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수라처럼] 이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아니, 드라마 내용과 줄거리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는데,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나와서 그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 감독 중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다음으로 좋아하는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를 통해 처음 알았고, [세번째 살인]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 등을 보고 좋아하게 되었다. 이 감독이 우리나라 배우들과 작업한 [브로커]를 정말 기대했는데, 대실망이어서 하마구치 류스케 보다 순위가 내려갔다. 아직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보고 실망한 적은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1979년 드라마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했다. 그 대본이 이후 자신의 작업들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 드라마를 거의 각색하지 않고 본인이 다시 만들었다고 한다. 시대 배경도 1979년 그대로이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아버지가 다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된 네 딸들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이후로 각자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다루고 있다. 네 딸들은 저마다 개성이 뚜렸하다. 유명한 배우들이 그 역할을 맡기도 했고, 워낙 연기들이 좋아서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늙고 바람난 아버지 역할 역시 유명한 배우가 맡았다. 나에게는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쿠니무라 준이다. 곡성에서의 인상이 워낙 강해서, 이 드라마에서 인자하게 웃는 표정인데도, 나는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곤 했다.

주인공으로 네 자매를 설정한 것은 어쩌면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의 영향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그리고 곧바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도 떠올렸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는 다섯 자매가 나온다. 한 명이 더 많았다. 나는 일단 감독을 보고 이 드라마는 봐야겠구나 생각하긴 했지만, 네 자매의 배역을 보고 엄청 놀랐다. 일단 첫째는 미야자와 리에가 맡았다. 이 분이 젊고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절에는 우리나라에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이전이라 작품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둘째는 오노 마치코가 맡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나왔었고, [솔로몬의 위증]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도 보았었다. 셋째는 아오이 유우가 연기했다. 내가 한창 일본 문화를 접하던 시기에 제일 유명한 배우를 꼽으라면 아오이 유우가 아니었을까 싶다. 넷째는 히로세 스즈가 맡았다.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처음 봤었다. 이후에 역시 고레에다 감독의 [세번째 살인]도 보았고, 이상일 감독의 [분노]도 봤다. 그리고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도 봤다. 외모와 연기력 모두 독보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한다.

네 자매의 독특한 성격과 삶의 모습들을 보는 것이 이 드라마의 주 내용이다. 그리고 아빠와의 관계. 넷은 아니지만 두 딸을 키우는 아빠의 입장에서 나중에 내가 더 늙으면 딸들과 어떻게 지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되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이 드라마에 왜 이렇게 바람 피우는 남성이 많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실제로도 많았을 수도 있다. 과거 70년대 말의 일본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 시절 한국에도 아마 많았을 것이다. 바람이 난다는 건 해당 남성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 여성도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의 분기점이 열린다.

