페이퍼를 쓴 적이 있어요. 의외로 이런 증상을 가지신 분들이 많군요. 안면인식장애 말입니다. 제 경우에도 친구 얼굴을 못알아봐서 엉뚱한 사람한테 말걸고 그랬더랬어요. 하핫.

모두에게 적용되는건 아닌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의 얼굴은 아주 잘 기억나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들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앞머리가 있었지 머리가 길었지 스포츠머리였지, 이정도의 어떤 윤곽은 기억하지만 얼굴형태는 뿌옇다고나 할까요. 이미지만 남아있을때도 있고, 어떤 경우엔 이미지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저도 상당히 애먹는답니다. 특히 제가 지금 하는 일에서는 얼굴을 잘 기억해야 하는데, 그걸 통 못해서 누군가 찾아올때마다 동료직원을 쳐다봐요. 그러면 동료직원이 입모양으로 누구라고 말해주죠. orz


저는 사람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림 기억을 전혀 못해요. 만화책은 재미있게 읽어도 전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요. 이쪽으로는 뇌가 발달하기를 멈춘듯 해요. 제 경우엔, 관심과는 별개로 말이지요.

감은빛 2012-07-13 11: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저와 같은 불치병을 갖고 계시군요.
(불치병에 반갑다는 표현을 써서 좀 그렇지만)
이거 정말 반가운데요!
다락방님이 쓰신 글을 찾아 읽고 싶네요.

시간날 때 검색해보겠습니다.

라주미힌 2012-07-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사람들을 익숙하게 하는 것도 방법인거 같아요;; 적극적으로 알려서.. 흐흐
저도 핸디캡이 있는데, 어쩔 수 없죠 뭐.. 본인들이 익숙해져야지 -_-;;

감은빛 2012-07-13 12:00   좋아요 0 | URL
저는 가능하면 사람들이 제가 못알아본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렇지만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더라구요.
라주미힌님도 조금은 증상을 갖고 계신가봐요. ^^
저만큼 심하지는 않겠죠?
 
독과 도 - 울자, 때로는 너와 우리를 위해
윤미화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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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살짝 열어놓고 비가 콘크리트 바닥을 때리는 소리를 듣다가, 담배 한 개비를 빼어 물었다. 어느 술집에선가 가져온 작은 성냥갑을 열어 성냥 하나를 그었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불꽃이 타오른다. 잠시 불꽃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얼른 불을 붙였다.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의 퀴퀴한 냄새와 여름 장마 기간의 특유의 비 냄새와 담배냄새가 뒤섞였다. 하얀 연기를 창밖으로 뿜어내면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해가 지고 어두운 골목 저 편에 노란 전구 하나가 갓을 쓰고 전봇대에 위태롭게 매달려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저 위쪽에서부터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빗소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큰 소리로 깔깔대며 떠드는 목소리가 둘, 아니 셋인지도 모르겠다. 곧이어 창문 아래로 노란 우산, 빨간 우산, 줄무늬 우산이 지나간다. 셋이었다. 담배를 끄고 펼쳐진 공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글자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게 날아가는 글씨들. 뭐라고 썼던 걸까? 타임머신이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 그 공책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아직 내 자취방에 컴퓨터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인터넷서점에 서평을 한번 써보라고 권한 친구가 있었다. 그게 뭔데? 물었더니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할 수 있는 서점인데,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면 적립금을 얼마인가 주는데, 나중에 그 돈을 모아 책을 살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이 돌아왔다. 넌 책을 많이 읽으니, 책 소개하는 글을 쓰고 그 돈으로 다시 책을 사면 좋은 거 아니냐며 설득을 했다. 그래 그거 괜찮겠네. 그렇게 대답은 해놓고도 오랫동안 인터넷서점에 서평을 쓰지는 못했다. 그때는 뭔가 바쁜 일들이 있었다. 연애와 학회 활동과 사회에 대한 고민들로 정신없는 날들이었다. 그래도 책을 읽고 짧게라도 느낌을 남기는 일에는 관심이 생겨서 컴퓨터도 없는 자취방에서 혼자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낯설지만 당시에는 공책에 뭔가를 써야할 일이 많았다.(자취방에 컴퓨터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단편들을 공책에 필사하기도 했고, 어쭙잖은 글 솜씨로 소설을 끄적이기도 했다. 지금은 반대가 되었지만, 그때는 컴퓨터로 자판을 두드리면서 곧바로 글을 쓸 때는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한 두 문장을 두드리고는 한참을 고민하고 또 한 두 문장을 두드리곤 했다. 그때는 오히려 공책에 글씨를 쓸 때 문장이 바로 바로 떠올라서 한 번에 글을 완성해버리기도 했다.

