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병이 하나 있다.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보는 병.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키지 못하는 병. 이것은 머리가 나쁘다거나 기억력이 안좋다거나 하는 문제와는 조금 다르다. 다른 기억력에는 문제가 없으나, 유독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니 그런 듯하다. 내가 이런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중학교 때였던 듯 하다. 당시 유행하던 최진실, 왕조현, 소피 마르소 등의 책받침을 보면서 같은 사람의 다른 사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화장법이 바뀌거나 머리 모양이 바뀌면 도무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그런 나의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자꾸만 같은 사람의 다른 사진이 들어간 책받침들을 모아와서는 질문하곤 했다. "이 사람하고 이 사람하고 같은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야?", "다른 사람!" 그러면 지켜보고 있던 친구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나는 그게 왜 우스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저 녀석들 눈에는 이게 같은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야! 나는 오히려 그게 궁금했다.

 

대학 때였다. 학생회 활동 등으로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역시나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덕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일은(아마 평생 잊지 못할듯) 한동안 친하게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대화도 많이 나눴는데, 다시 한동안 못 만났다가 어느날 우연히 학생식당에서 딱 마주쳤을때의 일이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누구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아는 사람일거야, 그런데 동기야? 선배야? 아님 후배야? 얼굴로 보아 후배는 아닌 것 같고, 동기 아님 선배일텐데, 말을 놓아야 해? 아님 높여야 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돌면서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반가운 웃음이 아직 그의 존재를 기억해내지 못한 내게는 무섭게 느껴졌다. '아직 안돼! 니가 누군지 떠올리지 못했어! 다가오지마!' 그러나 그는 곧 내 앞에 서서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전해왔다. 마지막 기회였다. 그의 말투에서 말을 높일지 낮출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안녕, 잘 지냈어."라는 평범한 인사말만 갖고는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어, 어" 라고 얼버무리듯 입을 열었고, 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읽은 그는 잠시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정말 쥐구멍이롣 있다면, 머리만이라도 숨기고 싶은 기분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의외로 빨리 그는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뭐야! 너 나 못알아보는거야? 참, 나. 어이없네!" 잠시 혼자말로 뭐라고 궁시렁거리던 그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더니 곧 떠나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남아 계속 그가 누구인지를 떠올렸다. 역시 기억나지 않았다. 그의 그 마지막 경멸을 담은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그 이후로도 가끔 학교에서 마주쳤는데, 이젠 그 쪽에서 아예 내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기억은 어느날 갑자기 망치에 맞은 것처럼 떠올랐다. 그는 동기였다. 즉 말을 놓아도 되는 상대였다. 짧은 기간 여러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들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그의 이름만은 생각나지 않았다.

 

역시 대학때였다. 마지막 2년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집에서 호출이 와서 저녁 시간에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여동생이 타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그 쪽을 쳐다보았으나, 여동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 여동생은 당시에 거의 분장에 가까운 화장을 하고 있었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그래도 동생을 알아보지 못한 사실은 어쩔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다 와서 복잡하던 버스 안이 한적해졌을 때, 자리에 앉아있던 동생이 "오빠야!"하고 불렀을 때까지도 나는 동생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내 동생이랑 비슷하네. 누구를 부르는 거지?' 싶어서 주위를 돌아볼 뻔 했다. 다시 한번 동생이 "오빠야!"를 부른 다음에야 얼른 정신을 차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착각하거나 잘못 알아보고 실수한 일이 무척 많다. 도무지 셀 수도 없다. 거래처를 방문했다가 담당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해 젊은 여직원들의 얼굴들을 열심히 살폈는데, 바로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던 그 사람인 줄 모르고 30분 넘게 기다렸던 적도 있었고, 다른 거래처에서는 담당자인줄 알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가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어서 엄청 무안했던 적도 있었다.

 

작년부터 활동하고 있는 녹색당에서도 여러번 그런 일이 있었다. 한번은 당원들끼리 함께 FTA반대 집회에 나가기로 하고, 좀 늦게 집회장소에 도착했다. 전화로 위치를 확인해서 당원들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그 자리에는 다른 당원들은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고 있던 한 여성당원이 있었다. 집회가 일단락되고 행진이 시작되면서 그 여성당원이 내게 다가와서 반갑게 말을 붙였는데, 이번에도 나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역시 '어디서 본 것 같긴 한데'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이미 표정관리하기에는 늦어버린 상황. 그는 내가 적당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그냥 돌아서서 자신의 자리로 간 듯 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생각하느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술자리에서 그가 "말을 걸었는데, 반응이 없길래, 아, 못알아보시는구나! 싶었어요"라고 쿨하게 말했다. 그의 그런 태도 덕분에 나는 더 부끄러워져서 여러번 사과를 거듭해야 했다.