물론 이 이야기는 드라마니까 현실보다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하다. 그러니 이렇게 바람난 남성이 많이 등장하는 것이겠지. 네 자매와 그 엄마 이렇게 다섯 명 중에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은 사람은 두 명 뿐이다. 첫째는 작중 시점에서 이미 남편과 사별한 상태라 남편이 바람을 필 수 없다. 생전에 바람을 피웠는지는 알수 없지만, 아마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본인이 기혼자인 남성과 바람을 피우고 있다. 그리고 셋째의 남편은 아직은 신혼이라 바람을 피우지 않고 있다. 넷째의 남편은 결혼 전에 이미 딴 여자와 있는 모습을 넷째와 둘째에게 들켰다. 둘째는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고 아주 강하게 의심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정황 증거는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바람난 상대방이라고 의심했던 여성의 결혼식에 초대 받는다. 이 둘째의 남편은 이 딸만 넷 있는 집에서 마치 가장처럼 여러 궂은 일들을 떠맡아 처리하곤 한다. 장인어른과도 잘 지내고, 딸들이 바람난 아버지를 비난할 때에도 계속 장인 편을 든다. 그것은 그가 남자라서, 그것도 역시 바람난 남편이라서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 아들 없는 집의 아들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편을 드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편드는 짓이 옳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 시대 상황과 일본 사회라는 곳에서 이 인물의 가치관으로는 바람 한 번 피울수도 있지가 되는 것이라고 봤다. 이것은 다른 여성들의 태도에서도 여러 번 보인다. 첫째는 아버지의 바람에 대해 다른 딸들보다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가 현재 다른 남성과 불륜관계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첫째로서 아버지와의 유대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넷째도 아버지의 바람에 별로 신경쓰지 않고, 막내로서 아버지와 잘 지내는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남친이 집에서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맺는 장면을 보고서도 그것 때문에 화나는 것이 아니라 운동선수인 남친이 계체량 때문에 단식해서 자신도 임신중인데도 단식에 동참하고 있었는데(심지어 그래서 쓰러져서 둘째가 데리고 돌아온 길인데) 남친이 다른 여성과 먹고 남은 흔적인 빈 라면 그릇 때문에 화가 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 일 이후에 바람 자체는 별일도 아니라는 듯 결혼한다. 남편의 바람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둘째다. 그는 아버지의 바람 때문에 엄마가 받은 상처와 고통을 가장 공감한다. 그는 계속 남편의 바람을 의심하고 상대방으로 추정되는 비서를 신경쓰지만, 화면으로 보여주는 장면 만으로는 끝까지 이 남편이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고 확정할 수 없다. 아버지의 바람을 처음 발견하고 사람을 써서 증거를 모은 셋째는 가장 심하게 화를 낸다. 하지만 그 사건 덕분에 만난 남성과 사랑에 빠지고, 나중에는 그 남성이 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엄마는 충격으로 돌아가심) 들어와 살면서, 또 결혼해서 결국 이 셋째 부부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가장 아버지와 잘 지내는 딸이 된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이야기. 퇴직했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일터에 나가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은 일터에서 크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얼마든지 외출이 가능하고, 그 일주일에 하루는 주로 다른 여성과 그의 아들과 보내고 있었다. 작중에서 그 아들은 이 아버지와는 관계없는, 그 여성이 과거에 만난 다른 남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이 어린 꼬맹이가 할아버지 뻘 보다 더 나이가 많은 이 아버지를 엄청나게 따르고, 이 아버지 역시 이 꼬맹이를 엄청 아낀다. 드라마는 아마도 일부러 이 아버지의 바람이 여성을 만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빠 없는 아이를 위해 애써 시간을 내주는 것처럼 보여준다. 그리고 딸들이 자신을 찾아온 것을 본 그 여성은 이 아버지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결혼하기로 했다고 말한 것. 그래서 이 아버지는 이제 더는 그들 모자를 만나지 않는데, 아들은 계속 아빠를 찾아 전화를 걸고 따로 둘이 만나기도 한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아들을 야멸차게 내칠수 없으니 계속 대화하는 것인데, 이 아들이 비밀을 말해버린다. 사실은 새아버지가 없다는 것. 즉, 이 여성이 거짓말로 결혼을 통보해 이 아버지가 가정으로 돌아가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헤어졌다고 해서 바람을 피웠던 과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아버지가 아무리 혼외자인지 이혼 후 편모자가 된 것인지 모를 이 어른 아들에게 잘 대해준다고 해도 그가 가정을 버리고 다른 여성을 만났다는 사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혼자 집안 일을 잘 해내지 못해 엉망으로 살아간다. 심지어 집에 불이 나기도 하고.

고레에다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비슷한 내용들이 있다. 세 자매는 어릴 때 자신들을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갔다고 배다른 자매를 만난다. 그래서 네 자매가 되어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그중 첫째는 가정이 있는 남성과 불륜 관계에 있다. 아버지가 엄마를 버리고 떠나 힘들게 살았을 그가 다른 기혼자를 만난다는 것. 고레에다 감독이 79년의 이 원작 드라마가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말한 것이 이 영화에 드러난다.

바람은 다의어다. 기압의 차이로 인한 공기의 흐름이 가장 많이 쓰는 뜻이고, 무언가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도 바람이다. 내가 10년 가까이 일했던 일터는 태양과 바람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다들 태양광발전과 함께 풍력발전도 하는 것으로 듣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바람은 그 바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그 바람이예요. 윈드가 아니라 호프예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를 두고 다른 상대를 만나는 것도 바람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그건 아니었다. 이건 바람나다 라는 동사였다. 명사로는 이 뜻이 없었다.

솔직히 살면서 다른 이성 상대에게 끌리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속으로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걸 서로 쿨하게 이해하는 관계들도 있다고 듣기는 했다. 그게 실제로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지만.

이 드라마를 주욱 보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들이 들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 길에서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언제나 생각은 많다. 그러나 나는 늘 현실의 어떤 틀 안에 묶여있거나 갇혀있다.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데, 선택은 종종 파란 알약이다. 그냥 익숙하고 편한 상태에 안주하는 것이 제일 쉬우니까. 깨어나라. 깨어나는 선택을 주저없이 하면 좋겠다.

아, 바람 이야기의 어딘가에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이야기도 하려 했는데, 이건 깜빡했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으므로 이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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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06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드라마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그런데 외도에 대한 가치관이 우리나라와 너무 달라 놀라긴 했어요. 히로세 스즈 연기력과 미모에 저도 정말 깜짝 놀랐어요. 최근 그녀가 주인공으로 나온 드라마 <누가 공작의 춤을 보았나> 보는 중입니다. 아주 대성할 배우라는 생각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