 

왜 이렇게 재미없는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냐면, 최근에 유명한 서평블로거인 파란여우(윤미화)님의 신간 『독과 도』를 읽고, 내가 서평이란 걸 쓰기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1년 쯤 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글 실력은 코 박고 죽기에도 모자란 접시물과 같아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글 따위로 감히 파란여우님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쓰기는 민망하다. 그래서 주저리주저리 내 기억의 한 자락을 꺼내보았다.

 

빨간 띠지의 메인 문구는 “서평의 고수 ‘파란 여우’가 보내는 인문 공감 에세이”이다. 그 표현 그대로 파란 여우님의 글은 인문학의 지식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한껏 담은 에세이가 맞다. 하나의 글에 언급된 책이 보통 두세 권이고, 다섯 권을 언급한 글도 두 개나 있었다. 거기에 다양한 사회문제를 버무린 그의 글 솜씨는 그야말로 ‘예술’이다! 길게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일단 한번 읽어보자. 그리고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자. 그래서 책을 읽는 다는 행위가 이 불편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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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무 2012-07-0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감은빛 2012-07-09 14:51   좋아요 0 | URL
^^

루쉰P 2012-07-07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감은빛님 모처럼 왔네요 ㅋ 죄송요.
역시나 오랜만에 오니 소설과 같은 도입부부터 좋네요. ㅋ 남자가 담배를 피는 모습부터 모두 상상이 되네요. 흠~담배 피고 싶어 지네요...ㅋ
휴..저도 진짜 돌아와야죠 ㅋㅋㅋ 멘붕 됐어요. 요즘 말로 ㅋ

감은빛 2012-07-09 14:53   좋아요 0 | URL
와우! 이거 백만년만의 방문이죠?
저도 글 쓰면서 담배가 피고 싶었답니다.
요즘 제 상태가 요샛말로 멘붕이랍니다.
루쉰님도 저도 어서 멘붕에서 돌아와야 할텐데요.
힘 내봅시다!
 

나는 방금 종이에 손가락을 베였다.


