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랬다. 비가 내리면 어떤 기억들이 떠올랐다. 빗소리는 저절로 내 주의를 빼앗아 하던 일을 멈추게 만들었고,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머리속에서 리플레이 되곤 했다. 비에 대한 기억들이었다. 리플레이되는 기억에 따라 내 기분이 바뀌어 간다. 쓸쓸하고 외로웠던 기억들, 아프고 슬펐던 순간들, 기뻤던 기억들이 나를 그때 그 순간의 감정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가 생각난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다.
대략 2년쯤 전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야근을 하고 돌아와 설겆이와 손빨래 등의 집안 일을 조금 하고나서 자려고 누웠는데, 어떤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 새벽에 폭우를 뚫고 먼 거리의 편의점까지 다녀오기가 망설여졌다. 술에 대한 욕구가 좀 더 강했다면 그래도 집을 나섰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나보다. 나는 그냥 창가에 앉아 멍하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슬프고 안타까운 기분에 휩싸여 자꾸만 같은 장면을 되새기고 있었다. 어차피 잠들지 못할거라면 뭐라도 하자 싶어서 컴퓨터를 켜고 트위터에 짧막하게 그 기분을 남겼다. 그런데 잠시 후에 김보일 선생님으로 부터 답이 왔다. 비가 오고, 어떤 기억 때문에 술이 땡기지만 자신은 지금 멀리 강원도 어딘가에 연수를 와 있어서 함께 술을 마시지 못해서 안타깝다는 말씀이었다. 그날 밤 바로 그 순간에 선생님도 나처럼 비와 어떤 추억으로 인해 잠들지 못하고, 술 생각이 간절하지만 술을 마시기는 어려운 비슷한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어제 밤에도 폭우가 내렸다. 가볍게 마시고 일어서야지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술자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조금씩 길어졌고, 누군가 반가운 이가 근처에 있다는 소식에 딱 한잔만 더 하기로 마음먹고 반가운 얼굴을 보러 갔다. 오랫만에 만난 만큼이나 대화는 끝없이 이어졌고,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밤을 새워 회포를 풀고 싶지만, 몸이 너무 피곤햇다. 아침에 출근해야 할 일이 걱정되어 일어선 것이 대략 2시 반이 넘어서였다. 아마 그때쯤 시작된 것 같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하필 집에 가려고 나서는데 비가 미친듯이 쏟아진다고 투덜투덜 화를 내며 택시를 기다렸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젖은 옷을 벗어던지고, 몸을 씻고,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나서 의자에 털썩 앉았는데, 몸의 피곤함과는 상관없이 잠이 오지 않았다. 비가 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법 마신 술도 소용이 없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2년 전의 그날 밤이 생각났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같은 기분에 빠져있던 나와 김보일 선생님은 그날 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나는 아마 음악을 들었거나 다운받아놓은 영화를 보았을거다. 선생님은 연수원 숙소에서 무얼 하셨을까? 다음에 만나게 되면 묻고 싶었으나, 여태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새벽 3시 반, 이미 너무 늦어버린 이시간 피곤한 몸과 취한 정신은 휴식을 원하건만, 빗소리는 자꾸만 나를 붙잡고 있었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지쳐 잠들 것인가? 읽다만 책들 중에 하나를 꺼내려고 책장을 살피다가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서 그만 두었다. 가방에서 퇴근 길에 사온 [빅이슈]를 펼쳐 책장을 넘기다가 곧 다시 덮어버렸다. 그래도 2년 전 그날 밤에 비해 다행인 것은 내가 이미 어느정도 술을 마시고 돌아온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술의 힘을 빌어 잠이 올거라고 확신하고 누워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왕이면 슬프고 아픈 기억보다는 즐거웠던 기억을 꺼내보려고 애쓰며 빗소리와 어둠을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