 

며칠 전에는 광화문 원자력안전위원회 앞에서 탈핵파티가 열렸다. 그 유명한 '햄머링 맨' 근처 거리에서 집회 겸 문화제를 열어서 참석했는데, 거기서 낯익은 여성 활동가를 한 명 만났다. 그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네길래, 나도 정중하게 "안녕하세요!"라고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아마 활동하다가 만난 사람들 중에 한 명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그가 "아니, 왜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세요? 지금 나 못알아보시는거죠?"라고 정색을하면서 물었다. 그제야 뜨끔해진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살피면서 "아니예요. 기억나요!"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서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메모리에서 '여성활동가' 항목을 뒤져서 나오는 얼굴과 이름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은 분명히 낯이 익었다. 내가 활동했던 몇 개의 교집합을 차례로 떠올리다가 마침내 맞는 항목을 골라냈다. 환경단체 활동할 당시에 같은 기수로 교육을 받았던 동기였다. 그가 나보다 어렸기에 아마 당시에는 말을 놓고 지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왜 깍듯하게 인사하냐?"를 물었던 거겠지. 그러나 여전히 그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남자 아이를 하나 발견했다. 그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중간쯤 되어 보이니 대략 대여섯살 쯤 된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새 우리가 다들 결혼하여 아이들이 자라고 있을만큼 시간이 흘렀구나. 새삼 지나간 시간을 느끼면서, 그와의 짧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역사가 워낙 오래되다보니, 주위에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에게 상담도 많이 받았다. 어떤 이는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거라고 관심을 좀 가지라는 요구를 했고, 어떤 이는 그냥 포기하라는 주문을 했다. 오랫동안 꾸준히 활동을 하다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많고, 앞으로도 활동을 중단할 생각은 없으므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텐데, 이 병을 고치지 못한다면 또 앞으로 얼마나 더 망신을 당하게 될까 싶어서 늘 불안하다. 그러나 며칠 전에 마주쳤던 동기와 헤어져서 돌아오면서 이건 난치병이 아니라 불치병이구나 싶었다. 그냥 포기하라는 조언을 했던 친구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 하다. 다만 사람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라는 친구의 조언도 잊지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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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10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감은빛님. 저도 언젠가 같은 내용으로 페이퍼를 쓴 적이 있어요. 의외로 이런 증상을 가지신 분들이 많군요. 안면인식장애 말입니다. 제 경우에도 친구 얼굴을 못알아봐서 엉뚱한 사람한테 말걸고 그랬더랬어요. 하핫.

모두에게 적용되는건 아닌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떤 이들의 얼굴은 아주 잘 기억나거든요. 그런데 어떤 이들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요. 앞머리가 있었지 머리가 길었지 스포츠머리였지, 이정도의 어떤 윤곽은 기억하지만 얼굴형태는 뿌옇다고나 할까요. 이미지만 남아있을때도 있고, 어떤 경우엔 이미지조차 남아있지 않아서 저도 상당히 애먹는답니다. 특히 제가 지금 하는 일에서는 얼굴을 잘 기억해야 하는데, 그걸 통 못해서 누군가 찾아올때마다 동료직원을 쳐다봐요. 그러면 동료직원이 입모양으로 누구라고 말해주죠. orz


저는 사람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그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그림 기억을 전혀 못해요. 만화책은 재미있게 읽어도 전혀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요. 이쪽으로는 뇌가 발달하기를 멈춘듯 해요. 제 경우엔, 관심과는 별개로 말이지요.

감은빛 2012-07-13 11: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저와 같은 불치병을 갖고 계시군요.
(불치병에 반갑다는 표현을 써서 좀 그렇지만)
이거 정말 반가운데요!
다락방님이 쓰신 글을 찾아 읽고 싶네요.

시간날 때 검색해보겠습니다.

라주미힌 2012-07-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변사람들을 익숙하게 하는 것도 방법인거 같아요;; 적극적으로 알려서.. 흐흐
저도 핸디캡이 있는데, 어쩔 수 없죠 뭐.. 본인들이 익숙해져야지 -_-;;

감은빛 2012-07-13 12:00   좋아요 0 | URL
저는 가능하면 사람들이 제가 못알아본다는 사실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렇지만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더라구요.
라주미힌님도 조금은 증상을 갖고 계신가봐요. ^^
저만큼 심하지는 않겠죠?