책 만지는 일을 하루이틀 해본 것도 아니면서 가끔 이렇게 종이에 손가락을 베이곤 한다. 조심성이 부족해서인 것 같다. 약 1년쯤 전에도 서두르다가 손가락을 깊게 베인 적이 있었다. 1년만에 다시 깊은 창상(베인 상처)을 입었다. 고작 종이에 베인 정도를 창상이라 표현한 것은 살갖이 좀 깊게 벌어져서 잘 아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정도 상처가 아물려면 아무리 트롤(아내는 상처가 빨리 낫는 편인 나를 보고 트롤이라고 부른다.)이라 불리는 나라고 해도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베인 상처를 입고 보니, 상처가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들면서 갑자기 나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잠시 느려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아까 종이에 베일때에도 그랬다. 아무생각없이 종이를 꺼내다가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날카로운 종이 날에 베이는 순간, 문득 감각이 예리해지면서 찰나의 고통과 함께, 머리 속으로 생각이 빨라졌다. 일단 상처를 확인. 살갗은 벌어져있지만, 아직 피는 올라오지 않았다. 곧 피가 솟아 올라오리라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피가 솟아올라서 작업하고 있던 책을 못쓰게 만들기 전에 빨리 휴지를 찾아야 한다. 일단 피가 올라오면 먼저 지혈부터 해야겠지. 아니 그전에 물로 한번 씻고 소독을 하는게 더 좋을까. 소독약이 있었던가. 아니 없는 것 같아. 지금은 약국에 갈 여유가 없으니, 빨리 휴지를 찾아 지혈부터 하는게 더 좋을거야. 아주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머리속을 빠르게 스쳐간다. 잠시후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해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하게 휴지를 찾아 손가락을 감싸쥔다. 따뜻한 핏물의 온도가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두어 차례 크게 베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마다 늘 비슷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무언가 만들기 위해 문구용 칼을 긋다가, 동생이 갑자기 발로 차고 지나가는 바람에 왼손 엄지를 그어버렸다. 뭔가 따끔한 감각이 잠시 들었다가 말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잠시 후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가 방 바닥에 흘러 주변을 흥건하게 적시기 시작했지만, 나는 당황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칼에 베이고, 아픔을 느끼고, 피가 솟아오르기 시작하는 그 짧은 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던게 기억이 난다. 이게 정말 베인건가. 피가 안나니까 그냥 살짝 아프고 만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암튼 그 상처는 아주 컸다. 지금도 손가락의 절반가량 선명한 흉터가 남아있다.

 

대학시절 농활가서 왼손 검지를(또 왼손이다. 이 수난의 왼손!) 낫에 베였을 때도 그랬다. 이번에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한 순간의 따끔한 아픔이 지난 후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장갑 때문에 상처가 직접 보이지 않아서 혹시 큰 상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깐 가져봤다. 하지만 잠시 후 피가 솟기 시작하자 순신간에 장갑이 붉게 물들어버릴 정도로 상처는 컸다. 정상적인 판단을 하는 나이였다면 당연히 병원을 갔어야 했다. 나는 솔직히 별로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저절로 아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깊이 벌어진 상처가 저절로 아물거라는 철없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농활 인원이 아주 적었기 때문에 선배들도 후배를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며칠 더 일을 했다. 한 선배는 설겆이 하기 싫어서 일부러 다친게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농활을 끝내고 돌아올때까지도 손가락은 낫지 않았다. 상처를 본 어머니는 크게 화를 내며 당장 병원으로 데려갔다. 파상풍 때문에 자칫하면 큰일 날뻔 했다고 의사도 야단을 쳤다. 내가 시간을 끌었던 탓에 상처부위를 매끄럽게 꿰매지못하고 살갖의 일부를 잘라냈다. 덕분에 나는 손가락을 매끄럽게 굽히지 못하게 되었다. 약 1년 정도 왼손 검지를 늘 펴고 살았다. 검지 손가락의 윗부분을 주욱 가로지르는 이 흉터는 엄지에 난 매끄러운 곡선의 흉터와 달리 지그재그, 삐뚤빼둘이다. 꿰멘 흔적도 양 옆으로 남아있어 아주 보기 싫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 손에 자잘한 흉터들이 여러개있다. 이런 상처들은 언제 어디서 다쳤던 것인지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오늘 다친 상처는 흉터가 남을 정도는 아닌 듯하다. 작년에 다친 상처도 이 보다는 더 컸는데, 흉터가 남지는 않았다. 어라 그러고보니 그때 다친 곳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다쳤다고 인식하는 순간,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지는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처럼 느껴지는 것.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인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데서 누군가가 차에 치이거나,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런 장면을 종종 보여주는 것 같은데, 이건 내가 그런 장면을 많이 봐서 그렇게 착각을 하는건지. 아니면 누구나 그런 경험을 겪기 때문에 작가들도 보편적인 경험의 결과로서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건지 모르겠다.

 

 

※ 작년 가을(10월 25일) 다른 블로그에 쓴 글. 해당 블로그 서비스가 종료되어서 여기로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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